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범도는 디아스포라의 상징, 민족주의 프레임 벗어나야: 임지현 교수 인터뷰

2023. 10. 14.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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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학자 임지현 교수가 본 역사와 정치
서강대 연구실의 임지현 교수. 그가 좋아하는 러시아 문인 마야콥스키의 연극 포스터가 뒤에 보인다.
“홍범도는 (자발적인) 소련 사람으로서 죽었습니다. 소련에 살았던 한국인 디아스포라(고국을 떠나 이국에 터전을 잡은 사람들의 공동체)의 상징적인 인물로서 홍범도의 의미를 찾아야 해요. 사실 문재인 정부 때 홍범도 유해를 난데없이 갖고 온 것부터 이상한 거죠. 한국의 내셔널리즘이 디아스포라의 다양한 의미를, 즉 러시아 문화에 동화되어 사는 한국인의 (복합적이고 독특한) 역사를 회수해 버린 겁니다.”

서강대학교 김대건관에서 만난 임지현 교수의 견해다. ‘육군사관학교 홍범도 흉상 이전’ 논란 등 최근 격렬해진 정치권의 역사 논쟁에 관해서, 한국에서 드문 ‘탈민족주의’ 사학자이자 ‘대중 독재’ ‘희생자의식 민족주의’ 등의 개념으로 인정받는 임 교수의 의견이 궁금해 그를 찾았다.

홍범도(1868~1943)는 1920년대 초까지 일제에 맞서 무장 독립운동을 한 독립운동가였다. 또한 1922년 레닌에게 직접 권총을 선물 받고 27년 소련 공산당에 입당했다. 그후 연해주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다 1937년 스탈린의 고려인 강제이주 정책에 의하여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 당했다. 70대 노령이었던 1941년, 나치 독일의 침략으로 독소전쟁이 시작되자 소련 정규군에 입대해 ‘조국을 위해’ 싸우고 싶다는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임 교수가 “홍범도는 소련 사람으로서 죽었다”라고 한 것은 이러한 그의 개인사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럼에도 홍범도 흉상을 육군사관학교에서 독립기념관으로 옮기는 것에 대해, 그를 ‘한국인 항일 독립운동가’로 보려는 사람들은 거세게 반발한다. 그 반대 진영에서는 ‘빨갱이에게는 독립운동가로 대접할 필요도 없다’는 극단적인 의견도 나온다.

진보 세력에 깃든 전체주의성 경고도

임 교수의 주요 저서. [사진 휴머니스트]
임 교수는 말을 이었다. “소련인으로서 죽은 사람인데 육군사관학교에 흉상이 있는 게 안 어울리기는 하죠. 그런데 그걸 육사에서 전문가 위원회 같은 걸 만들어서 해결할 일이지, 정부 부처나 대통령실에서 언급할 일은 아닌 거죠. 물론 2018년에 흉상을 밀어 넣었을 때부터가 문제이긴 해요. 그리고 2021년에 뜬금없이 홍범도 유해를 이전해 왔죠. 무슨 스펙터클 연출하듯이.” 그는 정부가 나서서 역사 담론을 주도하려는 것은 문재인 정부의 심각한 문제였다면서, 문 정부 시절 쓴 ‘청와대 주인들은 역사에서 손 떼라’를 언급했다. 현 정부에 대해서도 “자연인으로서 대통령이든 장관이든 나름의 역사관을 가질 수 있지만 그러한 위치에서 ‘역사 해석을 이렇게 저렇게 하는 게 옳다’라고 발언하는 것은 굉장히 위험합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의 해석은 그게 정답이라는 압박을 주는 겁니다. 전문가들과 시민사회의 토론에 맡길 일입니다”라고 강조했다.

