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장진호의 카투사

이하원 논설위원 2023. 10. 13. 2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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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이철원

23세 청년 박진호가 1950년 8월 징집돼 훈련받으러 간 곳은 대한민국 영토 밖에 있었다. 그를 포함한 300여 명이 카투사(KATUSA·미군에 배속된 한국군) 1기생이다. 이들은 대한해협을 건너 일본에 주둔하던 미 제7사단에 배속돼 3주간 훈련받았다. 박진호는 이 훈련을 마치고 곧바로 미군 장병과 함께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했다. 이후 여러 전장(戰場)을 거친 뒤, 같은 해 11월 장진호(長津(湖) 전투에 투입됐다가 거기서 전사했다.

▶장진호 전투는 참혹했다. 중공군 12만명이 인해전술로 밀고 들어와 3만명의 유엔군을 포위하는 작전을 벌였다. 영하 40도까지 떨어지는 추위는 또 다른 적이었다. 아군 사망자 중 동사자가 더 많다는 통계가 있을 정도다. 퓰리처상을 받은 저널리스트 데이비드 핼버스탬은 장진호 전투 등을 소재로 6·25 책을 내면서 제목을 ‘가장 추운 겨울(The Coldest Winter)’로 정했다.

▶장진호 전투 초기엔 미군이 중공군의 작전에 말려 고전했지만, 전세를 만회해 포위망을 뚫는 데 성공했다. 모두가 절망했지만 장병들의 불굴의 투혼이 세계 전사에 남을 기적적 반전을 만들어 냈다. 이 전투에서 중공군은 3만명 이상 사망했고 미군도 3000여 명이 전사했다. 이 장진호 전투에서 카투사도 큰 활약을 했다. 이철훈 카투사연합회 부회장은 “6·25 당시 카투사가 1만명 이상 전사했는데 상당수가 장진호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한다”고 했다.

▶카투사는 6·25 당시 처음으로 한국 땅을 밟는 미군들에게는 귀중한 존재였다. 전투에 유리한 지형지물을 찾아내고, 피란민에 섞여 있는 북한군을 가려냈다. 박격포, 기관총 수송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전투에서 몸을 사리지 않았다. 카투사는 흥남 철수 작전의 숨은 주역이기도 하다. 카투사로 장진호 전투에 이어 흥남 철수에 참가했던 류영봉씨는 “카투사들이 10군단장 앨먼드 소장에게 피란민 후송을 요청해서 배 안의 대포, 탱크 등을 모두 내려놓고 10만 명의 피란민을 배에 태울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전우애 덕분에 지난해 조성된 워싱턴 DC의 한국전쟁 추모의 벽에는 전사한 카투사 7174명의 이름이 미군 3만6634명과 함께 새겨져 있다.

▶12일 서울 전쟁기념관에서 장진호 전투 73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장진호에서 전사한 카투사 김동성 일병의 증손자인 김하랑 공군병장이 국기에 대한 맹세문을 낭독했다. 고(故) 김석주 일병의 외증손녀인 김혜수 육군 중위는 할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었다. 현직 대통령도 처음 참석한 이 행사를 계기로 카투사의 활약이 좀 더 알려졌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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