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범도 ‘고려독립’은 볼셰비키혁명… 자유시참변 책임 통감해 자결한 서일 선생이 육사에 더 적합”
“자유시 참변 책임 통감, 자결한 북로군정서 지도자 서일선생 육사 교정에 더 적합”
“부인과 장남 희생 가슴아픈 사연은 민족 전체 울리고 남을 위인”
“군사전략적 능력과 책임완수 군인정신 요소에서 육사 흉상 설치는 부적합”
“홍 장군 자유시참변 사태 따지러 레닌 만났다는 주장은 이해하기 힘든 주장”
‘아들과 아내를 희생시켜가며 임시정부 수립 후 첫 항일무장투쟁인 봉오동전투를 승리로 이끈 항일무장투쟁의 영웅.’
‘ 독립운동가 괴멸된 자유시 참변에 책임있는 지도자,말년 소련 볼셰비키당 공산주의자로 변절한 비운의 독립운동가.’
‘육사 흉상’ 이전을 계기로 불붙은 ‘역사 이념전쟁’을 계기로 독립운동가 홍범도 장군에게 따라다니는 두 얼굴의 초상화다.
육사 교장을 지냈으며 독립전쟁 시기 항일무장투쟁에 정통한 박남수(66) 철기이범석장군기념사업회장은 최근 문화일보와 인터뷰에서 흉상 육사 외부 이전과 관련 "군사지도자에게 요구되는 군사전략적 능력과 책임완수라는 군인정신의 결정적 요소면에서 홍장군의 육사 흉상설치는 부적합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박 회장은 "조선시대 노비 신분에서 홀연히 일어나 대일항쟁에 나섰던 홍 장군의 무장투쟁력과 역사, 그 과정에서 부인과 장남의 희생과 같은 가슴아픈 사연은 우리 민족 가슴 전체를 울리고 남을 만한 위인임에는 틀림없는 사실"이라며 " 하지만 봉오동 전투로부터 시작해서 북쪽 자유시로 부대이동 의사결정 등에서 나타난 군사전략적 과오, 자유시 참변에 대한 당시 최고 지도자 입장에서의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은 육사 생도들의 가치관 형성이라는 정신교육 측면에서 보면 부적합하다"며 홍 장군 흉상 외부 이전에 찬성했다.
그는 "홍범도 장군의 이력은 ‘자유민주주의 수호’나 ‘책임완수’ 항목에서 사관생도에게 의문을 줄 수밖에 없다"며 "1920년대 홍장군이 보여주었던 일련의 군사전략적 과오들과 책임완수라는 덕목의 결함은 아무리 좋게 평가해도 육사생도들 가치관 형성에 적합하지 않다"며 "하지만 독립운동영웅 한 사람을 잃지 않도록 독립기념관 및 전쟁기념관 등으로의 이전 시 예우를 갖춰 소홀함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 회장은 홍 장군의 행적과 관련된 여러 의문점과 오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육사 흉상을 둘러싼 문제가 급기야 역사전쟁으로 확산됐다.
"문재인 정부에서 홍범도 흉상을 정예장교 양성 군사기관인 육사에 설치한 후, 정부가 바뀌자 일부 정치인이 홍범도의 공산주의론으로 흉상 설치가 부적합하다고 문제 제기하자 광복회 중심의 독립운동단체 등에서 역사 바꾸기, 독립운동가 모욕이라며 반발했다. 국방부는 홍범도 공산주의론이나 육사의 정체성 보호라는 다소 추상적인 개념으로 대응하면서 사태가 확전됐다. 군사적 관점에서만 말한다면 육사의 홍범도 흉상 이전 움직임은 육사 제자리 찾기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홍범도 장군의 전반적인 면, 특히 군사지도자로서의 능력을 냉철히 평가한다면.
