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설로 차인 하버드생이 복수심에 만든 이것, 인류의 진화를 이끌었다 [Books]

김유태 기자(ink@mk.co.kr) 2023. 10. 13. 17:00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이야기로 만들어졌다 / 자미라 엘 우아실 외 지음 / 김현정 옮김 / 원더박스 펴냄

이 모든 일의 시작은, 여자친구에게 차인 다음부터였다. SAT 1600점 만점을 받아 1등을 했고, 하버드대를 다니며 프로그래머를 꿈꿨다. 하지만 컴퓨터에 ‘미친’ 그를 여자친구는 그다지 반기지 않았다. 그녀는 독설로 이별을 선언했다. “네가 컴퓨터에 미친 괴짜라서, 여자들이 널 좋아하지 않는다고 평생 생각하면서 살아가게 될 거야.”

그는 전(ex) 여친에게 자신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려 했다. ‘지질했던’ 그는 복수심으로, 대학교 기숙사 통신망을 해킹해 여학생들의 외모 순위를 매기는 프로그램을 짰다. 이 위험했던 장난은 ‘대학 인터넷 연결망’이란 아이디어로 발전했고, 이 아이디어가 가진 가치는 훗날 8000억달러를 넘어서게 된다. 그는 생애 첫 번째 명함에 이렇게 썼다. “내가 최고 경영자다, XX아(I’m CEO, bitch).”

‘세상은 이야기로 만들어졌다’는 페이스북을 통해 인간이 자신의 이야기를 공유하기 시작했다고 분석한다. 그 중심에 페이스북 창립자 마크 저커버그가 있었다. 사진은 저커버그 삶을 다룬 영화 ‘소셜 네트워크’의 한 장면. 배우 제시 아이젠버그가 저커버그 역할을 맡았다. [워터홀컴퍼니]
젊은 CEO의 이름은 마크 저커버그. 믿기 어렵지만 실제 사건인 저커버그의 저 ‘괴짜 신화’를 두고, 독일 슈피겔지 칼럼니스트 자미라 엘 우아실은 두 개의 함의를 발견한다. 첫째, 페이스북에 덧씌워진 저커버그 개인의 영웅 이야기는 사람들이 매혹될 수밖에 없다는 것, 둘째, 저커버그가 만들어낸 페이스북은 사용자 개인의 ‘이야기’를 공유하는 장치로 기능한다는 점 말이다.

인류에게 이야기(story)란 어떤 의미인지를 흥미롭게 사유한 신간 ‘세상은 이야기로 만들어졌다: 신화, 거짓말, 유토피아’가 한국에도 출간됐다. 원시시대 동굴 이야기부터 그리스신화, 구텐베르크 인쇄술, 디즈니 애니메이션,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까지 인간은 이야기와 함께 했다. 따라서 이 책은 ‘서사의 역사’를 추적하면서 ‘이야기하는 인간’의 서사를 다시 써내려가는 책이다.

신간 ‘세상은 이야기로 만들어졌다’의 표지.
정보가 부족했던 원시의 인간에게, 주변 동료들의 이야기란 ‘생존을 위한 절박한 수단’이었을 것이다. 한 남성이 맹수에게 쫓겨 절벽 끝에서 호수로 뛰어내렸다고 가정해보자. 이야기가 과장될수록 또 극적일수록 탈출 스토리는 마을 주변으로 널리 퍼져나갔을 것이다. 동시에 이 이야기는 흥미성과 함께 생존에 대한 정보도 담고 있다.

‘그 호수의 물속은 비상시 뛰어들 만한 깊이다’란 정보 말이다. 동굴의 벽면에 적힌 원시시대의 벽화들은 당대의 이야기와 정볼르 동시에 담고 있다. 그림들은 원시인의 생존기는 당대로선 일종의 액션 영화였다고 책은 말한다. 하나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생존을 위한 정보를 동시에 담는 것, 원시인들은 벽화에 그림을 그리고 공유하면서 이야기라는 장르를 만들기 시작했다.

