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비 원더도 극찬… 디지털 세상의 ‘흰 지팡이’가 되겠습니다”

최인준 기자 2023. 10. 14. 03:06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주말]
點字 워치·패드 개발한
스타트업 ‘닷’ 성기광 대표
스타트업 ‘닷’의 성기광 대표가 개발한 태블릿PC ‘닷 패드’는 연동된 노트북PC, 스마트폰에 이미지·텍스트를 입력하면 바로 화면에 점자(點字)로 변환된다. 시각장애인도 대학 강의를 듣고, 회사 발표 자료를 만드는 일이 수월해진 것이다. /장은주 영상미디어 객원기자

2014년 미국 유타대 교환학생이던 청년 성기광(33)은 당시 미국 시애틀에서 유학을 하고있던 친구 김주윤과 함께 시각장애인용 성경책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성경 구절을 점자(點字)로 한 글자씩 변환해 옮기다 보니 혼자서 들고 다닐 수 없을 만큼 거대했다. 구글 같은 혁신 기업을 만들고 싶던 그는 기막힌 창업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전자책처럼 종이 점자도 디지털로 제작하자! 그해 한국에 돌아온 성기광은 김주윤과 함께 점(點)을 뜻하는 ‘닷(dot)’이라는 이름의 스타트업을 세우고 제품 개발에 들어갔다.

그렇게 해서 세상에 나온 제품이 시각장애인을 위한 스마트워치(‘닷 워치’)와 태블릿PC(‘닷 패드’)다. 닷 워치는 시계 화면에 내장된 직경 2㎜ 점자가 튀어나와 연동된 스마트폰에 도착한 문자메시지 내용과 시간을 표시해준다. 4셀이 있는 닷워치와 달리, 닷패드는 320셀이 있어 총 2560개 점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기를 노트북PC나 스마트폰, 태블릿PC와 블루투스로 연결한 뒤 특정 그림을 띄우면 닷패드 화면에 0.1초 만에 점자로 똑같이 배열되는 방식이다. 시각장애인 사용자는 튀어나온 점을 손으로 만지며, 동시에 스크린리더로 소리 설명을 들으며, 어떤 이미지인지 느낄 수 있다.

점자 성경
닷이 2017년 개발한 점자 워치. 시간, 문자메시지가 점자로 나타난다. /닷

닷은 ‘장애인을 대상으로 한 제품은 성공하기 어렵다’는 오랜 편견을 깨부쉈다. 유명 시각장애인 팝가수 스티비 원더, 테너 안드레아 보첼리가 닷의 제품을 애용하면서 글로벌 시장에서 주목받았다. 2021년에는 미국 정부와 300억원 규모의 닷 패드 납품 계약을 체결했고, 애플·마이크로소프트·도요타 등 글로벌 자동차, 금융, 테크 기업들이 협업하자며 손을 내밀고 있다. 닷 제품의 잠재력이 입증된 것이다.

올 초 세계 최대 IT 전시회인 미 CES에서는 ‘최고 혁신상’(Best of Innovation)을 받았다. 시각장애인의 기본권을 지키기 위해 제정된 ‘흰 지팡이의 날’(10월 15일)을 앞두고 닷의 공동 창업자인 성기광 대표를 서울 금천구 본사에서 만났다. 그는 “시각장애인은 SNS(소셜미디어) 등에서 쏟아지는 수많은 이미지, 영상 정보를 거의 볼 수 없어 디지털, 온라인이 중심이 된 사회에서 소외되고 있다”며 “그들의 디지털 격차를 없애는 게 닷의 목표 중 하나”라고 했다.

◇스티비 원더, 안드레아 보첼리도 광팬

-이전에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시각 보조 도구가 없었나요.

“그간 시각장애인들이 쓰는 점자 디스플레이 기기는 발전해오고 있지만 단점도 많았습니다. 점자 돌기가 세라믹(도자기)으로 만들어져 부피가 크고 가격도 비쌌어요. 나타낼 수 있는 정보의 양도 적었고요. 많은 시각장애인을 만나 고충을 들으며 시행착오를 거쳐 돌기의 재료를 자석으로 바꾸고 크기를 소형화했습니다.7년에 걸쳐 개발한 닷 패드는 점자와 그림을 동시에 보여줄 뿐만 아니라, 표나 도형, 그래픽 등 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시각장애인에겐 음성 안내가 더 빠르지 않은가요.

“사물이나 환경을 파악하는 데 음성보다 촉각이 더 직관적이에요. 테슬라 주가가 얼마나 올랐는지 알고 싶다면 주가 그래프 선을 직접 만져보는 게 빠르죠. 학교에서 이산화탄소(CO2), 물(H2O) 같은 간단한 화학 분자 구조를 설명하려면 A4용지를 점자로 가득 채워야 합니다. 그 대신 패드에 점자로 나타낸 화학구조 그림을 손으로 만지면 어떤 형태인지 바로 알 수 있죠.”