임 교수는 한국 역사학계에서 늘 논쟁적인 존재였다. 한국에서 거의 종교와 마찬가지로 일상의 생각을 지배하는 민족주의를 겨냥해 『민족주의는 반역이다』(1998)라는 책을 써서 큰 물의를 일으킨 게 시작이었다. 마르크시즘 및 그와 관련한 20세기 서양사에 정통한 학자로서 한국 군사독재의 잔재를 비판하는 한편, 일찍이 한국 ‘진보’세력에 깃든 전체주의성을 경고하는 『우리 안의 파시즘』(1999)을 기획해, 좌우 양쪽에서 비난의 대상이 되곤 했다.

반면, 어설픈 중도가 아닌 반(反)파시즘과 탈민족주의 등으로 요약할 수 있는 뚜렷한 철학으로,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몇 안되는 한국 사학자 중 하나다. 2010년대에는 세계적인 학술 출판사 팰그레이브 맥밀런에서 임 교수가 기획한 ‘대중독재(위로부터의 단순 강제가 아닌, 대중의 동의와 지지를 바탕으로 강제와 결합한 20세기 독재 양상)’ 시리즈를 내기도 했다. 다음은 임 교수와의 일문일답.

Q : 근대사를 공부할수록 독립운동의 양상이 다양했다는 걸 알게 되는데요. 한국의 독립운동사에서 마르크시스트가 차지하는 비중은 어떻게 됩니까?
A : “사실 우리 할아버지 임원근이 박헌영·김단야와 함께 (일제강점기 청년공산주의 운동의) 트로이카였어요. 중앙정보부장 지낸 김재춘이 할아버지의 외사촌 동생이고 가깝게 지냈어요. 이분이 이런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어요. 박정희가 대구에서 일할 때(1950년경 육군 정보국 과장 시절) 자신이 우리 할아버지 임원근과의 술자리를 주선했다는 거야. 그런데 자신은 술을 못 하고, (임원근·박정희) 둘이 밤새 술을 마시면서 얘기했는데 그렇게 죽이 잘 맞더라는 거야. 그래서 김재춘 선생이 놀라서 ‘저 사람들이 예전에 다 빨갱이들이어서 저렇게 죽이 잘 맞나’ 생각했다는 거예요. (웃음) 그런데 내 해석은 달라요. 실은 둘 다 근대화론자들이에요. 한국이 빨리 가난한 후진국에서 벗어나서 부강한 근대국가가 되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강했는데, 우리 할아버지 임원근은 그 방법으로 사회주의를 택했다가 나중에 조봉암과 같이 사민주의 쪽으로 나간 겁니다. 반면에 박정희의 경우는, 나세르주의(이집트 지도자 나세르의 정치 철학으로서 범(凡)아랍 민족주의, 반(反)서양제국주의, 국가 주도 경제개발 등의 기조를 띈다)의 영향을 받았고, 예전에 (남로당에 이름을 올렸던 시절에) 사회주의 영향도 받았고, 그러니까 시장 경제를 축으로는 하되 어떤 면으로는 소련의 계획 경제와 흡사한 정책을 쓴 겁니다. 냉전 체제를 가장 잘 활용한 사람인 것 같아요. 그때 박헌영이든, 주세죽이든, 여운형이든, 송진우든, 김구든, 이승만이든… 이들의 목표는 같았습니다. 조국을 근대화시켜서 강하고 잘 사는 독립된 ‘네이션-스테이트(nation-state)’를 만들어야겠다는 목표가 같았어요. 그래서 6·25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그들이 함께 술 마시고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단 말이에요.”

Q : 결국 이런 대화 없는 진영 단절에는 6·25 전쟁을 일으킨 북한 김일성 정권의 책임이 크겠군요?
A : “그렇죠. 한국전쟁이 일어났다는 것 자체가 치명적인 거죠. 그렇게 사람을 수백만 명 죽게 하고 나면 돌이키기 어려운 거지. 그걸 북침이라고 주장하고, 책임 회피를 시키면 안 되는 거지.”