‘세상은 이야기로 만들어졌다’의 저자 자미라 엘 우아실 [Gregor Fischer·Wikimedia Commons]
중세 시대에 이르러, 구텐베르크 인쇄술이 발명되면서 이야기가 전달되는 방식은 문자와 매체로 전환됐다. 이야기는 인간이 보편적으로 공유하는 요소다. 그러나 인쇄술의 500년사보다는 인터넷 발명 후 30년은 이야기의 전달 방식을 혁명적으로 바꾼 시간이었다. 과거엔 한 권의 책을 모두 소비해야만 이야기를 온전히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클릭 한 번으로 방대한 이야기가 쏟아진다.

구글과 위키피디아는 세상의 모든 이야기를 집결한 총람과 같다. 피자 한 판의 가격으로 영화와 시리즈를 무한히 소비 가능한 넷플릭스도 본질은 ‘이야기’다. 온라인 롤플레잉 게임은 수천 명이 동시 접속해 무한히 큰 세계에서 스스로 서사의 주인공이 된다. 플레이어들은 집단적으로 만나 스토리 라인에 맞춰 정밀하게 플레이한다.

좋은 스토리는 기업의 자금 확보에도 최중요 요소다. 한 명의 위대한 기업이 탄생하려면 형이상학적인 영감이 기업이 판매하는 제품과 서비스의 스토리에 담겨야 한다. 파산과 새로운 시작이란 서사는 기업 경영자의 자기 서사에 필수적이다. 추락을 경험해보지 않은 설립자는 의심스러워 보인다.

‘세상은 이야기로 만들어졌다’ 독일어판 표지.
이야기는 그러나 위험하다. 이야기는 투표 결과를 좌우하고 사람들을 영원히 반목시키며 때로 전쟁을 일으킨다. 인간이 자아를 구성하는 과정에서도 이야기는 인간을 분열시킨다. 팝스타, 프로 운동선수, 인플루언서의 소셜 미디어는 평범한 일상 대신 화려한 삶으로 도배돼 있다.

인스타그램 등 SNS를 통해 보여지는 삶을 시각적으로 확인하면서, 사람들은 자기 서사와 타자의 서사를 일치시키려 한다. 자기 서사를 타자의 서사로 ‘최적화’하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자신은 지워진다. 이 때문에 인간은 피로해지고, 불안해진다고 책은 쓴다.

이야기가 과잉 공급되면서 음모 서사도 만들어졌다. 소문과 비방이 확산되면 음모의 서사가 만들어진다. 오늘은 과거에 비해 음모 신화에 빠져들기도 쉽고 확산의 속도도 빠르다. 사람들은 마치 컴퓨터게임을 하듯이 음모의 수수께끼를 완성하는데, 이 과정에선 항상 적대자가 등장한다.

이야기는 인류를 진화시켰지만 동시에 전쟁을 일으켰고 사람들을 반목하게 만들었다. 세상의 모든 사건들은 ‘이야기’ 때문에 발생했다고 신간 ‘세상은 이야기로 만들어졌다’는 말한다. 사진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반대하는 러시아 시민의 사진. [Silar·Wikimedia Commons]
대개 엘리트 권력자인 그 적대자는 음모 소비자의 눈으로 보기에 극악무도하며 동시에 주변을 착취하는 존재다. 편집증에 가까운 시선 속에서 세상엔 ‘영웅과 적대자’ 둘만 남게 된다. 유튜브의 무수한 비현실적 음모론, 반사실적인 움직임 때문에 세상은 왜곡된 내러티브로 가득해진다.

그럼에도 이야기는 영원할 것이다. 정치, 언론, 기업, 전쟁 등 세상의 모든 움직임은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책은 그래서 현생 인류를 ‘호모 나랜스(Homo narrans)’로 일컫는다. 호모 사피엔스는 ‘슬기로운 인간’이란 뜻인데, 인간이 슬기로운 건 아주 가끔이지만 이야기는 항상 곁에 두기 때문이다. 그의 눈에 인간의 본질은 결국 ‘이야기하는 원숭이’다.

Copyright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