[강천석 칼럼] ‘윤석열 대통령의 시간’
강남·서초·송파 정당 국민의 힘, 中上層 정당에서 中産層 정당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 20년 됐을까. 일본 정치부 기자들이 서울에 왔다. 그들이 사무실에 들러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중 하나가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한국 역대 대통령 가운데 가장 저평가(低評價)된 대통령이 누굽니까.” 잠시 뜸을 들이다 “노태우 대통령요. 사실 우리는 노 대통령 시대에 만들어진 틀 속에 살고 있어요.” 뜻밖이란 표정이었다. 보통 일본인이 아는 한국 대통령은 박정희·김대중 두 대통령뿐이던 시절이었다.
보충 설명을 기다리는 눈치였다. “한국 최대 과제는 쿠데타가 아닌 정권 교체 방식을 찾아내는 것이었어요. 본인이 군사 정변(政變)과 관련된 인물이지만, 군인 출신이기에 오히려 쿠데타 재발(再發) 가능성을 상당 부분 제거할 수 있었습니다. 완전히 뿌리를 뽑은 것은 김영삼 대통령이지만. 다음으로 지역 근거와 정체성(正體性)이 제각각인 3개 보수 정당을 통합해 정권 지반(地盤)을 크게 넓혔어요. 그랬기에 철저한 반공(反共) 국가인 한국이 냉전 해체라는 세계 흐름에 빨리 올라타 과거 적대국인 소련·중국과 국교(國交)를 정상화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나라에서 미키 부키치(三木武吉)가 해낸 일을 한 겁니다.” 젊은 세대라서 ‘미키’라는 이름이 생소한 듯했다.
기자가 일본 근무를 하던 1980년대 말 일본 국가 어젠다(agenda)는 ‘전후(戰後) 정치 총결산’이었다. 패전(敗戰) 50년이 됐으니 과거를 돌아보고 국가 진로를 재설정(再設定)하자는 뜻이었다. 그런 자리마다 미키 부키치라는 이름이 빠짐없이 등장했다. 일본의 대표적 진보 월간지가 꾸린 좌담회 끝머리에 ‘잊을 수 없는 정치인’으로 모두가 미키를 꼽았다. 좌파들이 우파 정치인 미키를 전후 일본을 만든 인물로 뽑은 것이다.
미키가 활동하던 1950년대 중반은 좌파 전성시대였다. 일본판 민노총 총평(總評), 일본판 전교조 일교조(日教組)가 세상을 들었다 놓았다 했다. 보수 성향 교수는 학생들 야유로 수업 진행이 어려웠다. 영화·연극·출판은 좌파 독무대(獨舞臺)였다. 당장 정권이 넘어갈 분위기였다.
반면 보수 집권 자유당은 옛 원한(怨恨)으로 갈래갈래 찢겼고, 나머지 세력도 다투느라 바빴다. 이 상황에서 장관 한번 해보지 못한 미키가 보수 통합 운동에 뛰어들었다. 먼저 껴안은 인물이 자신의 꿈을 박살낸 정적(政敵)이었다. 통합 대상으론 공산당과 사회당이 아니라면 색깔이 선명하고 선명하지 않고를 따지지 않았다. 자기가 올려 세운 총리, 자기가 만든 당 총재가 통합을 가로막자 그들을 자리에서 끌어내렸다. 당시 미키 등 뒤엔 통합에 미친 귀기(鬼氣)가 서려 있다 했다. 그렇게 1955년 말 보수 통합을 성사시켰다. 그러고 몇 달 후 암(癌) 말기였던 미키는 숨을 거뒀다.
일본 전후 부흥은 정치 안정 덕분에 가능했고, 정치 안정은 보수 통합으로 가능했고, 보수 통합은 미키가 있어서 가능했다고 평가한다. 전후 정치의 공(功)과 좌-우파 간 정권 교체가 불가능하게 만든 과(過)가 모두 미키 때문이라는 것이다.
지금은 윤석열 대통령과 국민의힘의 시간이다. 강서구청장 선거에서 13만7066명이 민주당을, 9만5492명이 국민의 힘을 찍었고, 25만6939명이 기권했다. 기권이 1위, 민주당 2위, 국민의 힘 3위였다. 영국 선거에서 보수당 지지자가 노동당으로 이사하거나, 미국 선거에서 공화당 지지자가 민주당 지지자로 돌아서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 역(逆)도 마찬가지로 드물다. 지지했던 정당에 대한 불만은 ‘기권’으로 표시한다. 선거 때마다 왔다 갔다 하는 유권자는 투표를 한두 번밖에 해보지 않아 당색(黨色)이 옅은 새내기 유권자와 중간층 유권자다.
정치에서 인사(人事)는 유권자에게 보내는 메시지다. 정책은 효과는 더디지만 유권자를 지지 정당에 묶어두거나 다음 혹은 다다음 선거에서 유권자를 끌어오는 수단이다. 윤 정부 인사와 민생(民生) 정책은 강남·서초·송파에만 기대는 중상층(中上層) 정당 국민의힘 지지 기반을 한강 이북(以北)과 경기 쪽으로 확산해 중산층(中産層) 정당으로 거듭나겠다는 의지를 얼마나 전달했을까.
‘물러터졌다’해서 ‘물통령’이라던 노태우 대통령은 돌아보면 ‘정치는 다수(多數)를 만드는 예술’이란 데 투철했던 대통령이었다. 100명 넘는 국민의힘 의원 가운데 일본의 미키처럼 통합에 미친 의원이 하나라도 있을까.
광화문 거리의 지저분한 각종 정치 플래카드가 대부분 정리됐다. 남은 플래카드 중 하나가 ‘이재명 구속하라. 조용하게 살고 싶다’다. 보수 유권자는 다 비슷한 마음일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 상당수가 투표장에 나가지 않았다. 그렇기에 여권은 선거에 담긴 뜻을 더 깊이 새겨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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