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의 분쟁… 이스라엘 건국사인가, 팔레스타인 저항사인가

채민기 기자 2023. 10. 14.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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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이슈 읽기]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의 역사

약속의 땅 이스라엘

아리 샤비트 지음|최로미 옮김|글항아리|696쪽|3만2000원

팔레스타인 100년 전쟁

라시드 할리디 지음|유강은 옮김|열린책들|448쪽|2만5000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우리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선 이름이다. 검은 연기나 파괴된 도시의 이미지와 함께 숱하게 뉴스에 오르내리지만 분쟁의 배경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지난 7일 팔레스타인 무장 세력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기습하고 이스라엘이 보복에 나서면서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의 역사를 양측의 시각에서 분석한 책 ‘팔레스타인 100년 전쟁’(열린책들)과 ‘약속의 땅 이스라엘’(글항아리)을 소개한다.

중동 전문가인 박현도 서강대 유로메나연구소 교수, 성일광 고려대 중동·이슬람센터 연구위원, 엄익란 단국대 자유교양대 교수, 장지향 아산정책연구원 중동연구센터장에게 자문하고 Books팀이 검토해 두 권을 선정했다. 갈등의 시점을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이주가 시작된 약 100년 전으로 잡고 개인적 시각과 역사적 사실을 교직해 나간 저작들이다.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인을 몰아내”

‘100년 전쟁’의 메시지는 명확하다. 20세기 들어 본격화된 유대인들의 팔레스타인 정착 과정뿐 아니라 시오니즘(국가 건설을 위한 유대 민족주의) 자체가 식민주의였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국가를 세우기 위해 서구 열강을 등에 업고 팔레스타인인들을 몰아냈다.

저자는 팔레스타인 명문가 출신 미국인 역사가. 예루살렘의 문중 도서관에서 종고조부가 1899년 시오니즘 지도자 테오도어 헤르츨에게 보낸 편지를 찾아낸다. 팔레스타인에 이미 “사람이 살고 있다”면서 유대인 이주가 불러올 충돌을 경고한 내용이었다. 답장은 이렇게 왔다. “우리(유대인)가 우리의 안녕과 부를 위해 노력하면 그들(팔레스타인인)의 안녕과 재산도 늘어날 것입니다.” 저자는 이 주장이 시대·장소를 막론한 식민주의자들의 금과옥조라고 비판한다.

오늘날까지 100년에 걸친 역사의 식민주의적 성격을 보여주는 여섯 장면을 집중 분석한다. 예컨대 영국은 1917년 밸푸어선언을 통해 유대 국가 건설을 지지했고, 이방인으로 전락한 팔레스타인인들이 1936년 벌인 봉기와 파업을 무력으로 진압했다.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중동 전쟁의 전개, 인티파다(팔레스타인 독립운동)로 이어지는 분석을 따라가다 보면 팔레스타인 저항사의 큰 줄기가 그려진다.

◇”이주는 침입 아닌 귀향”

‘약속의 땅’도 이스라엘 언론인인 저자의 증조부가 1897년 팔레스타인을 여행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영국의 부유한 시오니스트였던 증조부는 이후 그곳에 정착했다. 유럽에선 반유대주의가 부상하고 있었다. 유대인은 위협받는 타자였다. “시오니즘의 본질은 유대 민족의 구원이었다. 유럽의 악과 맞서는 데 유럽의 부와 과학, 제국주의를 이용하자는 사상이었다.” 알리야(aliyah·흩어진 유대인이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감)라는 표현에서 팔레스타인 이주를 침입이 아니라 역사적 차원의 귀향으로 보는 시각이 드러난다.

1930년대 중반까지 시오니즘은 순수한 민족운동에 가까웠다. “유대인 공동체에는 아랍 인구를 이전할 영향력이 없었다.” 그러나 1936년 팔레스타인 봉기 때 파견된 영국 조사단이 아랍인의 이주를 해법으로 제시하면서 배타성이 강해졌다. 유대인과 아랍인 사이의 폭력도 조직화하고 격렬해졌다.

아랍과 대치하던 이스라엘이 새로운 내적 위험에 직면했다는 지적에 주목할 만하다. 제4차 중동전쟁(1973) 이후 안정 상태가 계속되면서 이스라엘은 분열했고 “자신들만의 공상과 우매”에 빠졌다. 제2차 레바논 전쟁(2006)에서 레바논 무장 세력 헤즈볼라의 게릴라전에 고전했다. “국가 역사상 처음으로 적을 물리칠 수 없었다.”

“상대가 민병대에 그치지 않는다면?” 이 지적은 정보 실패로 하마스의 기습을 허용한 오늘의 이스라엘을 떠올리게 한다. 휴전 장기화에 안보 의식이 희미해져 가는 대한민국에도 해당하는 질문이다.

◇'100대 0′ 해법은 불가능

이번 사태를 일으킨 하마스의 근거지 가자지구는 이스라엘이 제3차 중동전쟁(1967)에서 승리하고 이집트에서 얻어낸 곳이다. 이스라엘은 아랍의 땅을 점령했다. 한편 하마스가 이스라엘 민간인을 납치·살해하고 영상을 유포한 사실은 이스라엘이 “서구에서 실존을 위협받는 유일한 국가”임을 보여준다. ‘약속의 땅’은 점령과 실존이라는 이중적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한쪽만 봐서는 분쟁의 전모를 온전히 파악할 수 없다.

이는 한쪽이 상대방을 완전히 배제하는 방식의 해결책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점을 시사한다. ‘100년 전쟁’은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이스라엘의 차별을 바로잡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분쟁의 해법으로 제시된 어떤 정식화도 평등의 원리에 바탕을 두지 않는다면 필연적으로 실패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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