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TI와 사주, 무엇을 믿습니까
MBTI와 사주에 빠진 MZ세대
나의 성격과 친구·직장 내 대인관계가 막히면 MBTI를 들여다보고, 진로와 미래·연애가 답답할 땐 사주 앱을 켠다. MBTI에 빠진 청년들이 구세대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사주에도 눈길을 돌리고 있다. MBTI와 사주, 어떻게 다르고 같을까. 어느 쪽이 더 용할까.
MZ들의 인간관계 척도가 된 MBTI
직장인 최모(32)씨는 소개팅 주선을 받을 때 ENTP 유형을 무조건 기피한다. 최씨는 “살면서 겪은 최악의 인간 유형이 공교롭게 다 ENTP였다”며 “주변에도 물어보니 제가 생각한 ENTP의 단점과 비슷한 경우가 많더라. 각자 자신의 MBTI에 맞는 유형을 찾아서 소개팅을 받는 게 보통”이라고 했다.
MBTI는 요즘 MZ세대가 가장 신뢰하고 의지하는 인간 평가 수단이다. 대인관계를 ‘손절’하거나 ‘찐친(진짜 친한 친구)’을 고를 때, 연애 상대를 정하거나 심지어 회사에서 직원을 뽑을 때도 MBTI가 중요한 가늠자로 사용된다. MBTI 유형별로 연애 궁합이나 직장 상사-부하 궁합, 친구 궁합까지 정리된 도표도 널리 퍼져 있다.
애인도 친구도, 알바까지 MBTI
청소년들에게 MBTI는 친구를 가리는 척도로 자리 잡았다. 최근 한 교복업체가 초중고 학생 400여 명을 설문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84%가 “친구를 사귈 때 선호하는 MBTI가 있다”고 답했다. 대학들은 MBTI 검사로 학생의 진로를 설계하는 프로그램을 도입하고, 결혼정보회사들은 MBTI 맞춤형 매칭 서비스까지 내놓고 있다.
MBTI는 1944년 미국의 작가 캐서린 쿡 브리그스가 딸 이저벨 브리그스 마이어스와 함께 정신분석학자 카를 융이 제시한 심리유형론을 근거로 개발한 성격 유형 검사다. 외향(E)-내향(I), 감각(S)-직관(N), 사고(T)-감정(F), 판단(J)-인식(P)을 조합해 총 16가지의 성격 유형으로 분류한다. 서구권에선 1960년대부터 활용됐고, 국내에는 1990년대 도입돼 별자리·혈액형을 대신해 사람을 판단하는 가장 효율적이고 손쉬운 수단으로 세력을 확장했다.
MBTI 유행 초기부터 전문가들은 “MBTI로 섣불리 사람이나 인간관계를 단정해선 안 된다”고 경고했지만, 우려는 이미 현실이 됐다. ‘INFJ는 예민해서 별 말 아닌데 상처받고 스스로 착각해서 사람을 죄인 만든다’ ‘ESTJ는 이기적인 나르시스트에 상대방을 가스라이팅 한다’ 등 특정 MBTI 유형을 비난·기피한다는 글이 온라인에 봇물처럼 쏟아진다. 자신의 단점이나 문제를 MBTI로 합리화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나는 P형이라 지각을 자주 할 수밖에 없다”거나 “나는 T 유형이라 다른 사람의 감정에 좀처럼 공감 못 한다”는 식이다.
”MBTI, 성격 단점은 잘 못 찾아내”
전문가들은 “MBTI를 제대로 이해하고 긍정적으로 활용하는 게 좋다”고 했다. 김종구 한국성격검사연구소 소장은 “MBTI는 16개 유형이 우열의 차이가 없고 다 훌륭한 면들을 가지고 있으며 다른 사람과의 차이를 이해하기 위한 수단이지, 누군가를 배척하고 단정 짓는 수단이 아니다”고 했다. 이동귀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는 “다른 성격유형검사와 MBTI를 비교해 보면 긍정적인 성격 특성은 공통적으로 잘 나타나지만, 부정적인 특성은 그렇지 않다”며 “즉 MBTI는 성격의 긍정적인 면을 잘 포착하는 반면 부정적인 특성은 예민하게 다루지 못하기 때문에 단순한 흥미 이상으로 사람을 평가하거나 채용하는 데 활용하는 건 무리”라고 말했다.
MBTI별 궁합표 등에 대해서도 전문가들은 “신뢰성이 떨어지니 믿어선 안 된다”고 말했다. 김종구 소장은 “가령 ESFJ도 어떤 인품과 가치관을 가졌느냐에 따라 굉장히 친절하고 회사 내 화합을 이끄는 직장인이 될 수 있지만, 반대로 누구보다 뛰어난 사기꾼도 될 수 있다”며 “MBTI는 말 그대로 성격 유형을 보여주는 것이지 사람의 인품과 도덕성을 가리키는 건 아니다”라고 했다.
