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앙코르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얼마 전 오랜만에 서울 예술의전당을 찾았다. 피아니스트 안드라스 쉬프의 공연을 보기 위해서였다. 바흐 음악의 권위자, 피아니스트들의 교과서, 뵈젠도르퍼라는 브랜드의 피아노를 고수하는 연주자 등 그에 관한 여러 수식어가 있지만 최근 여기에 추가된 것은 ‘즉흥적으로 연주할 곡을 결정하는 피아니스트’라는 말이다. 국제적인 음악가가 내한하면 기획사들은 보통 이들의 지난 역사와 오늘 공연을 소개하는 글을 차곡차곡 모아 책자를 만들곤 한다. 공연을 더 자세히, 더 제대로 경험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찾는 이 책자에는 보통 연주만 보아서는 알 수 없는 작품 이면에 대한 이야기들이 적힌다.
쉬프의 공연에서도 이런 작은 책자가 만들어졌지만 이날의 책자는 평소보다 얇았다. 쉬프가 프로그램을 정해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이렇게 썼다. “현시대의 공연들은 매우 예측 가능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과연 좋은 일일까요? (…) 이번 공연에서 저는 그날 저의 기분과 공연장, 음향, 그리고 악기에 따라 작품의 선택을 달리 할 예정입니다. 이른 아침 공연장에 가서 저녁에 연주하고자 하는 작품에 대한 영감을 얻게 되는 것이죠.” 연주곡 목록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바흐,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라는 작곡가들의 이름만이 적혀 있었다.
쉬프는 무대에 올라와 바흐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의 C장조 프렐류드와 푸가를 연주했다. 매일 아침 한 시간 동안 바흐 연주를 하며 하루를 시작한다는 이야기를 덧붙였다. 다음으로 연주할 곡은 무엇인지, 이 콘서트홀에 어떤 음악이 어울릴지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주기 위해 통역으로 문지영 피아니스트가 무대에 함께 자리했다. 이어서 바흐 한 곡을 더 연주한 뒤, 쉬프는 오늘 이 공연장에서는 모차르트가 제격일 것 같다는 말과 함께 그의 피아노 소나타를 연주했다. 중간중간 곡의 배경이나 작곡가에 대한 흥미로운 설명이 더해졌고, 모차르트·하이든 소나타를 지나 슈만의 다비드 동맹 무곡까지 연주된 후에야 1부가 마무리됐다. 한 시간 반이 훌쩍 넘은 시간이었다.
그때그때 곡을 결정했던 1부와 달리 2부에서 쉬프는 D단조로 된 곡들만을 연주했다. 바흐의 반음계적 판타지와 푸가, 멘델스존의 엄격 변주곡,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템페스트’가 차례로 연주됐지만 그가 연주 직전 곡을 결정하기 전까지는 다음 곡을 알 수 없었다. 긴 시간, 언제까지 이어질지 알 수 없는 시간 속에서 음악을 들으며 나는 지금 이 순간이 전체 음악에서 어디쯤인지 몰라 헤매기도 하고, 음악에 몰입해 잠시 몸이 있다는 사실을 잊기도 하고, 달콤한 선율이 들려올 때는 조금은 나른한 기분으로 긴장을 풀고 쉬기도 했다. 눈으로 글의 흐름을 바삐 좇고, 공연 안에서 어떤 정보를 찾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음악이 들려오는 대로 듣고, 때론 언어화된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그의 연주를 따라갔다. 정말로 오랜만에 음악을 자세히, 그리고 제대로 경험했다고 느꼈다. 눈앞의 연주를 두고 그간 너무 다른 것을 보고 있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공연이 끝난 뒤 콘서트홀 로비에는 ‘오늘의 앙코르’란 제목이 적힌 종이 세 장이 붙었다. 각각 1부, 2부, 앙코르 곡목이 적혀 있었다. 언젠가는 앙코르가 음악가의 진짜 선택을 즐길 수 있는 진정한 공연의 순간 같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그날 쉬프의 공연은 길고 긴 앙코르와도 같았다. 어디로 어떻게 향할지, 어디까지 이어질지 몰랐던 그 공연에서 나는 쉬프가 자부한 것처럼 “놀라움과 새로운 발견의 시간”을 경험했는데, 그건 그 연주가 단지 훌륭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기꺼이 순간의 변화와 반응을 받아들이며 시시각각 출렁이던 그의 마음과 손짓을 함께 경험할 수 있어서였다. 여전히 내가 공연장을 찾는 이유는 바로 이런 움직임을 만나기 위해서였다는 사실을 아주 오랜만에 떠올렸다.
신예슬 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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