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문화] 청동의 시간과 감자의 시간
인류 폭력성 적나라하게 고발
인간끼리 죽고 죽이는 절망 속
한줄기 희망 끝까지 놓지 않아
지난 3일은 허수경 시인의 다섯 번째 기일이었다. 촛불을 켜고 그녀의 시집들을 다시 꺼내서 읽는 것으로 고인에 대한 추모를 대신했다. 특히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전쟁을 벌이는 와중에 허수경의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을 읽으니, 전쟁에 대한 시인의 탄식과 성찰이 더 절실하게 와 닿는다. ‘시인의 말’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나는 이 시집에 묶인 시들을 반(反)전쟁시라고 부르고 싶다. 내가 특별히 평화주의자라서 그런 건 아니다. 다만 이 시집에 묶인 많은 시가 가깝거나 먼 전쟁의 시기에 쓰였기 때문이다. 전쟁을 직접 겪지 않은 한 인간이 쓰는 반(反)전쟁에 대한 노래, 이 아이러니를 그냥 난, 우리 시대의 한 표정으로 고정시키고 싶었을 뿐”이라고.
가자지구는 폭격으로 도시 전체가 초토화된 데다 전기와 수도가 끊어지고, 연료와 식량, 구호물품까지 차단된 상태다. 여기에는 237만명의 팔레스타인 주민이 살고 있는데, 폭격뿐 아니라 기아와 질병으로 희생될 민간인의 수도 급속히 늘어날 것이다. 가자지구를 둘러싼 거대한 장벽 근처에는 수십만의 이스라엘 병력이 또 다른 장벽을 만들며 지상군 투입을 준비하고 있다. 미국을 비롯한 다른 나라들의 국제 대리전으로 확산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현대성의 본질을 예리하게 분석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냉전체제가 끝난 뒤에도 폭력의 재배치와 재배분이 여전히 진행 중이라고 말했다. 폭력은 끝난 것이 아니라 단지 시야에서 잠시 사라졌을 뿐이고, 문명화 과정을 통해 현대사회의 관료제와 합체되었다는 것이다. 이 새로운 냉전의 흐름 속에서 우크라이나와 팔레스타인뿐 아니라 세계 어느 곳이든 전쟁의 도화선이 될 수 있다.
거대정치의 이름으로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하는 폭력 앞에서 시와 언어는 무력하기만 하다. 그러나 허수경 시인은 인간이 같은 종의 인간을 얼마든지 죽일 수 있다는 사실에 절망하면서도 한 줄기 희망을 끝까지 버리지 않았다. ‘물 좀 가져다주어요’라는 시의 화자는 아이들에게 달려가는 어머니의 얼굴을 안타깝게 바라본다. 이처럼 시인의 시선은 주로 전쟁으로 희생되는 약자들을 향해 있다. ‘청동의 총’이 찍혀 있는 어머니의 얼굴을 바라보며 “어머니에게 제발 아이들의 안부 좀 전해주어요”라고 간청하는 목소리가 귀에 쟁쟁하게 들리는 듯하다. “아이들이 자라는 그 청동의 시간도, 그 뜨거운 군인이 될 시간도” 무사히 지나가기를, 청동의 시간 속에서도 “땅속에서 감자는 / 아직 감자의 시간을” 살기를 기원하는 마음은 오늘 우리의 기도이기도 하다.
나희덕 시인·서울과학기술대 교수
Copyright © 세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한국처럼 결혼·출산 NO”…트럼프 당선 이후 미국서 주목받는 ‘4B 운동’
- “그만하십시오, 딸과 3살 차이밖에 안납니다”…공군서 또 성폭력 의혹
- “효림아, 집 줄테니까 힘들면 이혼해”…김수미 며느리 사랑 ‘먹먹’
- “내 성별은 이제 여자” 女 탈의실도 맘대로 이용… 괜찮을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단독] “초등생들도 이용하는 女탈의실, 성인男들 버젓이”… 난리난 용산초 수영장
- ‘女스태프 성폭행’ 강지환, 항소심 판결 뒤집혔다…“前소속사에 35억 지급하라”
- “송지은이 간병인이냐”…박위 동생 “형수가 ○○해줬다” 축사에 갑론을박
- “홍기야, 제발 가만 있어”…성매매 의혹 최민환 옹호에 팬들 ‘원성’
- 사랑 나눈 후 바로 이불 빨래…여친 결벽증 때문에 고민이라는 남성의 사연
- "오피스 남편이 어때서"…男동료와 술·영화 즐긴 아내 '당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