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 무기력을 부르는 '진짜 경험'의 부재
삶을 힘들게 하는 건 과로와 탈진만이 아니다. 권태와 무기력도 현대인의 병증이다. 우리 시대의 무기력 원인을 이 책은 두 가지에서 찾는다. '고립'과 '진짜 경험의 부재'이다.
현대인들은 스마트폰에 갇혀 방 안에서 고립돼 살아간다. 침대 위에서 영화관, 식당, 사무실 등 대부분의 일을 해결할 수 있는데 굳이 밖으로 나가는 모험을 선택하지 않는다. 문제는 스마트폰이 '진짜 세상'을 쓸모없는 것으로 만든다는 점이다. 해나 아렌트의 목소리를 빌리자면 현대인들은 "자기 자신 외에는 그 무엇에도 중심을 두지 않는 사생활의 두터운 슬픔"으로 가득 찬 세상에 살고 있다.
파스칼 브뤼크네르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지성으로 소설가이자 철학자이다. 프랑스 4대 문학상 중 르노도상과 메디치상을 수상했고, 공쿠르상 심사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진짜 삶을 경험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브뤼크네르는 탁월한 처방전을 선물한다.
이 책은 빗장, 여행, 스마트폰, 실존, 루틴, 모험심, 에로스, 사생활, 일상, 실존, 탈주 등 15가지 단서를 따라가면서 생의 감각을 되찾는 방법을 알려준다. 이마누엘 칸트, 루이 14세, 드니 디드로, 플랑드르파, 토마스 만 등 철학부터 예술까지 풍성한 지적 토대에 기반해 풍성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권태를 부르는 가장 흥미로운 단서는 '슬리퍼'다. 실내 생활의 동반자인 슬리퍼는 우리가 직립 보행 대신 소파나 침대에 축 늘어져서 지내는 생활 습관을 상징한다. 소설 '오블로모프'의 주인공은 타고난 무기력증으로 늘 의자와 침상에서 시간을 보내고 잠옷을 입고 실내화를 신는다. 대부분의 시간을 누워 있느라 연인과도 헤어진다. 과식과 잠, 미루는 버릇이 병인 그를 "남은 생이라는 널찍한 관을 자기 손으로 만들고는 그 속에 편안하게 누워서 끝을 향해 간다"고 평가한다.
저자는 슬리퍼를 신고 가운을 입은 채 실내에서 생활하는 시간이 길어지고, 실내복과 외출복의 경계가 희미해지면서 우리가 원래 바깥 세상에 대해 갖고 있던 긴장감이 옅어졌다고 지적한다. 저자는 "슬리퍼를 벗을 일이 없는 삶은 구두나 스니커즈를 신고 리듬감 있게 걸어가는 삶만큼 흥미롭지는 않다"면서 삶의 리듬을 회복하자고 주장한다.
결국 화면은 화면일 뿐이다. 밖으로 나가야하는 이유는 많다. 새날의 아름다움을 찬양하기 위해, 신체가 냄새· 소리·빛을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 밖으로 나가야 한다. 빗장을 걸고 집에만 산다면 안전을 위해 죽음과도 같은 권태를 대가로 치르는 셈이다. 멀리 내다보는 것이 불가능한 '초저공비행' 같은 삶을 끝내는 방법은 당장 침대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저자는 "우리를 강하게 만드는 것은 도피가 아니라 역경과의 정면 대결일지니 가능성의 문을 최대한 많이 열어두고 경이로운 모험을 다시 시작해 보자"고 권유한다.
[김슬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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