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커튼콜] 페미니즘 공연에는 착한 여자도, 나쁜 여자도 있다
비싼 돈을 내고 공연장에 갔는데 앞 사람 키가 너무 커 두 시간 넘게 고개만 기웃거리다 온 적 있나요? 배우의 노래와 연기뿐 아니라 숨소리까지 여운이 남아 같은 돈을 내고 본 공연을 또 본 적은요? 그리고 이런 마음을 털어놓을 사람이 없어 혼자만 간직하느라 답답한 적은 없나요? 세상의 모든 공연 덕후의 마음을 대신 전하기 위해 기자가 나섰습니다. 무대 위 출연진에게 박수가 쏟아지는 그 어떤 곳이라도, ‘어쩌다 커튼콜’과 함께하세요.
※이번 칼럼부터 ‘어쩌다 커튼콜’은 뮤지컬을 포함한 다양한 공연을 다룹니다. 뮤지컬 이외에도 연극·오페라 등 다양한 장르에 대해 숨겨진 뒷이야기를 살펴볼 예정입니다.
연극 ‘버자이너 모놀로그’를 아시나요. 1996년 극작가 이브 엔슬러가 200여 명의 여성을 인터뷰해 극본을 구성한 이 작품은 여성을 ‘성적으로’ 해방하자는 다소 거칠고 파격적인 주제로 화제를 모았는데요. 우리나라에서는 2001년 처음 막을 올렸습니다. 과거에는 성적 억압과 폭력 등을 주로 이야기했지만 이제는 아동학대·성폭력·성형·다이어트까지 전 세대가 공감할 수 있는 다양한 소재를 주제로 ‘나를 찾아가는 여행 같은 연극’이라는 부제가 더 어울리는 작품으로 주목받고 있죠.
모두가 함께 즐겨야 할 공연장에서 ‘여성’이라니. ‘또 갈라치기가 시작된 것이냐’며 목소리를 높이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주제가 여성이고 여성이 연기하는 작품인데도 남성 관객을 끌어모으는 작품이 있습니다. 전 세대, 모든 성별이 한 번쯤 들어봐야 할 목소리를 대본으로 만들기 때문이죠. 잘 만든 대본은 성별은 물론 세대의 통합도 이룹니다. 이번 주 ‘어쩌다 커튼콜’은 연극·뮤지컬 판에 끊임없이 생산되고 사랑받으며 남성 관객의 호평까지 받고 있는 훌륭한 페미니즘 작품을 소개해보려고 합니다.
국립극장 세실에서 최근 막을 내린 연극 ‘지상의 여자들’은 지방의 작은 도시 ‘구주’에서 느닷없이 남자들이 사라졌다는 흥미로운 설정으로 시작되는 공상과학(SF) 작품입니다. 박문영 작가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연극은 특별한 분장도, 의상도 없습니다. 8명의 배우들은 나란히 등장해 무지갯빛 옷을 입은 채 돌아가면서 역할을 맡습니다. 때로는 개가 되기도, 책벌레가 되기도, 물고기가 되기도 합니다. 동물들과 사람들은 격앙된 목소리로 자신들의 행동과 생각을 서술하면서 이야기를 펼쳐나가죠.
폭력을 행사하던 필리핀 여성의 남편을 시작으로 구주의 여러 가정에서 남자들이 사라집니다. 아내를 때리던 남편, 여자아이를 추행하던 아저씨, 가정폭력을 일삼던 아버지까지 모두 자취를 감춘 거죠. 폭력성을 보이는 남자들이 사라진 곳에서 여성들은 동물들과 축제를 벌입니다. 그런데 과연 이 사회를 평화롭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갑자기 한 존재가 싹둑 잘려나간 기형적 사회에서 소통과 화합은 요원한 일입니다. 주인공 ‘성연’은 환호하는 여성들에게 위화감을 느끼고 문제를 제기하지만 이들에게 오히려 공격받으면서 또 다른 양상의 폭력을 목도합니다.
극을 연출한 전인철 연출은 인터뷰에서 “남녀 사이의 문제로 한정시키지 않고 사회 속 폭력의 문제와 약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생각하고 만들었다”고 설명한 바 있습니다. 남녀 사이의 갈등을 떠나 가부장제의 논리에는 약자에 대한 폭력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이때의 폭력은 여성에게도, 동물에게도, 가난한 사람에게도 해당되지요. 성연이 여성들에게 두려움을 느낀 것은 여기에서 기인합니다.
