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도 안 변했네”라는 말
[김신회의 매사 심각할 필요는 없지] 30년 만에 본 친구의 첫마디… 과거의 우리를 이긴 것 같았다
고등학생 때 친구를 오랜만에 만났다. 당시에는 내내 붙어 다녔지만 하는 일과 사는 곳이 달라지면서 연락이 끊긴 이래 가끔 그리워만 하면서 지냈다. 손가락 하나로 전 세계로 연락이 가능한 시대에 그리워만 하다니 견우와 직녀야 뭐야. 하지만 우리는 어느새 게으른 어른이 되었다. 고등학생 시절의 우정이 과속방지턱 없이 쭉 뻗은 도시고속도로라면, 어른의 우정은 요철이 극심한 산길이다. 질병 및 노화, 경기 불황이나 대출금 또는 가정불화로 사네 못 사네 하는 것들이 야무지게 끼어드는 골치 아픈 도로. 모든 걸 사뿐히 즈려밟고 직진해 “반갑다, 친구야!”를 외치기가 좀처럼 쉽지 않다.
“하나도 안 변했네!”
몇 년 만에 마주한 친구의 첫마디였다. 만나러 나오기 전에 화장하면서 ‘얼굴 왜 이래, 대체 뭘 얼마나 더 발라야 돼!’ 하고 투덜대던 나인데 하나도 변한 게 없다니. 나는 고등학생 때부터 노안이었던 걸까? (맞음.) 하지만 그 말에 적절한 답은 정해져 있다는 걸 알기에 냉큼 읊었다. “너도 똑같아!” 친구 역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30년 가까운 세월을 없었던 일로 만들어버리고 나서 금세 멋쩍어진 중년의 두 사람.
밥 먹고 차 마시며 그동안 밀린 이야기를 나눴다. 일은 할 만한지, 남편과는 살 만한지, 삶의 만족도 같은 걸 두루뭉술 주고받는 사이에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는 말이 사실임을 깨달았다. 내가 기억하는 고등학교 시절의 친구는 무슨 일에도 초연하고, 삶에 큰 욕심이나 미련이 없어 보였는데 지금도 그래 보였다. 근래 벌어진 성가신 일을 덤덤하게 털어놓는 모습도 예전과 다르지 않았다. 하긴, 매사 호들갑을 떠는 나와는 다른 성격이어서 더 끌렸지. “기억나?”를 시작으로 우리가 함께 겪은 일들을 추억하는 친구를 보면서 한 시절, 이 친구가 나에게 얼마나 큰 세계였는지 떠올랐다.
진한 우정은 사랑과 닮았다. 아니, 어쩌면 사랑보다 길고 끈질기게 삶에 영향을 미친다. 되돌아보면 고등학교 시절의 친구만큼 오래 기억에 머무는 존재가 없다. 그 시절 친구와 함께 들었던 음악을 나는 지금도 듣는다. 못 말리는 길치임에도 함께 걷던 하굣길만큼은 또렷이 기억난다. 서로의 교복 매무새나 평소 즐겨 입던 옷, 주변에 머물던 친구들의 얼굴과 이름도 뇌리에 빼곡하다.
온갖 호르몬과 고민이 폭발하고, 세상에 대한 느낌표와 미래에 대한 물음표가 충돌하는 시절의 우정은 연애보다 더 격정적이다. 그 경험은 이후에 경험할 인간관계의 초석이 되어준다. 나는 지금도 고등학교 때 친구를 사귀던 모습 그대로 사회생활을 한다. 그래서 발전이 없는 걸까? (맞음.)
어쩌면 이 모든 이유로 우리는 연락을 주고받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추억한다고 그 시간이 돌아오지는 않으니까. 과거와는 다를 서로를 마주할 자신이 없으니까. 각자의 자리에서 어떻게든 버텨야 하니까. 어느새 찌들어버린 내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은 게 나뿐일까. ‘우정 그거 다 한때야. 지금 옆에 있는 사람한테나 잘하자’며 꾸역꾸역 살기 바쁘지 않은가.
그러고 보면 “하나도 안 변했네”라는 말은 상대가 아닌 나에게 하는 말이 아닐지. 친구의 얼굴에 희미하게 남은 그때 모습을 찾으며, 나에게도 예전의 모습이 남아있길 바라는 마음이 시키는 말. 지친 심신으로 순수했던 시절에 대해 이야기하는 일은 반갑기도 하지만 머쓱하기도 하다. 과거의 기대와는 조금도 비슷하지 않은 현재를 마주하면서 인생 별것 없다는 진리를 실감하는 일은 웃기면서도 슬프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반가운 머쓱함도, 웃긴 슬픔도 그럭저럭 감당할 수 있는 어른이 되었다. 지금이 되어서야 낼 수 있는 용기가 있다. ‘그때의 마음으로 지금의 우리를 받아들이러 왔어.’
몇 시간의 만남 동안 친구의 눈동자가 유난히 빛나던 순간들을 기억한다. 함께 어울리던 친구들의 안부를 나눌 때, 쓸데없이 대장 행세를 하던 같은 반 아이에 대해 말할 때, 생일을 맞은 학생들에게 매번 다른 선물을 건네던 담임 선생님을 떠올릴 때. 모든 추억이 우리를 그때로 데리고 갔다. 따지고 보면 특별히 재미있는 일은 없었던 것 같은데 현재 삶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비하면 모조리 감동과 폭소의 대서사시였다. 지금 삶이 얼마나 재미없다는 뜻인가 싶어 잠시 아득해졌지만, 시간차 공격으로 다른 추억거리를 끄집어내어 킬킬거렸다. 옛날이야기를 늘어놓으며 ‘그땐 그랬지’ 하는 어른이 되고 싶진 않았는데. 하지만 정작 되고 나니 괜찮네? 할 만하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뒤늦게 떠오르는 추억들에 마음이 바빠졌다. 잘 기억해 두었다가 다음에 만났을 때 풀어놓아야지. 그때는 내가 먼저 말해야겠다. “역시 너, 하나도 안 변했어!” 실제로 변했고 변하지 않았고는 중요하지 않다. 굳이 그 말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중요한 거다. 그 말은 어른의 특권이니까. 그 말을 하는 순간, 과거의 우리를 적어도 하나는 이긴 것 같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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