Q : 말씀대로 독립운동이 ‘조선 민족이 일제로부터 빼앗긴 정체성을 되찾는 운동’이라기보다 ‘새로운 독립된 근대 국가를 세우는 운동’의 성격이 큰 경우도 많았던 것 같은데, 지금은 오로지 전자로만 생각하잖아요? 이런 민족주의 프레임은 언제부터 강해졌나요?
A : “박정희 전 대통령 때부터라고 봐요. 미군정 시절에는 당시 미국 교과 과정을 그대로 한국에 이식했는데, 당시 존 듀이의 진보주의 철학을 바탕으로 한 미국 역사 교육의 목적은 (국가와 민족에 충성하는 국민이 아니라) ‘비판의식을 지닌 시민’을 양성하는 것이었어요. 그때는 ‘먼 나라의 역사’라고 해서 서양사부터 배우고 그 다음에 이웃나라의 역사, 그 다음에 우리나라의 역사, 이렇게 점점 가까운 데로 와서 한국을 이해하는 방식이었죠. 이승만 전 대통령 때도 기본적으로 바뀌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런데 박정희가 정권을 잡으면서 민족 주체성을 강조하게 되죠. 북한과의 경쟁 관계도 있었을 것이고, 또는 JP(김종필) 같은 측근이 이집트의 나세르를 모델로 삼았고. 한국에서 역사 교육의 목표로 민족 주체성이 나오는 게 5·16 이후부터고 이게 계속 강화되어온 겁니다. 3선 개헌 직전에 68년도에 ‘애국 애족’을 강조하는 국민교육현장을 만들죠. 그때 처음으로 국정교과서가 만들어지고. 그전에는 국사도 국정교과서가 아니고 여러 교과서가 있었거든요.”
박헌영·여운형·김구 목표는 조국 근대화

Q : 한국의 좌파와 우파가 다 싫어할 얘기네요. 서구 좌파와 달리 매우 민족주의적인 한국 좌파는 박 전 대통령를 친일파로 몰아가고 싶어하는데 오히려 민족주의 프레임 강화한 사람이라 하니 싫어할 것이고, 반대로 우파는 박 전 대통령의 민족주의 프레임 강화가 뭐가 잘못됐느냐고 싫어하겠네요.
A : “그렇죠. (역사를 민족주의 프레임으로만 보는 것은) 좌우 합작으로 강화되어 왔습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 때 국정교과서 파동이 있었지만, (당시 임 교수는 반대 서명에 참여했다.) 솔직히 그전부터 한국의 좌파들과 얘기해 보면 이 사람들은 국정교과서 체제가 잘못됐다는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 ‘그 국정교과서를 내가 썼어야 했는데’ 이런 생각이거든요. 역사 교육이라는 건 그렇게 하나의 정답을 강요하는 게 아니라 똑같은 사료를 읽어도 어떻게 다른 해석이 가능한가를 학생들에게 보여주고 각자의 생각을 기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전에 국사 교과가 수능 시험에서 빠진다고 해서 사학자들이 반대 서명 운동을 하는데 나는 서명을 안 했거든요. 동료 사학자들이 닦달하기에 말했죠. ‘차라리 대학 와서 제대로 가르치는 게 낫지, 지금처럼 역사를 암기과목으로 만들어놓고 하나의 정답을 찍는 거면 안 하는 게 나아.’ 우리 아이가 영국에서 학교 다닐 때 역사 수업이 너무 어렵다고 하기에 왜 그런가 봤더니, 이를테면, ‘장검의 밤’ 사건(1934년 히틀러가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서 돌격대 참모장 등 반(反) 히틀러 세력을 숙청한 사건)에 대한 서로 다른 기사들을 학생들한테 나눠주고 ‘네가 기자라고 생각하고 이 사건을 신문 기사로 만들어라’ 이런 게 중학교 숙제라는 거예요. 역사 교육을 하려면 이렇게 해야 해요. 학생들로 하여금 스스로 사고하게끔 하고, 이렇게 똑같은 자료를 갖고도 이렇게 많은 다른 생각들이 나올 수 있다는 걸 이해시켜야 합니다. 이런 식으로 교육을 시켰으면 지금 한국에서처럼 ‘나는 진짜 역사고 너는 가짜 역사다’ 이런 논쟁에서 좀 벗어날 수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문소영 기자 symo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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