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핼러윈의 H도 못 꺼내겠다” 자취 감춘 ‘MZ의 명절’
핼러윈 참사 1년
축제가 터부 된 한국
핼러윈이 한국에서 사라졌다. 1년 전 서울 이태원에서 159명의 목숨을 앗아간 압사 사고 여파다. 젊은 층과 어린이 사이에 유례없이 급속도로 퍼졌던 이 서양의 놀이 명절은, 이제 ‘트라우마’와 ‘악몽’이란 꼬리표가 달린 금기어가 됐다.
국내 핼러윈 문화 확산의 첨병이었던 영어유치원부터 놀이공원까지, 오는 10월 31일 핼러윈을 전후한 이벤트가 싹 증발했다. 롯데월드와 에버랜드 등 매년 대규모 축제를 벌였던 테마파크들은 일제히 핼러윈을 걷어냈다. 이마트·홈플러스와 미국계 코스트코 등 대형마트, 롯데·신세계·현대 백화점과 온라인몰 등 유통가에서도 핼러윈 관련 의상·소품·식품을 찾아보기 힘들다. 매년 핼러윈 마케팅 경쟁을 벌이던 외식·숙박업계와 공연업계, 지방자치단체와 방송가도 핼러윈을 터부시하고 있다.
매년 핼러윈 기간 업계의 관련 매출은 20~30% 증가할 정도로, 추석과 크리스마스 사이 비수기를 채우는 중요 이벤트로 여겨졌다. 이런 핼러윈 특수를 올해는 업계가 자발적으로 포기하고 있다. ‘참사 1주기에 벌써 사람 모아 장사하느냐’는 여론 비난이 두려워서다.
핼러윈은 고대 아일랜드 켈트족이 죽은 이들의 영혼을 달래고 악령을 쫓는 의식을 한 데서 유래했다. 유령이 알아보지 못하게 분장하던 풍습이 미국으로 넘어오며 ‘내가 아닌 나’가 돼 평소 못 하던 짓궂은 장난 치기, 사탕 왕창 먹기 같은 일탈이 허용되는 축제로 진화했다. 비슷한 놀이 이벤트가 없던 한국에선 미 유학생 출신 등을 중심으로 확산되며 ‘MZ의 명절’로 불렸다.
특히 최근 5~10년간 전국 어린이집과 유치원, 영어학원 등에선 핼러윈이 크리스마스 뺨칠 정도의 연례행사가 됐다. 호박등·해골·거미줄로 실내를 장식하고, 어린이들은 피 칠갑한 유령이나 좀비, 마녀, 만화 주인공 등으로 꾸미고 호박 바구니를 든 채 영어로 “Trick or Treat(사탕 안 주면 장난칠거야)”를 외치며 돌아다녔다.
하지만 지난달부터 유치원과 학원들은 속속 “이번 핼러윈 파티는 없다”고 공지했다. 서울 강북의 한 영어학원 원장은 “미국 문화를 재미있게 가르친다는 취지로 매년 핼러윈 파티를 크게 열었다”며 “그러나 올해는 이태원 트라우마로 ‘아직은 추모하고 자중해야 한다’는 부모가 많아 핼러윈의 ‘H’도 꺼내기 조심스럽다”고 말했다.
학부모들은 “핼러윈 소품만 봐도 이태원 참사 현장의 끔찍한 동영상이 떠오른다” “그렇지 않아도 괴물·귀신 분장 흉측했는데 이참에 다 없어지면 좋겠다”고 한다. 매년 자녀의 핼러윈 의상과 간식, 선물을 준비하느라 스트레스 받았다는 이들도 상당수다. 경기도 한 어린이집에선 핼러윈 행사를 예년처럼 하겠다고 했더니 일부 부모가 “제정신이냐? 그날 아이 등원 안 시키겠다”며 반발했다고 한다.
이태원은 물론 홍대 앞과 강남 클럽가도 잔뜩 움츠린 분위기다. 정부는 ‘제2의 이태원 참사’를 막는다며 이들 지역에 비상상황실까지 두고 인파 통제와 구조·구급 대비책을 마련 중이다. 서울시는 핼러윈 기간 시내 71곳에 CCTV 909대를 설치, 인파 밀집에 따른 위험 징후를 자동으로 당국에 전파하는 ‘인파감지 시스템’을 가동키로 했다. 젊은이들 사이에선 “이런 때 핼러윈 파티 여는 업체는 아마 돌 맞을 것” “삼삼오오 모여 분위기만 내거나 추모 행사 정도 하지 않겠냐”는 말이 나온다. 반면 남들 시선을 피해 한갓진 교외에서 야영객들끼리 즐길 수 있는 ‘핼러윈 캠핑’ 상품은 개시 즉시 예약이 마감될 정도로 인기라고 한다.
일각에선 나라 전체가 과도한 쏠림 반응을 보인다며 불편해한다. 대학 강사 전모씨는 “참사의 본질은 핼러윈이 아니라 한국의 고질적 안전 불감증 아닌가”라며 “사고 났다고 모두 고개 숙이고 살아야 하나. 남에게 우울감을 강요하지 않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여기엔 2014년 세월호 참사 이후 추모를 넘어 정치적 희생양 찾기 광풍으로 번진 데 대한 반감도 작용한다.
핼러윈을 ‘변종 외래문화’라며 무조건 죄악시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핼러윈이 유행한 배경엔 경직된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음주가무와 약간의 선정성·공격성을 용인해 해방감을 안겨준 측면도 있었다는 것이다. ‘NO 핼러윈’이 얼마나 갈지, 축제의 빈자리를 다른 무엇이 채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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