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현의 미술래잡기] 포켓몬 시대의 미술관

2023. 10. 13.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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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 위해 세워진 미술관서
MZ겨냥 포켓몬 협업展 열어
새로운 시도 게을리하지 않는
네덜란드 미술관의 노력 보며
보이지않는 '문화전쟁' 느꼈다

추석 황금연휴 동안 네덜란드를 다녀왔다. 처음 가보는 곳이라 궁금한 마음에 여러 곳을, 특히 곳곳에 자리 잡은 크고 작은 미술관을 가능한 한 많이 보려고 노력하였다.

네덜란드의 미술관은 '정치적 올바름'의 바람을 의식한 듯, 서구 열강으로서 수리남이나 인도네시아를 지배했던 역사를 깊이 반성하는 모습이 돋보였다. 한 시대의 모습을 살펴보는 데 역사적인 기록물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미술 작품이기에, 미술관들의 이런 노력은 옛 역사 위에 세워진 세상을 살아가는 오늘날의 우리를 반추하게 해줬다.

무엇보다 그들은 미술관의 감상 기능만큼 교육 기능을 중시하는 듯했다. 누구든 작품 옆에 미술가의 이름, 제목, 재료, 연도 등의 정보를 담은 '캡션'이라는 것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외에 작품이 어떤 역사적·사회적 의미를 지니는지를 정리한 중요한 내용이 함께 들어가는 경우도 있는데, 네덜란드는 이 캡션에 정말 많은 공을 들이고 있었다. 전문적인 관점에서 콕 집어 이야기하면서도 쉽고 재미있는 표현으로 풀어내 보는 관람객에게 유익한 경험이 될 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인 티가 역력했다.

가장 놀란 곳은 반 고흐 미술관이었다. 한 미술가를 위해 지어진 미술관은 대개 좀 지루할 수 있고, 게다가 너무 유명해서 다소 식상할 수도 있는 빈센트 반 고흐이지 않은가.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반 고흐를 중심으로, 그가 살았던 시대상과 다른 동시대 미술가들과의 관계를 보여줌으로써 한 명의 천재가 갑자기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여러 도움으로 만들어진다는 점을 부각시키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특히 오랜 기간 괴짜 미술가의 예술적 기행으로 여겨졌던 그의 정신이상적 행동들, 예를 들면 귀를 자르거나 환영을 본다든가 했던 것이 한 예술가의 낭만적인 면모로 신화화할 행동이 아닌, 정신의학적 도움이 있었다면 충분히 극복할 수 있었던 문제로 적시하기도 했다.

한 명의 위대한 미술가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미술관이라면 그를 신격화해도 될 법한데, 오히려 그의 여러 가지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냄으로써 21세기 관람객의 교양 수준을 제고하는 데에 더 많은 신경을 썼음을 알 수 있었다.

그 와중에 MZ세대부터 어린이들까지 새로운 관람객의 관심을 끌기 위한 전략의 하나로 올 9월 말부터 시작한 포켓몬과의 협업은 그야말로 문전성시였다. 가장 유명한 포켓몬으로 우리에게 알려진 지 30년 가까이 된 피카츄의 모습으로 반 고흐의 자화상을 재해석한 작품은 보는 이들에게 미소를 안겨줬고, 미술관 곳곳의 작품들을 열심히 들여다봐야만 문제를 풀 수 있는 해설지를 들고 어린이와 보호자들이 열심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문제를 다 푼 해설지를 들고 나가면 반 고흐·피카츄 카드를 공짜로 주는데, 현장에는 이 카드를 구하려는, 소위 말하는 리셀러들이 운집해 있기도 했다. 전시가 시작된 첫날에는 구름 같은 인파가 몰려 한정판 인형이나 포스터를 사려고 난리통이었고 하루 만에 준비한 물량이 모두 소진됐다고도 한다.

아마 이들은 반 고흐보다는 포켓몬 상품과 한정판이라는 점에 더 열광하며 전시장을 찾은 것임에 틀림없지만, 이런 귀여운 프로젝트를 통해 더 많은 이들에게 자신의 존재감을 알리고 재정적으로 독립하려는 미술관 측의 노력을 평가절하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특히 19세기 말, 일본의 판화를 수집하고 따라 그려보기도 했던 반 고흐의 일본 문화에의 관심에서 영감을 받아, 이번에는 반대로 일본의 일러스트레이터들이 반 고흐의 작품을 그렸다는 문화 교류의 측면에서 보면 어느 정도 일리가 있고, 누가 봐도 재미있는 기획임에는 틀림없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이제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에서 큰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 이런 인명 살상의 전쟁 외에도 쉽게 티가 나지 않는 분야에서 각국이 동맹을 맺으며 문화 전쟁도 벌이고 있음을 느끼는 계기였다.

지금처럼 우리 문화가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은 적은 없었다. 이런 관심이 지속되려면 우리도 부단한 노력으로 이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도록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다고 느낀 무섭고도 값진 경험이었다.

[이지현 OCI미술관장(미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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