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열어준 통일의 길

김황식 전 국무총리 2023. 10. 14.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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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김황식의 풍경이 있는 세상]
일러스트=김영석

10월 3일 개천절은 우리나라의 중요한 국경일이지만, 독일에서는 ‘독일 통일의 날’로 가장 중요한 국가 기념일입니다. 지난달 헌정회가 발간하는 월간지 ‘헌정’ 편집실에서 ‘독일 통일 33주년과 우리의 교훈’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으니, 잊고 있던 일을 기억해내도록 하는 요청을 받는 느낌이었습니다. 나름대로 독일 통일 과정을 공부하며 느꼈던 역사의 역동성과 경외심, 독일에 대한 부러움은 한동안 잊고 지냈습니다. 국내외 정세에 비추면 통일이라는 단어 자체가 사치스럽거나 공허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숙제로 받은 원고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독일 통일 과정을 상기해보니 부럽고 감동적인 느낌이 다시 살아나는 것은 어찌할 수 없습니다.

1990년 10월 2일 동독 인민의회는 마지막 회의를 열어 동독 정부를 해산하고 동독의 소멸을 선언하였습니다. 동독의 마지막 총리인 데메지에르는 “우리는 하나의 민족이며, 이제 하나의 국가가 된다. 지금은 기쁨의 순간이자 눈물 없는 이별의 시간이다”라고 연설하였습니다. 동독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기적 같은 일이었습니다. 그날 밤 자정 베를린 제국의사당 앞에서 약 100만명의 시민이 운집한 가운데 통일 기념 행사가 열렸습니다. 베토벤 교향곡 9번 ‘환희의 송가’가 울려 퍼졌습니다. 10월 3일 0시를 기하여 독일은 통일되었습니다. 새로 하늘이 열린 듯한 날이었습니다.

이처럼 평화롭고 빠른 통일의 원인은 무엇일까? 독일은 자신의 전쟁 책임으로 분단되었으나 동서독 간 이념 차이에 따른 전쟁이 없었습니다. 제한적이나마 가족 방문, 우편 통신, 방송, 무역 등 교류 협력이 이루어졌습니다. 동독 정부는 상호주의 입장에서 서독 정부가 제공한 지원에 상응하여 요구된 반체제 인사 이주 허용, 문화재 복구, 수질 오염이나 산림 피해 방지 조치 등을 이행하였습니다. 동독은 공산 독재 체제였지만 북한과는 달리 인적 세습이 아니라 최고 지도자가 교체되는 체제였습니다.

1985년에는 소련에서 개혁 개방을 주창하는 미하일 고르바초프 서기장이 등장하였습니다. 그리고 당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조국 폴란드의 자유 노조 운동에 대한 정신적 지원이 동구권 변화에 영향을 주었고, 이것들이 독일 통일 분위기 형성에 보탬이 되었습니다.

1989년 11월 10일 독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당시 동·서독 시민들이 벽 위에 올라가 통일 독일에 대한 기쁨을 만끽하고 있다.

독일은 시대 상황에 맞는 정치 지도자들의 리더십과 비전이 통일 정책을 계승 발전시켰습니다. 우파 기민당은 처음에는 브란트의 동서 간 화해 협력을 통한 평화 조성 정책인 동방 정책을 분단 고착 정책이자 반(反)통일 정책이라고 비난하였으나, 1982년 정권을 탈환한 우파 기민당의 헬무트 콜 총리는 동방 정책을 계승하여 발전시켜나갔습니다. 그리고 독일이 결코 유럽의 평화와 안정을 방해하는 세력이 아님을 이웃 나라에 보여주며 신뢰를 얻었습니다.

위와 같은 사정들은 통일을 이룬 뒤에 보니 통일에 보탬이 되는 요소임은 분명하지만, 당시 독일의 통일을 계획하거나 예견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서독 국민도 통일에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독일을 분단시켰던 1945년 포츠담 회담의 주역인 미국, 영국, 소련 등 전승국 모두는 여전히 독일 통일에 찬동하지 않았습니다. 독일이 통일되어 힘이 커지는 것에 반대하였기 때문입니다. 영국 마거릿 대처 총리는 “우리는 독일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독일이 하나 있는 것보다 두 개가 있으면 더 좋다”고 조롱(?)하였습니다.

그러나 독일 통일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빠르게 진행되었습니다. 1989년 11월 9일 동독인들의 여행 자유화 요구를 들어주는 동독 당국의 조치를 밝히는 과정에서 발표자인 귄터 샤보프스키가 실수하는 바람에 당장 베를린 장벽이 열리게 되었고, 그 뒤 진행된 역사의 흐름은 인간적 통제를 벗어난 통일 방향이었습니다. 인간이 아닌 신의 작품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속담처럼 하늘의 도움은 결코 우연히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서독 정부와 국민은 서두르지 않고 같은 민족으로서 동질성을 유지하고 동포를 돕기 위한 교류 협력의 잔잔한 노력을 하였기에, 하늘은 통일의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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