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은의 고전 노트] 부도덕과 결함도 명작의 원천이다
1890년 미국 로드아일랜드 프로비던스에서 태어난 H. P. 러브크래프트는 47년의 생애 동안 63편의 중·단편을 썼는데, 그로부터 현대 SF호러가 시작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상의 것이 아닌, 외계/우주 기원의 초자연적 존재와, 그 악마적 생명체를 숭배하는 끔찍한 비교(秘敎) 세력, ‘그것’들과 접촉한 인물의 음산한 파국을 묘사하는 러브크래프트의 소설은 공포 장르의 여러 공식을 만들어냈다. 불길한 장소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무모한 주인공, 금서(禁書)나 괴이한 물건의 이력을 파헤치고 싶은 억제할 수 없는 호기심, 두려움을 호소하면서도 달아나지 않고 위험을 향해 나아가는 모순된 행동, 정신착란적 악몽 같은 추격전 등. 확실히 스티븐 킹, 닐 게이먼, 이토 준지 같은 호러계 스타들이 추앙할 만하다.
그럼에도 러브크래프트는 애초에 그를 기리기 위해 1975년 제정된 세계환상문학상(World Fantasy Award)에서마저 그 흔적이 지워졌다. 그가 노골적 인종주의자였기 때문이다. 세계환상문학상은 매해 수상자에게 러브크래프트의 캐리커처를 본뜬 트로피를 수여해 왔으나, 2014년 어느 청소년 판타지 소설가의 청원으로 시작된 반(反)러브크래프트 운동의 결과로, 이 권위 있는 판타지 문학상은 ‘유해한 차별주의자’의 그늘에서 벗어났다. 새 트로피는 가치중립적인, 고목(古木) 위의 보름달 디자인으로 교체되었다.
고교 중퇴 후 사회적 교류가 거의 없이 은둔하면서 괴기 소설을 썼고, 숱한 출판사들에 거절당했으며, 소수의 컬트 팬을 거느렸던 작가가 지인들과 주고받은 10만 통의 편지가, 사후에 그의 인종 혐오를 입증하는 유죄 증거로 자주 거론된다. 하지만 ‘미지의 혼종’을 향한 역겨움과 끌림이라는 양면성은 ‘러브크래프트 전집’에 수록된 모든 작품의 공통점이자, “인류의 가장 오래되고 강력한 공포는 미지의 것에 대한 공포”라는 러브크래프트 문학관과도 일치한다. 그의 이종(異種) 공포증은 소설적 상상력의 원천이었다. 뛰어난 문학은 작가의 지혜와 선의뿐만 아니라 내심(內心)의 부도덕과 결함으로부터도 만들어진다. ‘바람직함’은 예술의 선결 조건이 아니고, 더 불온한 것에서 더 큰 통찰을 이끌어내는 것은 죽은 자가 아니라 살아 있는 우리 자신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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