"홍 장군은 일찍이 조선시대 말기 국권이 찬탈당하는 과정에서 노비의 신분에서 홀연히 일어나 일제 정규군과 조직적 무장투쟁을 벌인 효웅스러운 독립군 지도자다. 하지만 인생의 후반기에 러시아령 자유시(현 스바보드니, 옛 알렉셰프스크) 독립군 괴멸이라는 참변의 한복판에 서고 이후 러시아 공산당으로 입당, 우리와는 다른 길을 걸어간 비운의 항일무장투쟁가다. 홍장군은 평양 진위대 나팔수 출신으로 제대로 된 군사교육을 받은 적이 없는 독립군지휘자였지만, 그 용맹과 사나움은 정평이 있었다. 하지만 군사전략가로서의 자질은 1920년대에 발생한 여러 사건들을 보았을 때 아쉬움이 많다."
-자유시 참변 배경과 진행 과정을 정리한다면.
"자유시 참변이나 1920년의 주요한 무장투쟁 사례를 각 각 그 하나만 놓고 본다면 코끼리 다리 만지기 밖에 되지 않는다. 1920년 시대상황과 동아시아 전체 정세, 그리고 임시정부가 출범 후 1920년을 독립전쟁 원년으로 선포한 이후의 한국독립군 세력의 움직임을 전체를 관통하는 기승전결의 관점에서 들여다 봐야 한다. 당시 전통적으로 아시아의 중심국이었던 중국은 쑨원(孫文)의 공화혁명이 위안스카이(袁世凱)에 의해 변질돼 군벌들이 판을 치는 무주공산의 상황이었다. 만주의 실권자 장쭤린(張作霖)은 적당히 일제와 야합해 만주에서 일본 영향력을 묵인하고 중국 중심으로 진출하는데 집중하던 시기였다. 러시아는 1917년 일어난 볼셰비키 혁명이 극동지방으로 물밀듯 퍼져나가면서, 1920년대는 연해주 일대에서 혁명에 반대하는 세력인 백계러시아와의 러시아내전이 막바지에 다달은 상태였고, 사회주의에 경도된 많은 한인독립운동가들은 레닌의 피압박 약소민족 해방론에 고무된 상태였다. 일제는 한반도 강제병탄 후 그들의 이익선을 한반에서 몽골 일대까지 확장하면서 러시아내전에서 백계러시아를 지원하고 체코군대의 철병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7만이라는 대병력을 시베리아로 출병시켜 만주에 대한 침략 의도를 조심스레 키우고 있었다. 한민족은 1919년 상해임시정부가 출범한 후 만주에서의 조직적 항일무장투쟁을 위해 1920년을 독립전쟁 원년으로 선포하고 본격적인 전쟁준비에 착수할 때였다. 자유시 참변은 일제의 간도지역 한인독립군과 그 근거지를 초토화시키기 위한 정규군사작전에서 탈출한 한인독립군들이 전투력이 소진된 상태에서 만주와 연해주 접경으로 밀려들어갔고, 이 지역에서의 러시아내전이 거의 종식단계로 들어서자 공산러시아는 한인독립군들의 무장세력으로서의 위험을 예방하면서 자기들 볼셰비키 혁명의 전위대로 키우기 위한 의도와, 대부분의 전투력이 소진된 한인독립군들은 러시아지원에 기대려고 러시아의 요구대로 시베리아 북단의 자유시로 이동한 것이 그 배경이다. 3000여명의 한인무장세력이 그 지역으로 들어오자 이전부터 그 지역에서의 영향력 싸움을 해 오던 이르쿠츠크파와 상해공산당파 사이에 군권 다툼이 발생했다. 하지만 명목상으로는 자유시로 밀려온 한인독립군들에 대한 지휘권 다툼이라고 하나, 본질적으로는 앞에서 말한대로 볼셰비키 혁명전위대로 전환시키기 위한 러시아공산주의자들의 시도에 대해 한인독립군들이 자주성을 지키기 위해 저항한 것이 본질이다."
-육사는 왜 홍범도 흉상의 육사 교정 설치가 부적절하다고 하는가.
