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 단풍 드는 마음
단풍이야말로 최고의 법문
화려함은 끝이 머지않았고
변치않는 건 없다는 가르침
한 사람 인생의 업 농익은
노년기가 단풍시절 아닌가
"오매 단풍 들것네!"(김영랑) 이 짧은 시구절은 아름다운 단풍을 한껏 기대하는 마음을 듬뿍 담았지만, 아직 추수도 끝나지 않았는데 서둘러야겠다는 마음도 포함하고, 푸르렀던 청춘이 끝나감을 안타까워하는 마음도 품고 있다.
단풍이야말로 인연생기(因緣生起)의 가르침을 자연스럽게 가르쳐주는 최고의 법문이다. 나무와 단단한 인연을 맺었던 나뭇잎이 나무를 떠나기 전에 가장 아름답게 빛나며, 그 절정기의 결말이 곧 낙엽이라는 것, 한껏 화려함은 그 시기가 절정기라는 것을 말해주기도 하지만 결말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말해주기도 한다는 것,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것, 생겨난 것은 사라진다는 것, 사라진다고 해서 없어진 것도 아니라는 것, 가장 화려할 때 내려놓을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을 단풍잎은 자연스럽게 설파한다.
북한산에서 살 때 나는 최고의 단풍길을 찾아 산책길을 나선 적이 있다. 그 결과 찾아낸 북한산 최고의 단풍길은 국녕사로 오르는 길이었다. 국녕사로 가기 위해서는 북한동역사관에서 법용사로 접어든 다음 가파른 길을 줄기차게 오르면 되는데, 의상봉 쪽에서 내려오는 계곡과 마주하는 대목에서 아름드리 바위들이 맑은 물을 듬뿍 품고 있는 가운데, 바위틈에 조금 남은 흙을 부여잡고 마음껏 붉은 단풍들이 절정을 이룬다.
내가 북한산에서 두 번째로 꼽은 단풍길은 진국교에서 산영루로 오르는 길이다. 길 양옆에 자유롭게 늘어선 단풍나무와 생강나무, 옻나무, 진달래나무, 담쟁이, 참나무들이 함께 연출하는 색의 향연은 가히 이 세상 풍경이 아니다. 이 길을 갈 때 중요한 것은 한 번쯤은 뒤돌아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돌아보면, '내가 왔던 길이 이렇게 화려했었구나, 그러나 나는 이 길에 눌러앉지 않고 앞으로 가야 한다, 가면 또 다른 길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 하고 생각하게 된다.
한참을 가다 보면 두 갈래 길이 나온다. 한 길은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이고, 다른 한 길은 사람들이 거의 가지 않는 길이다. 내 인생에도 두 갈래 길이 나타났고, 나는 그중에서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출가의 길'을 택했다. 나는 그 길이, 젊은 로버트 프로스트(1874~1963)가 시 '가지 않은 길(The Road Not Taken)'의 단풍 든 숲속에서 선택한, 사람들이 덜 다니는 그 길과 한가지라고 생각한다. 그는 시인의 길을 택했지만, 나는 시인의 길을 버리고 출가의 길을 택했다. 출가의 길을 한참 가면서 돌아보니, 시인의 길과 출가의 길이 다르지 않다.
노동자 시인 정세훈도 비슷한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는 시 '단풍 들 때'에서 자신의 생이 즐겁다면, 그것은 도적같이 지나온 전생의 결과이고, 찰나같이 닥쳐올 내세의 예고라고 노래한다. 만약 행복에 겨워 있다면, 그 행복에 미련 갖지 말고, 그 행복 단풍 들 때 과감히 "가을볕 수수 모가지 잘라지듯 잘라지거라"라고 일갈한다. 그가 그렇게 단호한 이유는 단풍의 즐거움은 곧 이번 생에 쌓은 '업(業)'이라고 여겼기 때문이 아닐까?
사람의 일생에도 단풍 시절이 있다면 언제일까? 흰머리가 많아지고, 주름살이 밭고랑처럼 생기고, 얼굴에 검버섯도 생기는 노년기가 아닐까? 노년의 모습을 우리는 보통 아름답지 않은 것으로 여기고 있지만, 노년기야말로 한 사람의 업이 농익은 단풍 시절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나뭇잎이 스스로 단풍잎을 아름답다고 여기지 않듯이 나이 든 사람도 노년의 모습을 아름답다고 여기지 않지만, 단풍잎이 참으로 아름답듯이 나이 든 사람도 참으로 아름답다. 노년기에 접어든 이를 보면 우리는 이렇게 감탄할 수 있을 것이다. "오매, 단풍 들것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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