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 무섭도록 충실한 사람의 마음속에서 반복되는 전쟁의 기록[안주연의 래빗홀]
나목
박완서 지음
세계사 | 416쪽 | 14000원
지난 연휴에 양구로 짧은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양구는 소박하게 아름다운 곳입니다. 울창한 숲과 맑은 계곡, 군부대들, 사과와 시래기 판매점, 그리고 돌로 지은 나지막한 박수근 미술관이 있습니다. 화강암과 같은 질감에 간결한 선으로 이웃들의 삶을 그린 박수근 화가의 작품은 순수한 힘으로 마음을 압도해왔습니다. 정신없이 그의 삶과 예술에 대한 이야기들을 찾아보다가 불현듯 박완서 작가의 첫 소설 <나목>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나목>은 한국전쟁 중의 서울, 현재 신세계 본점 건물인 PX 초상화부에서 일하는 경아의 시점으로 전쟁 현장의 삶과 사람들을 그려낸 소설입니다. 미군과 그 연인들의 초상화를 그리던 ‘환쟁이’ 무리에 선량하고 예술에 진지한 옥희도라는 이가 합류하는데, 실제로 박완서 작가와 함께 PX에서 일한 적 있는 박수근 화가를 묘사한 인물입니다. 처음에는 전쟁이라는 비극 속에서 위대한 두 예술가가 함께 일했던 우연과 필연에 놀라워하며, 그리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도발적인 이야기를 써 내려간 박완서 작가의 맹렬함에 감탄하며 읽어나갔습니다.
그런데 소설을 읽어갈수록 저도 경아처럼 숨이 가빠왔고, 외롭고 화가 나고 사랑을 갈구하는 경아를 어떻게 해주어야 하나 싶어 안절부절못하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아니, 그러니까 이것은… 이것은 강력한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의 몸과 마음의 기록입니다. 제가 읽은 <나목>은 스무 살의 생명력 넘치고 재기발랄한 청년이 전쟁을 직격으로 맞으며 겪었던 수많은 느낌의 증언이며, 트라우마 이후 고통과 회복에 대해 본인이 쓴 차트라고 불러도 무방할 기록입니다. 물론 위대한 작가의 데뷔작이며 젊은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독특한 전쟁소설인 이 작품을 트라우마에 관한 기록이라는 면에만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하는 것은 상당히 단편적인 해석입니다. 그러나 독백 속에 드러나는 경아의 혼란과, 분열과, 고통은 소스라칠 정도로 솔직하며 생생하여 저는 일종의 직업병으로 이에 대해 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박완서 작가가 보신다면 ‘아무래도 정신과 의사는 그런 식으로밖에 생각을 못하는 모양이지. 그것도 도움이 된다면 그러든가. 그렇지만 저런 습관은 본인에게도 좋지 않을 텐데’ 하시지 않을까 상상해봅니다.
소설 말미, 중년이 된 경아는 “그해 은행나무의 노오란 빛. 왜 그렇게 살고 싶고, 죽고 싶고, 또 살고 싶었는지. 궁금하지만 내 기억의 소급은 노오란 빛 속에 용해되어 다시는 헤어나질 못했다”고 씁니다. 그러나 경아는 사실 잊지 않았습니다. 결혼하고 고가를 허물고 새로 집을 짓고 살면서도 은행나무들을 고스란히 남겨두었고, 여전히 그 춥디추운 아우성을 듣습니다. 그리고 <나목>은 그 반복되는 아우성을 마음 한편에 품고 살아가는, 삶에 무섭도록 충실한 한 사람이 마음속 반복되는 전쟁을 겪어내는 기록입니다.
제가 경아의 주치의라면 이런 이야기들을 해주고 싶습니다. 전쟁과 같은 강력한 트라우마 사건은 삶의 경험에 의미를 부여하는 신념의 토대를 부수기에, 트라우마 당사자는 존재와 정체성의 위기를 겪게 된다고. 그리고 삶을 지탱하는 보호와 보살핌의 밖으로 내던져지는 경험을 한 당사자는 온몸에 기억된 말할 수 없는 고통과 비밀을 끊임없이 재경험하고 주목하면서 동시에 이 고통의 존재를 외면하게 된다고 말입니다. 이것이 ‘침습’과 ‘회피’를 동시에 경험하는 트라우마의 중심적 변증법이며, 당사자를 죽고 싶고 살고 싶고 또 죽고 싶게 만든다고도요.
또 말해주고 싶어요. 슬픔에 사로잡힌 도시, 자포자기한 회색, 부옇게 바래버린 어머니의 눈빛에 지치면서도 자지러지게 노오란 은행나무를 발견하고 경탄하는 당신 안의 생명력과 미감이 당신을 지켜줄 거라고. 은행잎의 노오란 융단 위에서 분노와 슬픔과 죄책감에 고개를 젓고 처음으로 세차게 흐느끼면서, 당신은 다시 살아가기 시작할 거라고 말입니다. 이전과 같은 찬란하고 오만한 청춘은 아니겠지만, 그 슬픔과 고통을 그대로 느끼고 기록하는 것, 그 균열과 진동조차 내 삶으로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트라우마가 강요하는 과각성과 무감각에 저항하는 길이며, 아물어가는 상처를 품은 채 살아가는 길이라는 것도요.
경아가 예술을 잊지 않고 몰입을 바라던 옥희도와 함께 있고 싶었던 것도 우직한 생명력과 봄에의 믿음을 가진 사람이 필요해서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잠시나마 서로에게 그런 존재가 되어주었을 것입니다. 트라우마의 반대말은 연결이니까요. 가난과 전쟁 속에서도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리고 싶다’던 박수근 화가의 진심과 박완서 작가 안의 ‘삶의 기쁨에의 끈질긴 집념’은 이렇게 소설 속에서 만났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촌스러운 직업병을 발휘해, 고통 속에 있는 이들에게 경아의 독백을 전해주고 싶습니다.
“노오란 은행잎이 마지막 한 잎까지 떨어지듯 나는 내 속에 축적된 눈물만큼만 울면 된다.”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뱉어내다 보면 마음속 고통도 영영 지속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모두에게, 살아 있다는 것이 조금도 거리낌 없어지기를 빕니다.
안주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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