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을 구한 것도 전쟁을 부른 것도 … 시작은 이야기였다

김유태 기자(ink@mk.co.kr) 2023. 10. 13.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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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모가 난무하는 현대사회
원인은 이야기의 과잉 공급
동굴벽화부터 넷플릭스까지
인류 진화에 결정적 역할 한
이야기 의미 흥미롭게 사유
세상은 이야기로 만들어졌다 자미라 엘 우아실 외 지음, 김현정 옮김 원더박스 펴냄, 2만7000원

모든 건 여자친구에게 차인 다음부터였다. SAT 1600점 만점을 받아 1등을 했고, 하버드대를 다니며 프로그래머를 꿈꿨다. 하지만 컴퓨터에 '미친' 그를 여자친구는 그다지 반기지 않았다. 그녀는 독설로 이별을 선언했다. "네가 컴퓨터에 미친 괴짜라서, 여자들이 널 좋아하지 않는다고 평생 생각하면서 살아가게 될 거야."

그는 전 여자친구에게 자신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려 했다. 그는 복수심으로, 대학교 기숙사 통신망을 해킹해 여학생들의 외모 순위를 매기는 프로그램을 짰다. 이 위험했던 장난은 '대학 인터넷 연결망'이란 아이디어로 발전했고, 이 아이디어가 가진 가치는 훗날 8000억달러를 넘어서게 된다. 그는 생애 첫 번째 명함에 이렇게 썼다. "내가 최고경영자다, XX야(I'm CEO, bitch)."

젊은 CEO의 이름은 마크 저커버그. 믿기 어렵지만 실제 사건인 저커버그의 저 '괴짜 신화'를 두고, 독일 슈피겔지 칼럼니스트 자미라 엘 우아실은 두 개의 함의를 발견한다.

첫째, 페이스북에 덧씌워진 저커버그 개인의 영웅 이야기는 사람들이 매혹될 수밖에 없다는 것, 둘째, 저커버그가 만들어낸 페이스북은 사용자 개인의 '이야기'를 공유하는 장치로 기능한다는 점 말이다.

인류에게 이야기(story)란 어떤 의미인지를 흥미롭게 사유한 신간 '세상은 이야기로 만들어졌다: 신화, 거짓말, 유토피아'가 한국에도 출간됐다.

원시시대 동굴 이야기부터 그리스 신화, 구텐베르크 인쇄술, 디즈니 애니메이션,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까지 '서사의 역사'를 추적한 책이다.

원시의 인간에게 이야기란 '생존을 위한 수단'이었을 것이다. 한 남성이 맹수에게 쫓겨 절벽 끝에서 호수로 뛰어내렸다고 가정해보자. 이야기가 과장될수록 또 극적일수록 탈출 스토리는 마을 주변으로 널리 퍼져 나갔을 것이다.

동시에 이 이야기는 흥미성과 함께 생존에 대한 정보도 담고 있다. '그 호수의 물속은 비상시 뛰어들 만한 깊이다'란 정보 말이다. 동굴의 벽면에 적힌 원시인의 생존기는 당대로선 일종의 액션 영화였다.

구텐베르크 인쇄술이 발명되면서 이야기가 전달되는 방식은 문자와 매체로 전환됐다. 이야기는 인간이 보편적으로 공유하는 요소다. 그러나 인쇄술의 500년사보다는 인터넷 발명 후 30년이 이야기의 전달 방식을 혁명적으로 바꾼 시간이었다. 과거엔 한 권의 책을 모두 소비해야만 이야기를 온전히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클릭 한 번으로 방대한 이야기가 쏟아진다.

이야기는 그러나 위험하다. 이야기는 투표 결과를 좌우하고 사람들을 영원히 반목시키며 때로 전쟁을 일으킨다. 인간이 자아를 구성하는 과정에서도 이야기는 인간을 분열시킨다. 팝스타, 프로 운동선수, 인플루언서의 소셜미디어는 평범한 일상 대신 화려한 삶으로 도배돼 있다.

인스타그램 등 SNS를 통해 보이는 삶을 시각적으로 확인하면서 사람들은 자기 서사와 타자의 서사를 일치시키려 한다. 자기 서사를 타자의 서사로 '최적화'하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자신은 지워진다. 이 때문에 인간은 피로해지고, 불안해진다고 책은 쓴다.

이야기가 과잉 공급되면서 음모 서사도 만들어졌다. 소문과 비방이 확산되면 음모의 서사가 만들어진다.

오늘날은 과거에 비해 음모 신화에 빠져들기도 쉽고 확산의 속도도 빠르다. 사람들은 마치 컴퓨터 게임을 하듯이 음모의 수수께끼를 완성하는데, 이 과정에선 항상 적대자가 등장한다. 대개 엘리트 권력자인 그 적대자는 음모 소비자의 눈으로 보기에 극악무도하며 동시에 주변을 착취하는 존재다. 편집증에 가까운 시선 속에서 세상엔 '영웅과 적대자' 둘만 남게 된다. 유튜브의 무수한 비현실적 음모론, 반사실적인 움직임 때문에 세상은 왜곡된 내러티브로 가득해진다.

그럼에도 이야기는 영원할 것이다. 정치, 언론, 기업, 전쟁 등 세상의 모든 움직임은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책은 그래서 현생 인류를 '호모 나랜스(Homo narrans)'로 일컫는다. 호모 사피엔스는 '슬기로운 인간'이란 뜻인데, 인간이 슬기로운 건 아주 가끔이지만 이야기는 항상 곁에 두기 때문이다. 그의 눈에 인간의 본질은 결국 '이야기하는 원숭이'다.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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