한국 청년들이 이토록 MBTI에 열광하는 이유는 뭘까. 전문가들은 “한국의 교육시스템이 유년 시절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충분히 탐구하고 설명할 수 있도록 하지 못한 게 근본 원인”이라고 입을 모았다. 한 번의 속성 검사로 자신의 성격 유형을 분석하는 MBTI에 그래서 열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사주, MBTI보다 3만배 더 정교하다?
31세 직장인 김세영(가명)씨는 사주(四柱)를 ‘열공’ 중이다. 틈날 때마다 스마트폰 앱으로 검색하며 공부했는데, 이제 주변 커플의 궁합을 봐줄 수준까지 올랐다. 그가 속한 MZ세대에서 MBTI가 유행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저도 MBTI를 맹신하다시피 했죠. MBTI가 인기를 얻은 이유 중 하나가 과거 유행한 ‘혈액형 성격설’보다 더 정확하다는 거였잖아요. 혈액형은 4가지에 불과한 반면, MBTI는 16가지로 4배 많으니까요. 그런데 사주는 무려 51만8400가지로, MBTI의 3만2400배란 걸 알게 됐어요. 그만큼 더 세밀하고 정교하게 성향과 기질을 파악할 수 있다는 의미 아니겠어요?”
MZ세대 10명 중 9명 ‘운세 본 적 있다’
기성 세대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사주에 젊은 세대가 빠져들고 있다. 구인·구직 사이트 알바천국이 최근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MZ세대 10명 중 9명이 ‘운세를 본 적 있다’고 답했다. 젊은이들의 ‘핫플레이스’로 떠오른 서울 익선동 한옥거리에서 사주 부스를 운영하는 역술인 A씨는 “과거와 달리 젊은 친구들도 많이 온다”고 했다.
“20대 연인들이 데이트하면서 찾아와 궁합을 봐요. 여자 친구들끼리 오는 경우도 많은데, ‘내 연애운은 언제쯤 풀리느냐’를 자주 물어요. 앞으로 진로나 일이 어떻게 풀릴지, 사주상 본인 성격이 궁금하다며 찾아오기도 하고요.”
MZ세대는 아무래도 역술인을 직접 만나기보다는 통화나 문자, 온라인 등 비대면 상담을 선호한다. 네이버의 온라인 상담 플랫폼 ‘네이버 엑스퍼트’에서는 지난해 매출의 74%가 운세 및 사주 상담에서 발생했는데, 서비스 이용자의 72%가 20·30대였다. 유튜브나 메신저 서비스, 소셜네트워크(SNS)로 사주를 보기도 한다.
명품 수입업체를 운영하는 방준성(35·가명)씨는 “인스타그램으로 알게 된 역술인에게 DM(다이렉트 메시지)을 보내 연락했고, 카카오톡으로 사주를 봤다”며 “사업하느라 바빠서 철학관 갈 시간 내기가 힘든데 카카오톡으로 상담하니 편리한 데다 말하는 내용이 전부 글로 남아 좋았다”고 했다.
인스타로 역술인 만나 카톡으로 사주 상담
젊은 사주 애호가들이 널리 이용하는 건 스마트폰 앱이다. 캐릭터와 일대일 채팅하듯 운세를 확인하는 ‘헬로우봇’, 자체 사주 분석 시스템을 운영해 사용자 친화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포스텔러’, 광고 시청으로 유료 결제를 대신할 수 있는 ‘점신’ 등 다양한 앱이 나와 있다.
‘궁합팅’은 궁합 AI(인공지능)가 무작위로 선별한 100만쌍의 데이터를 기준으로 오행 분석, 음양의 합, 조화와 서로의 기질 등을 분석해 점수를 매긴다. 궁합 점수가 90점 이상 나온 상대를 매일 한 명씩 무료로 매칭해준다. 포스텔러의 사주풀이는 입사 지원용 자기소개서에 활용하는 것이 ‘꿀팁’으로 전수되기도 한다. 사주 보는 이의 장단점을 객관적인 언어로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역술가들은 “MBTI와 사주는 원리가 비슷하기 때문에 MBTI에 빠지면 사주에도 빠지기 쉽다”고 했다. 본지에 오늘의 운세를 연재하는 한소평씨는 “MBTI의 토대가 된 심리유형론을 제시한 카를 융은 주역(周易)의 논리에 조예가 깊었다”고 했다. “무극에서 태극이, 태극에서 음양이, 음양에서 사상이, 사상에서 팔괘가 나와요. 이 팔괘를 다시 쪼개면 16개가 되죠. MBTI가 성격 유형을 16가지로 나누는 것과 같아요.”
이름만 사주에서 MBTI로 바뀌었을 뿐, 삶의 불확실성과 미래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무언가에 의지하려는 인간의 마음은 그대로라는 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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