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76년 우주로 날아간 '나비부인'… 오페라가 달라졌다
100여 년 동안 사랑받은 원작, 클래식 오페라의 저력은 분명 고전에 있다. 다만 거기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시대를 관통하며 살아남은 작품들은 오늘날에도 울림을 주는 메시지와 감동을 담고 있다. 제작진, 가수, 지휘자, 오케스트라에 따라 시청각의 재미는 다채롭게 변주되고, 때론 현대적 관점에 맞게 시공간적 설정과 주제의식, 결말의 방향까지 달라지기도 한다. 연출가의 의도가 중심이 되는 극, 이른바 '레지테아터(Regietheater)'다.
풍요로운 가을, 실험적 무대로 새 옷을 입은 대형 오페라 작품들이 관객을 기다린다. 패션 디자인(정구호), 마당놀이(손진책), 인형극(알렉스 오예) 등 이색 경력을 바탕으로 공연계 거장으로 거듭난 연출가들의 고민과 시도가 가득하다. 원작을 재해석한 시도가 현대 관객들의 공감을 살 수 있을까. 여기에 세계 무대에서 활약하는 한국인 성악가들의 고국 공연도 성사되면서 더욱 풍성한 무대에 대한 기대감이 높다.
특히 연출가들의 해석엔 '주체적 여성상'이 반영되는 추세다. 패션 디자이너이자 공연 연출가 정구호는 원작 '나비부인'의 19세기 후반 일본 배경을 약 700년 뒤인 서기 2576년의 우주로 옮겨 놓는다. 이탈리아 작곡가 푸치니의 3대 걸작으로 꼽히는 이 작품은 원래 집안이 몰락해 게이샤가 된 초초상과 미국 해군장교 핑커톤의 비극적 멜로를 다룬다. 서정적인 선율 등이 특징이지만, 근대 서구의 오리엔탈리즘이나 제국주의 관점 등으로 비판받는 작품이었다.
정 연출은 나비부인의 남녀 캐릭터 구도를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아닌, 두 행성의 수장으로 재구성했다. 멜로를 곁들인 과학소설(SF)에 가깝다. 전통적 오페라에선 보기 힘든 실험적인 시각 연출도 시도한다. 행성을 형상화한 회전 무대, 조명과 LED 스크린, 비대면 영상 활용 등이다.
주인공 초초상 역은 이 역할로 유럽 무대에서 200회 이상 공연한 소프라노 임세경이 맡는다. 임세경은 "이렇게 혁신적인 연출은 처음"이라며 "한국을 넘어 세계에 이름을 남기는 프로덕션으로 만들고 싶다"고 밝혔다. 임세경과 함께 번갈아 초초상을 맡는 소프라노 박재은도 2018년부터 프라이부르크 오페라 극장 솔리스트로 활약한 바 있다. 핑커톤 역으로는 테너 이범주·허영훈이 함께한다. 공연은 12~15일 성남아트센터 오페라하우스에서 총 4회 열린다.
서울시오페라단이 오는 26~29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 올리는 '투란도트'는 공연계 거장 손진책의 첫 오페라 연출작이란 타이틀만으로도 주목받는다. 손 연출은 1981년 마당놀이를 무대에 올리며 연극의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고, 2002년 한일월드컵 개막식 총감독, 2010~2014년 국립극단 예술감독 등을 역임했다.
투란도트는 1926년 이탈리아 라 스칼라 극장에서 초연됐던 푸치니의 유작이다. 청혼자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냉혹한 공주 투란도트와 그녀에게 반해 생을 건 도전을 하는 망국의 왕자 칼라프, 칼라프를 짝사랑해 목숨을 바치는 시녀 류 등이 등장하는 사랑 이야기다.
손 연출은 이 작품을 '류에게 보내는 헌사'로 재해석한다. 류는 투란도트와 칼라프에게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일깨워주는 중요한 역할이지만, 투란도트와 칼라프가 맺어지는 과정을 중심으로 보면 조연으로 취급될 수도 있다. 손 연출은 "널리 공연되는 투란도트의 결말과 다르게 류가 지키고자 한 숭고한 가치를 더 깊이 되새기는 연출을 선보일 것"이라고 전했다. 또 무대는 이태섭, 의상은 김환, 안무는 김성훈 등이 참여해 극 중 배경을 원작의 고대 중국풍이 아닌, 시대와 국적이 불분명한 어느 지하세계로 표현한다.