남자들이 사라진 사회를 긍정할 것인지, 부정할 것인지 극은 결론을 내지 못하고 끝납니다. 위트를 곁들여 솔직하게 현 시대의 페미니즘을 조명한 작품은 12일 막을 내리기 전까지 여성 관객뿐 아니라 남성 관객도 끌어모으며 의미를 더했습니다.
페미니즘과 완전히 상반된 구시대적 배경으로 여성 관객들의 ‘불호(좋아하지 않음) 후기’가 이어진 작품도 있습니다. 바로 뮤지컬 ‘베르나르다 알바’인데요. 여기서 불호 후기라는 것은 ‘작품을 보지 말라’는 후기가 아닙니다. 작품 속 배경이 못마땅하다는 것이죠.
이 작품의 주요 내용은 가부장제 전통을 지키려는 여성인 어머니와 딸들의 갈등입니다. 네, 바로 페미니즘이 가장 싫어하는 ‘여적여(여성의 적은 여성)’입니다. 배우들은 집시처럼 다 함께 스페인 전통 무용 플라멩코를 추며 갈등을 표현하는데요. 그들의 갈등 원인은 다름 아닌 어머니 알바. 알바는 딸들에게 한시도 자유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남편이 죽은 후 집의 문을 닫아버리고 가부장제 전통을 지키기 위해 폭력도 서슴지 않죠. 이 작품의 무대의상을 구성하는 색은 다양하지 않습니다. 모든 배우들은 검은색 상복을 입고 있는데요. 독립적인 ‘사람으로서의 삶’을 인정받지 못하고 오로지 누군가의 딸, 누군가의 아내로만 살아야 하는 딸들의 죽은 듯한 삶을 상징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딸들은 한 남자를 두고 싸우기까지 합니다.
이렇게 구시대적인 내용을 담았는데도 작품은 초연 당시 2분 만에 티켓을 매진시키며 화제를 모았죠. 올해 공연이 벌써 세 번째 시즌으로 매 공연에서 관객들의 기립 박수를 이끌어내고 있습니다. 가부장제 안에서 치열하게 싸우는 여성들을 보여주면서 ‘가부장적 폭력의 대물림’이라는 아주 어려운 주제를 분명히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제도 때문에 벌어진 다툼이라는 거죠. 사방이 막힌 집 같은 사회에서 여성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폭력적 갈등을 답습하고 자신의 자리를 지켜낼 수밖에요. 무척 부조리하지 않나요. 작품은 그 안에서 다음 세대가 받는 고통을 극단적으로 드러냅니다. 많은 관객이 막이 내린 후에도 쉽게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한동안 멍하니 무대 위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을 바라보는 이유입니다.
이렇게 어렵고 무거운 작품이 힘들다면 서울시뮤지컬단의 ‘다시, 봄’도 볼 만합니다. ‘다시, 봄’은 지금은 막을 내렸지만 내년 봄 가장 기다려지는 작품 중 하나입니다. 이 작품은 한국인의 눈물 버튼인 ‘엄마’가 한 명도 아니고 일곱 명이나 등장하는, 그야말로 작정하고 울라고 만든 뮤지컬입니다. 작가는 평범한 50대 여성들과 무대에 선 여성 배우들의 인터뷰를 기반으로 대본을 만들었는데요. 대본의 진정성 덕분에 지난해 초연과 올해 재연에서 엄마의 손을 잡고 온 아들딸의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어요. 엄마들을 위한 뮤지컬이 아니라 ‘가족 뮤지컬’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젊은 세대의 큰 박수를 받았습니다.
무대 위 중년 여성들은 부조리했던 남성 위주의 한국 사회에서 버티고 버틴 이들입니다. 여자 뉴스 앵커였지만 갱년기 이후 안면 홍조를 겪으며 커리어를 중단한 여성, 남편과 사별하고 가장이 된 여성 등 나의 가정에서, 그리고 친구의 가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여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하죠.
이렇게 생생한 캐릭터를 만들어낸 것은 대본의 힘입니다. 이 작품은 ‘디바이징 시어터(Devising Theatre)’라는 독특한 방식으로 대본을 제작해 화제가 됐습니다. 작가가 무대에 서는 7명의 배우를 심층 인터뷰하는 건데요. 배우가 바뀌면 또 대본이 바뀔 수 있습니다. 대본을 만들어두기만 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진화하도록 하는 거죠. 가상공간도, 중세 시대도 아닌 지금 현재 존재하는 현실성 있는 캐릭터의 열연 덕분에 관객석 곳곳에서는 ‘통곡’에 가까운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는 기이한 공연이기도 합니다.
서지혜 기자 wise@sedaily.com박민주 기자 mj@sedaily.comCopyright © 서울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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