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푸른, 붉게 빛나는..” 사소한 기억이, 문득 말을 건넸다
‘아트스페이스 빈공간’ 25일까지
‘스튜디오126’ 30일까지 전시
사진·영상 작품 20여 점 선봬
# 제주의 땅 그리고 바다에 깊이 뿌리내린 어느 개인, 가족의 이야기입니다. 이데올로기, 전쟁의 광풍 속에도 살아남은 이들이 기억하는게 무엇인지, 그 안에서 한 개인의 삶과 일상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 담담하게 질문을 던집니다. 작가의 시선을 통해 개인의 시간은 집단의 역사와 맞물리고 과거의 그림자는 현재의 빚으로 이어집니다.
전시는 두 개의 공간에서 펼쳐집니다. ‘스튜디오126’이 희권 할아버지, ‘아트스페이스 빈공간’은 오태경 할아버지와 만났습니다. 1937년생(희권)과 1931년생(오태경) 세대들의 경험의 영역이 그려내는 어쩌면 보편적인 시대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제주시 원도심 관덕로에 위치한 ‘스튜디오126’ 그리고 ‘아트스페이스 빈공간’이 개최하는 박정근 작가의 제주 첫 개인전 ‘사소한 위로’입니다. 지난 8일 시작해 30일까지 이어집니다.
10년 전 제주에 이주한 작가는 제주의 역사, 문화, 환경, 인물의 다양한 면면을 꾸준히 기록했습니다. 이번 개인전에선 역사적인 사건들에 개입한 개인의 서사에 스며들어, 특정 인물의 기억과 구술에 의지해 실제 장소를 따라가면서 그들의 삶에 덧붙인 작가의 시선을 만날 수 있습니다.
각자 세월 속에 주인공이 주변의 존재들과 어떤 관계를 맺어왔는지, 떠날 수밖에 없었던 사연과 남겨진 이들의 삶은 어떠했나, 고된 삶에서 위로와 위안이 된 존재는 무엇인지 전시를 통해 살펴볼 수 있습니다.
우선 ‘아트스페이스 빈공간’에서는 25일까지 ‘엿가락과 담배연기’ 부제로 한 오태경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만날 수 있습니다. 사실 개인의 서사가 갖는 매력의 하나는 기억의 묘사입니다. 유동적이고, 끊임없이 진화하며 때로는 파편적이더라도 지극히 개인적이라 깊이감이 더할 수도 있습니다. 나아가 전시는 4.3 피해자이자 한국전쟁 참전 용사인 오태경 할아버지 기억을 되짚어 우리에 익숙한 여러 ‘구분’들에 질문을 던집니다.
한국전 당시 유일하게 할아버지의 고달픈 심신을 달래주던게 기호품이던 엿과 담배였고, 그 성질 자체가 유연한데서 작가는 과거와 현재, 개인과 집단 혹은 국가, 적과 아군, 피해자와 가해자 등등 얽히고 설킨 온갖 구분과 구분들의 단초를 찾았습니다.
과거에 무게를 싣되 현재와 최근까지 접점을 생성하는 이야기는, 의도적이면서도 시간의 흐름 속에서 균형을 잃지 않습니다. 삶이란게 결코 이분법으로만 나누어지지 않는다며, 존재의 순환론적인 본질을 되짚어보길 권합니다.
30일까지 ‘스튜디오126’은 ‘주단잠바와 노래방’이라는 부제로 희권 할아버지의 기억을 두드립니다.
작가는 할아버지 시선을 따라 노동과 삶의 현장인 바다 위에 서서 인상주의 화가들이 빛과 함께 시시각각 변화하는 움직임을 자연에서 표현하듯, 할아버지가 수없이 오르고 건넜던 자리에서 다양한 인상을 화면에 펼칩니다.
제주에 남겨진 가족의 이야기도 더합니다. 할아버지 고향인 북촌리는 과거 학살의 현장으로 그곳에서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전시는 흐드러지게 핀 꽃 사이에서 유독 눈에 띄는 ‘주단잠바’, 시간의 흔적이 묻은 ‘높은 물 노래방’, 그리고 희권 할아버지 부부의 사진에서 시작합니다. 할아버지 삶에 보물과도 같은 존재로 그의 삶에 위안을 주는 ‘물건’들에 주목하고 기억에 각인된 삶의 장면들을 새로운 인상으로 덧씌워 위로합니다. 수없이 거쳐 간 바다가 그저 고되고 슬픈 기억만이 아니라 아름답고 유의미한 시간으로 자리했으면 하는 바람도 담아봅니다.
전시 기획을 맡은 권주희 ‘스튜디오126’ 대표는 “주인공의 서사를 따라가며 스며들고 마지막은 행복으로 채워지길 바라는 독자의 심정으로 전시를 마주하게 된다”면서 “작가의 작업은 우리의 주변을 돌아보고, 그것을 다시 삶에 대입하고 사회적으로 연결하고 있기에, 자연스럽고 진솔하며 친절하다”고 전합니다.
제주가 품은 역사와 다양한 이야기를 주제로 ‘4.3 유족 초상 연작’과 ‘잠녀’ 등을 선보여온 작가는, 2019년 서울서 ‘입도조’전을 통해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시대, 불안 계급을 유인한 자연과 문화를 제주가 갖고 있다”는 생각에 제3세대의 입도조(入島祖. 섬에서 나고 자라 터를 이루는 자손의 첫 조상이 되는 사람)를 조명하는 등 제주에 거주하는 해녀, 4.3의 유가족, 청년세대 등을 대상으로 일련의 작업을 지속 진행하면서 과거-현재-미래 제주의 방향성을 묻는데 천착해왔습니다.
상업화랑에서 ‘틈’(2022), 서이갤러리에서 ‘엿가락과 담배연기’(2021), KT&G 상상마당의 ‘입도조’(2019) 등 개인전을 비롯해 제주도립미술관에서 ‘이주하는인간 호모미리라티오’(2023), 현대미술관에서 ‘각별한, 작별한, 특별한’(2020), 고은사진미술관의 ‘제10회 KT&G SKOPF 올해의 작가전’(2018) 등 다수 전시를 개최했습니다. 2017 10th KT&G SKOPF 올해의 작가상을 수상했습니다. 제주문화예술재단의 산양레지던시(2022), 제주현대미술관 레지던시(2019-2020), Arts Tasmania Residency(호바트, 호주, 2018), 제주문화예술재단 예술공간 이아 레지던시(2018) 등에 참여했습니다.
이번 전시는 제주문화예술재단이 후원을 맡았습니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각 전시공간별 인스타그램 계정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스튜디오126’은 전시기간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빈공간’은 오전 11시부터 오후 6시까지 관람 가능합니다. 두 곳 모두 월요일 휴관으로, 전시 마지막 날 30일 월요일 정상운영합니다.
JIBS 제주방송 김지훈(jhkim@jibs.co.kr) 기자
Copyright © JIBS.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