칼라프 역에는 세계적 테너 이용훈이 올라 화제다. 그는 서정적 음색과 힘 있는 목소리를 지닌 '리리코 스핀토'로서 세계 정상급 극장에서 공연해왔는데, 국내에선 첫 무대다. 지난 시즌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런던 로열오페라에서 같은 역할로 미국·유럽 관객들을 사로잡은 데 이어, 국내에서도 그의 아리아 '네순 도르마'(아무도 잠들지 말라) 등을 들을 수 있게 됐다. 테너 박지응·신상근이 칼라프 역을 나눠 맡고, 투란도트는 소프라노 이윤정·김라희가, 류는 소프라노 서선영·박소영이 각각 연기한다.
오는 26~29일 공연될 '노르마'는 2016년 스페인 출신 세계적 거장 알렉스 오예가 영국 런던 로열오페라에서 초연한 버전을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으로 그대로 가져온다. 오예는 인형극·연극 등을 거쳐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개회식 공동 연출을 맡았고, 최근에도 오페라뿐 아니라 영화 등 다양한 프로젝트에 몸담고 있다. 노르마는 벨칸토 오페라의 대가 벨리니의 작품이다. 극 중 배경은 고대 로마로, 드루이드교 대사제 노르마와 로마 총독 폴리오네, 또 다른 여사제 아달지사의 삼각 갈등과 고뇌를 그린다. 종교적 금기와 인간적 열망이 충돌하는 '광기' 어린 작품이다.
오예는 기원전 100년께인 극 중 배경과 서기 2023년 현시대 관객 사이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현대 종교를 연상시키는 시각적 요소를 더했다. 또 3500개의 십자가로 가득 채운 무대로 극단적인 종교 근본주의와 인간의 욕망을 그려낸다. 그는 "노르마는 사제일 뿐 아니라 사랑도, 질투도 느끼고, 보상받지 못하는 사랑에 슬픔과 증오도 느끼는 인간적인 캐릭터"라며 "현대 여성 관객도 노르마와 많은 교감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소개했다.
노르마 역에는 유럽에서 '비토리아 여'(Vittoria Yeo)로 활동하는 소프라노 여지원이 오른다. 이탈리아 거장 지휘자 리카르도 무티가 발탁해 '무티의 딸'로도 불린다. 2017년 유럽의 3대 음악축제인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 오페라 '아이다'의 아이다 역으로, 페스티벌 사상 최초로 한국인이 타이틀 롤을 맡기도 했다. 이탈리아 소프라노 데시레 란카토레가 노르마 역을 나눠 맡는다. 이 밖에 오페라를 전공한 떠오르는 여성 연출가들의 작품도 이달 잇따라 관객과 만난다. 양수연이 연출로 참여한 '라보엠'은 지난 6일 전남 장흥문화예술회관에 이어 13~14일 경기 광주 남한산성아트홀, 20~21일 전남 순천문화예술회관을 순회하며 무대에 오른다. 푸치니 걸작을 비수도권 지역에서 만나볼 수 있는 기회다. 미디어 아트로 관객석의 양옆 벽면까지 무대화하는 시도를 통해 빛과 음악이 어우러지는 무대가 될 것으로 보인다.
국립오페라단 출신 표현진이 연출하는 '세비야의 이발사'는 오는 21~22일 한강 노들섬 잔디마당의 야외 무대에서 시민들과 만난다. 희극적인 오페라 부파의 대표작으로, 인터미션 없이 약 110분의 2막으로 구성한 전석 무료 공연이다.
대구오페라하우스도 10월을 맞아 연례 행사인 대구국제오페라축제를 진행 중이다. 지난 6~7일 파격적인 소재의 오페라 '살로메'를 영화감독이기도 한 연출가 미하엘 슈트루밍어의 해석으로 선보였다. 다음달 10일까지 매주 주말 다른 작품을 올리며, 특히 오는 20~21일 예정된 슈트라우스 오페라 '엘렉트라'는 한국 초연이다. 불가리아 소피아 국립오페라·발레극장과 합작했다.
[정주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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