닷의 성기광 대표가 지난 4월 서울 주한 스위스대사관저에서 한국이미지커뮤니케이션연구원(CICI, 이사장 최정화) 주최로 열린 한 포럼에서 해외 참석자들에게 닷패드, 닷워치 등 자사 제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장은주 영상미디어 객원기자

-실제로 사용해본 고객들의 반응은 어떤가요.

“지난해 미국 LA에서 열린 시각장애인 관련 콘퍼런스에 참가해 닷 패드를 시연한 적이 있습니다. 행사가 열린 나흘 동안 어느 중학교 여학생이 매일 저희 부스를 찾았는데 마지막 날 부모 손을 잡고 함께 왔습니다. 그 학생은 닷패드에 나타난 꽃 그림과 그래프, 캐릭터 이미지를 만져보더니 ‘저는 원래 앞이 안 보여 노래를 부르는 뮤지션이 유일한 진로라고 생각했는데 닷패드를 써보고 웹디자이너를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하더라고요. 옆에 있던 부모도 딸을 보면서 눈시울이 촉촉해지시더라구요. 이 작은 기술이 그 학생의 꿈을 더 크게 만들어준 것 같아서, 저에게는 깊은 인상으로 남았습니다.”

-유명 인사들도 닷의 기술력을 극찬했습니다.

“이탈리아의 성악가 안드레아 보첼리가 닷의 열렬한 팬입니다(웃음). 초등학생 딸이 그린 아빠의 얼굴 그림을 닷 패드로 처음 만져봤다고 하더라고요. 새로 이사 간 집에 닷 직원들이 초대받은 적이 있는데 ‘잊을 수 없는 감격적인 순간이었다’고 말했습니다. 가수 스티비 원더도 닷 워치, 패드를 쓰는데 저를 만났을 때 한 말이 ‘내가 수백만번 사인을 했는데 내 사인을 만져본 게 처음이었다. 만져보니 모양이 마음에 안 들어 사인을 바꿔야겠다’였습니다. 정말 유쾌한 분이었어요. 하하.”

◇“디지털 세상의 흰 지팡이가 되겠다”

-원래 장애인에 대해 관심이 많았나요.

“세계에는 2억8500만명의 시각장애인이 있다고 해요. 제 가족이나 지인 중에는 시각장애를 가진 사람이 없어서 이렇게 많은 줄 몰랐습니다. 이분들이 어떤 불편을 겪고 있는지도 관심이 없었죠. 지금은 새로운 건물에 들어가거나 엘리베이터를 탈 때 ‘시각장애인이라면 어떤 어려움이 있을까’를 가장 먼저 생각합니다.”

-’흰 지팡이의 날’에 특별히 예정된 이벤트가 있나요.

“매년 이맘때 시각장애인 관련 뉴스레터를 제작해 배포해요. 흰 지팡이는 시각장애인들만 쓸 수 있다고 합니다. 앞으로 전진하려면 지팡이로 주변을 두드려 세상의 요철(凹凸)을 구분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죠. 다른 감각보다 촉각을 동원해야 한 발을 뗄 수 있습니다. 흰 지팡이가 시각장애인들이 바깥 세상과 만나는 소중한 접점인 셈이죠.”

스타트업 닷이 개발한 시각장애인용 태블릿PC '닷패드'에 점자로 생긴 모양을 손으로 만지는 모습./닷

-닷 패드의 가격이 고가라 꽤 부담스러울 수 있는데.

“닷 기술이 주목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기존 점자 셀 기술 대비 가격을 혁신적으로 낮췄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만큼 기존 기술 가격대가 높았고, 오랫동안 큰 변화가 없는 시장이었습니다. 정부, 기업을 대상으로 한 공공 계약이 많습니다. 닷 패드를 써본 한 시각장애인 지인분은 ‘또 하나의 새로운 세상이 열린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닷의 기술들을 디지털 격차를 없애는 ‘온라인 세상의 흰 지팡이’가 되길 바라며, 생산 확대와 기술 개발을 통해 생산 단가를 낮추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닷의 제품이 한국보다 해외에서 먼저 인정받았는데.

“처음에 우리 정부도 닷의 기술에 관심을 보였지만 종전까지 없던 제품이다 보니 계약은 쉽지 않았습니다. 미국 정부와 300억원 수주 계약을 한 뒤부터 분위기가 조금씩 달라지고 있어요. 지금은 보건복지부나 교육부 등에서 관심을 갖고 있고, 서울맹학교를 비롯해 시각장애인 시설들이 닷패드 도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세계 어디나 점자가 잘 보급돼 있지 않은가요?