"핵심은 군사지도자에게 요구되는 군사전략적 능력과 책임완수라는 군인정신의 결정적 요소면에서 홍장군의 흉상설치는 부적합하다는 논리다. 조선시대 노비 신분에서 홀연히 일어나 대일항쟁에 나섰던 홍 장군의 무장투쟁력과 역사, 그 과정에서 부인과 장남의 희생과 같은 가슴 아픈 사연은 우리 민족 가슴 전체를 울리고 남을 만한 위인임에는 틀림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봉오동 전투로부터 시작해서 북쪽 자유시로 부대이동 의사결정 등에서 나타난 군사전략적 과오, 자유시 참변에 대한 당시 최고 지도자 입장에서의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은 육사 생도들의 가치관 형성이라는 정신교육 측면에서 보면 부적합하다. 더 구체적으로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 ①홍장군의 군사전략적 과오를 보려면, 1920년 일련의 독립전쟁 상황을 기승전결 개념으로 들여다 봐야 한다. ‘기’는 봉오동전투(1920년 6월), ‘승’은 청산리전투(1920년 10월), ‘전’은 밀산지역 향후 작전 대토론회 및 자유시 이동(2020년 12월~2021년 2월), ‘결’은 자유시 참변(2021년 6월)으로 정리된다. 즉, 봉오동전투의 결말이 자유시 참변으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1920년 독립전쟁 원년 6월에, 상해임시정부나 만주 지역 한인독립군들이 아직 항일 투쟁을 위한 전투준비나 전략 등이 채 갖춰지기도 전에 홍 장군은 일제의 대규모 토벌작전을 유발시키는 봉오동 전투를 일으켰다. 당시 상해임시정부는 1920년을 독립전쟁 원년으로 선포하고 만주 일대의 한인독립군 세력들을 임시정부 산하로 편입시켰다. 지청천의 서로군정서, 김좌진의 북로군정서, 홍범도의 대한독립군단으로 편성하고, 무기구입과 징병방안 등을 강구하기 시작했으나 아직 전투준비가 많이 부족해 구체적인 군사전략을 계획하지는 못한 상태였다. 그런 와중에 홍범도 등의 대한독립군단이 봉오동에서 일본군대를 공격하니, 이에 자극받은 일본제국군대는 만주에 기반을 둔 한인 독립군의 무장투쟁의 싹을 조기에 잘라버리기 위해 만주의 실권자 장쭤린과 야합해 압록강과 두만강 넘어 중국령 간도 일대에 대해 대규모 정규군사작전인 소위 ‘간도 불령선인 초토작전’을 획책하고 함경도 나남에 주둔하고 있던 일제 19사단을 중심으로 증강된 사단 규모의 정규군대를 투입했다. 이로 인해 압록강 북쪽에 있던 신흥무관학교가 중심이된 서로군정서는 아직 총 한자루 탄약 한발도 무장하지 못한 상태에서 목총만 들고 백두산 서쪽 안도현으로 강요에 의한 부대이동을 해 은거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두만강 방면 김좌진의 북로군정서는 9월이 돼서야 겨우 체코군단으로부터 무기와 탄약을 구매할 수 있었지만 말단 부대를 지휘해야 할 사관생도 훈련은 채 마치지도 못한 상태에서 조기에 수료를 하고 백두산 동편의 청산리로 강요에 의한 부대이동을 해야 했다."
-봉오동전투의 독립운동사, 군사전략적 의미는.
"봉오동전투는 독립운동사적 의미로 보면 경술국치 후 최초의 한인독립군과 일제 정규군과의 충돌이라는 역사적 의의를 갖고 있고, 그 하나만 뚝 떼어서 보면 승리의 전투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1920년 독립전쟁 원년 전투 전체의 맥락에서 보면, 만주 한인독립군들이 전투력을 갖추고 전체적인 군사전략을 준비하기 이전 조기에 일제를 자극함으로써 결국은 독립전쟁 초기부터 일제의 강압에 주도권을 빼앗긴 사건이었다. 군사작전에서 주도권은 부대에게 행동의 자유를 보장해 전세를 매우 유리하게 이끌어 갈 수 있게 하는 능력을 준다. 특히 만주와 같은 광활한 지역에서 소수의 한인독립군에게 주도권은 매우 중요하나 초전부터 주도권을 박탈당하고 말았다. 이로 인해 결국은 1920년말 ~ 1921년 초에 거의 대부분 한인독립군이 만주지역을 이탈해 연해주와 이후에는 시베리아 깊숙한 자유시로 밀려갈 수밖에 없게 됐다. 결과적으로 봉오동전투는 군사적 관점에서 보면 전술적으로는 승리의 전투이나, 전략적으로는 큰 패착일 수밖에 없었다."
