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와 사색] 불멸
2023. 10. 14. 00:01
불멸
장석남
나는 긴 비문(碑文)을 쓰려 해, 읽으면
갈잎 소리 나는 말로 쓰려 해
사나운 눈보라가 읽느라 지쳐 비스듬하도록,
굶어 쓰러져 잠들도록,
긴 행장(行狀)을 남기려 해
사철 바람이 오가며 외울 거야
마침내는 전문을 모두 제 살에 옮겨 새기고 춤출 거야
꽃으로 낯을 씻고 나와 나는 매해 봄내 비문을 읽을 거야
미나리를 먹고 나와 읽을 거야
나는 가장 단단한 돌을 골라 나를 새기려 해
꽃 흔한 철을 골라 꽃을 문질러 새기려 해
이웃의 남는 웃음이나 빌려다가 펼쳐 새기려 해
나는 나를 그렇게 기릴 거야
그렇게라도 기릴 거야
『꽃 밟을 일을 근심하다』 (창비 2017)
‘새기다’라는 말은 고단함과 어려움을 전제로 합니다. 어떤 글씨나 형상을 파고 조각하는 일. 당연히 우리는 세상 무르고 연한 것들에게 이 말을 쓰지 않습니다. 종이에 글자를 적거나 고운 모래사장에 그림을 그리는 일 정도가 아니니까요. 적어도 나무, 혹은 돌이나 바위 정도의 단단함이어야 합니다. 아울러 ‘새기다’라는 말은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 역시 어려운 일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나무나 돌이나 바위와는 달리 자주 무르고 흐려지니까요. 그러니 잃어버리거나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서는 늘 단단히 새겨야 합니다.
박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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