“엘리베이터, 지하철 어디에나 점자는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한번 인쇄하면 바꿀 수 없는 ‘죽은 점자’예요. 우리는 스마트폰, 태블릿PC처럼 실시간으로 바뀌는 정보를 전달하는 기술을 제공하려는 겁니다. 점자로 즉각 변환이 가능한 촉각 디스플레이는 닷이 세계 최초예요. 특히 공부할 자료가 많은 대학 같은 고등교육 환경에서 활용도가 높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애플·도요타 등 글로벌 기업 러브콜

-한국의 신생 업체가 애플과 협업했습니다.

“다른 업체보다 애플은 장애인 고객에 대한 잠재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아이폰을 사용하는 시각장애인이 많은데 화면에 뜨는 사진이나 그래프까지 묘사해주지는 않잖아요. 닷패드는 블루투스로 아이폰·아이패드와 연결하면 아이콘과 그림·그래픽까지 표현해줍니다. 시각장애인과 다른 가족이 소통할 접점이 많아진 거예요.”

닷의 성기광 대표가 지난 4월 서울 주한 스위스대사관저에서 한국이미지커뮤니케이션연구원(CICI, 이사장 최정화) 주최로 열린 한 포럼에서 해외 참석자들에게 닷패드, 닷워치 등 자사 제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장은주 영상미디어 객원기자

-다른 해외 업체들도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면서요.

“미국 전역에 5,000개 은행 지점을 두고 있는 대형 은행체인의 브랜치 혁신 담당 부서와 주별 핵심 지점에 시범적으로 시각장애인 고객 안내를 위한 닷패드를 배치를 논의하고 있습니다. 시각장애인은 은행에서 계좌를 개설하거나 대출 계약서에 사인할 때 주의 사항을 음성으로만 안내 받다 보니 놓치는 내용이 있었다고 해서 은행측에서 미팅을 요청했고, 중요한 내용을 점자와 그래픽으로 정확히 확인하는 방안을 협업하고 있습니다. 또한, 지난달엔 일본 자동차 기업 도요타가 진행하는 장애인 교통 수단 지원 사업에 참여해 자동차 경주 대회에서 시각장애인들이 닷패드로 경기 상황을 실시간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하는 서비스를 제공했습니다.”

-앞으로 어떤 서비스가 더 나올 수 있을까요.

“올해 가장 각광받는 기술인 생성형 AI ‘챗GPT’도 닷패드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자동차를 보여줘’라고 텍스트를 입력하면 바로 촉각 패드에 나타나는 식이죠. 음성 인식 기능을 도입하면 말로 지시해서 원하는 사물의 이미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장애인 종합 플랫폼 기업으로”

-장애인 대상으로 기업을 하면서 배운 게 있다면.

“시각장애인의 일상을 돕는 첨단 기기가 의외로 부족합니다. 디지털 환경에서 그래픽, 이미지를 효과적으로 볼 수 있는 수단이 더 필요한 것 같습니다.”

-장애인 관련 시장이 크지는 않은데요.

“모두가 꿈꾸는 유니콘 기업(기업가치 1조원 이상 스타트업)보다 한 사람에게 더 쓸모 있는 기업이 되는 게 목표입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옳다고 믿는 일’을 꿋꿋이 해나가면 모두에게 인정받을 수 있다고 봅니다.”

-닷이라는 기업명에 어떤 의미가 있나요?

“‘닷’(점)은 점을 기반으로 해서 세상을 연결한다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희 사명이 Making the world accessible dot by dot 이기도 한 이유입니다. 지금은 시각장애인용 제품을 개발에 집중하고 있지만, 중장기적으로는 모든 장애를 아우르는 종합 플랫폼 기업으로 성장시키는 것을 비전으로 하고 있습니다. 청각장애인, 지체장애인도 함께 사용할 수 있는 제품, 기술을 개발하는 게 목표입니다. 저희와 다른 분야라면, 장애 질환 혁신 치료제 개발 업체에 저희가 투자를 하는 식으로 기여하는 영역을 더 확대해나가고 싶습니다.”

서울 금천구의 스타트업 '닷' 본사에서 김주윤(왼쪽)·성기광 공동대표가 아이패드와 자체 개발한 시각장애인용 태블릿 PC '닷 패드'를 들고 있다. 아이패드 메모장에 쓰인 '사랑해요'라는 문구가 닷 패드에 양각으로 표현돼 있다. 김·성 대표는 "전 세계 시각장애인에게 닷 패드를 보급하는 게 꿈"이라고 했다. /이기우 기자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