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中서 당면 들어오기 전 조선시대의 잡채는 ‘야채 요리’
중국요리의 세계사
이와마 가즈히로 지음|최연희·정이찬 옮김|따비|816쪽|4만8000원
누구에게나 한 번쯤은 중국요리가 구세주였다. 햄버거도 스테이크도 물리는 유럽 출장지에서의 쓸쓸한 저녁, 붉은 등을 밝힌 중국 요릿집은 꼭 있다. 주머니 사정도 시간도 모두 여의치 않은 미국 유학생에게 종이 박스 속 이름 모를 그 누들은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던가. 멀리 갈 필요도 없다. 당장 옆 사람에게 오늘 저녁 뭐 먹을지 물어보라. 셋 중 한 명에게선 반드시 “짬뽕” “짜장”이 나올 것이다.
우리만 그런 건 아닌 모양이다. 일본 게이오기주쿠대 문학부 교수이자 중국 도시사 전문 역사 연구자인 저자는 중국요리가 어쩌다 전 세계로 퍼진 것인지, 이렇게 퍼진 중국요리가 어떻게 다른 여러 나라의 ‘국민 음식’이 되었는지에 대해 주목한다. 2010년 연구차 상하이에 머물면서 근현대 상하이의 요식업사 등에 대해 깊게 빠진 저자가 그 시선을 지구 범위로 넓혀 세계사적 관점에서 중국요리를 논한다. 총 816쪽에 이르는 이른바 ‘벽돌책’이지만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다. 저자 역시 1쪽부터 읽어나가는 성실함 대신 “개요를 참조해 각자 흥미를 느끼는 지역이나 테마를 다루는 부와 장에서부터 페이지를 넘겨 달라”고 이야기한다.
한국 독자들이 가장 큰 흥미를 느낄 만한 지점은 단연 아시아 여러 나라의 내셔널리즘과 중국요리를 논한 2부, 그중에서도 ‘한국-호떡, 잡채, 짬뽕, 짜장면’을 다룬 6장이다. 생일상이나 잔치에 빠지지 않는 ‘잡채’가 중국 요리의 영향 아래 새롭게 재탄생한 한국 요리임을 아시는지. 조선시대 요리서엔 당면이 들어간 잡채가 등장하지 않는다. 1670년 편찬돼 조선 최고(最古) 요리서라 일컬어지는 ‘음식디미방’은 잡채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오이, 무, 숙주는 생으로, 도라지, 게목, 박고지는 삶아서 가늘게 찢은 뒤 양념을 한다.’ 17세기 잡채는 당면이나 고기가 들어가지 않는 채소 일색의 음식이었던 것이다. 당면은 19세기가 돼서야 이 책의 표현대로라면 ‘화인(華人)’을 통해 국내에 들어오게 되고, 잡채 역시 지금 우리가 아는 모습으로 바뀌게 된다. 1921년 이화여대 교수 등을 역임했던 요리 연구자이자 영양학자 방신영이 쓴 ‘조선요리제법’엔 드디어 기름에 볶은 돼지고기나 당면이 들어간 잡채 조리법이 나온다. 1920년대엔 전국 각지에 당면 공장이 생겼으며, 1930년대 사리원 당면은 지역 명산품으로서 전국에 이름을 날리게 된다.
그렇다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중국요리는 어떻게 세계 곳곳에 퍼지게 된 것인가. 저자는 이를 ‘정부나 대기업의 주도면밀한 정책이 아닌, 전 세계 곳곳에 퍼진 중국 이민자들이 고향의 요리를 퍼뜨린 결과’란 일본 식문화 연구의 선구자 이시게 나오미치의 주장을 일정 부분 수용하면서도, 반기를 든다. 전 세계 곳곳으로 퍼진 중국의 값싼 노동력 자체가 각 국가 입장에선 제국주의적일 수 있다는 것. 또 중국의 대외 출병이나 세력 확장이 국외에 중국요리를 전하는 계기가 된 경우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실제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났을 때 조선에서 위안스카이와 청나라 영향력이 강화됐고, 이는 조선에서의 중국요리 보급으로 이어졌다. 그해 청나라와 조선이 맺은 ‘상민수륙무역장정’에 기초해 1884년 인천, 1886년 부산, 1888년 원산에 청국전관조계가 개설됐는데, 이렇게 생겨난 조계는 근대 한반도에서 중국요리의 발상·발신지가 됐다. 현재도 인천의 차이나타운이나, 부산의 오랜 만두집 신발원 등에서 이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주석과 참고 문헌만 77쪽에 달할 정도로 저자의 꼼꼼함과 성실함이 돋보이는 책이다. 물론 역사라는 건 보는 관점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기에, 저자 자신도 “이 책이 결코 세계 표준의 객관적 식문화사일 수는 없다”며 “비유하자면 일본인이 운영하는 중국요리 중심의 뷔페 식당이나 푸드코트”라고 이야기한다. 실제 드라마 ‘대장금’을 ‘궁중 요리의 국가적 브랜드화를 노린 문화 정책 프로젝트의 일환’이라고 소개한 대목에선 ‘너무 진지한 것 아닌가’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때론 옆집 사람이 우리 집 사정을 더 객관적으로 보기에, 외부인의 시선을 통해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는 기쁨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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