-홍 장군의 군사전략적 과오가 또 있는가.
"홍장군의 두 번째 과오는 청산리 포위망 탈출 후 만주와 연해주 국경선 상의 밀산에 독립군들이 재집결했을 때 극동지역의 볼셰비키들이 요구한 자유시로의 부대이동에 찬동했다는 사실이다. 이범석 장군이 말한대로 만주를 넘어서 아무르강 북방 시베리아 깊숙이 위치한 자유시로의 이동은 한인 독립군들이 러시아 공산혁명 전위대 역할로 전락할 수밖에 없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러시아공산당이 한국독립군을 자유시로 이동시킨 배경을 살펴보면 그들의 의도를 금방 눈치챌 수 있다. 자유시는 러시아말로 ‘스보보니드’이며 ‘자유’라는 뜻이다. 자유시는 정치적으로 극동지역에서 볼셰비키 혁명이 ‘최초로 성공한 해방의 도시’로 극동 전체의 볼셰비키 혁명의 발진기지라는 상징성을 갖고 있다. 그리고 군사전략적으로 자유시는 일제의 영향력이 아직 한만국경을 넘지 못한 상황에서 한국독립군이 열망하는 대한독립과는 전혀 상관없는 러시어 영내의 깊숙한 지역이다. 따라서 자유시 입성은 이범석 장군이 간파한 대로 한인독립군을 러시아 혁명의 전위대로 탈바꿈시켜 향후 극동지역의 볼셰비키 혁명의 선봉에 서게 하겠다는 의미이다. 일부 학자들이 주장하는 한인독립군에 대한 군권장악 갈등론은 표면적 이유에 불과하다. 이르쿠츠크파나 상해파 그 누가 군권을 가지든 그 목적은 볼셰비키혁명 전위대로의 전환이었다. 러시아공산당이 무장해제를 요구한 것은 이유가 무엇이건 간에, 한인 독립군 입장에서는 전투력을 완전히 박탈당한다는 것으로, 이는 군인에게서 총을 빼앗는 것으로 향후 항일무장투쟁을 자의적으로 할 수 없게 된다는 치욕과 좌절감을 가질 수밖에 없는 처사이기에 무장군인이라면 당연히 이에 대항하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전투력이 열세한 대한독립군은 당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자유시 이동은 부하들을 사지로 내몬 결과로 이어졌다. 직접적인 독립군 괴멸 명령을 러시아 공산당에서 내렸다 하더라도 부하들을 사지로 몰고 간 것은 지휘관의 무능과 무책임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 이는 홍장군이 범한 가장 결정적 군사전략적 과오다."
-자유시 참변을 다른 독립운동가들은 어떻게 평가했나 .
"이 당시 상황을 철기 이범석장군이 회고록 ‘우둥불’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고국을 떠나 멀리 타국에서 오직 일본군과의 영웅적인 투쟁만을 꿈꾸며 추위와 굶주림을 견뎠던 독립군이 난데없는 공산주의 간 투쟁에서 몰살당하였다. 당시 독립군에는 50살이 넘은 한말 의병 출신들로부터 열대여섯살 난 러시아 교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독립군 병사들이 있었다. 그들은 영문도 모른 채 희생당하였다.’ 과연 이러한 희생에 대한 책임은 도대체 누가 져야 하는가? 홍장군이 명령을 내렸고 직접 공격에 가담하였다거나 재판에서 중형을 내렸다 등의 확인되지 않은 설보다 더욱 중한 것은 결국 홍 장군은 당시 독립군 최고위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다는 것이고, 이 비극의 책임은 결국 최고 책임자가 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홍장군 한사람에게 책임을 모두 지울 수는 없을 것이나, 최고 책임자로서 홍장군은 후에 이에 대한 책임 통감보다는 레닌을 만나고 공산당에 입당해 소련군 대위로 임관하는 길을 선택했다. 일부에서 이야기하듯 홍범도가 사태를 따지기 위해 레닌을 만났다라는 주장은 군사전략적 능력이 부족한 홍범도를 고려할 때 이해하기 힘든 주장이다. 이 사태에 대해 책임을 통감하고 자결하신 분이 없었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도 있을 것이나, 당시 대종교 계열의 북로군정서 최고의 정신적 지도자 서일 선생은 1921년 6월의 참변 이후 두 달이 경과한 후인 8월에 독립군 대토론장이었던 밀산에서 호흡중지의 기법으로 참변에 대한 책임감을 통감하고 자결하셨다. 독립기념관 내에는 그의 어록으로 ‘조국광복을 위하여 생사를 함께 하기로 맹세한 동지들을 모두 잃었으니 무슨 면목으로 살아서 조국과 동포를 대하리오. 차라리 이 목숨 버려 사죄하는 것이 마땅하리라’라고 기록돼 있다. 홍장군은 서일 선생으로부터 한참을 배워야 하고, 그 면에서 오히려 서일 선생이 육사 교정에 더 적합한 인물이 아닌가라는 주장이 나올 수도 있다."
-홍 장군의 러시아 공산당 입당이 고려독립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주장이 있다.
"홍 장군의 이력서에서 보이는, 본인이 추구하는 고려 독립과 러시아 공산당 입당과의 연관성을 짚어 보면 홍장군이 염원하는 고려 독립은 볼셰비키 공산주의 국가로의 독립으로 보아야 한다. 이는 우리가 추구하는 국가 이념과 일치하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홍장군에 대해서는 독립영웅으로서 국가 차원에서 폭넓게 그 뜻을 기리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후손의 사명일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육사에서 홍장군을 기린다는 것은 사관생도 교육이라는 목적에서는 무리다. 사관학교는 기념관이나 박물관이 아니라 교육현장이다. 모든 사관학교의 정책은 생도들의 가치관 형성에 일관성있는 조치이어야 한다. 사관생도를 포함한 군인이 반드시 심득해야 할 ‘군인기본법 제5조 강령’을 보면, ‘국군은 국가 방위와 자유민주주의 수호에 이바지’하고, 또, 이를 위해 함양하기 위한 ‘6대 군인정신’으로 ‘명예존중’, ‘충성심’, ‘진정한 용기’, ‘필승의 신념’, ‘임전무퇴 기상’, ‘책임완수’를 강조하고 있다. 또 육사의 교육 목표 중 하나가 ‘자유민주주의 수호 위한 정예장교 양성’이고, 육사생도들은 졸업시 임관선서로 ‘국가와 국민에게 충성’, ‘헌법을 준수’, ‘책임완수’라는 항목을 국민들에게 약속한다. 특히, 6대 군인정신의 결론은 ‘책임완수’이다. 책임완수는 군인이 걸어가야 할 길의 시작이자 종착역이다. 육사교정에 세워진 강재구, 심일, 안중근 동상은 그 책임완수를 위한 살신성인의 결정판들이다. 6·25 후 육사 재건에 공이 컸던 밴플리트 장군에 대한 보은의 동상은 예외이다. 아무래도 홍범도 장군의 이력은 ‘자유민주주의 수호’나 ‘책임완수’ 항목에서 사관생도에게 의문을 줄 수밖에 없다. 1920년대 홍장군이 보여주었던 일련의 군사전략적 과오들과 책임완수라는 덕목의 결함은 아무리 좋게 평가해도 육사생도들 가치관 형성에 적합하지 않다는 결론이다."
-홍 장군의 공산주의 경력이 북한 노동당과는 다르다는 반론도 있다.
"홍 장군의 공산주의가 지금의 북한 노동당과는 목적과 성격의 차이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대일항쟁 일환 성격이 크다는 의미다. 예를 들어 지청천도 자유시로 이동시 홍범도에 동조해 이동했다. 이로 인해 상당 기간 지청천 장군이 사회주의자라는 인식이 강했던 것도 사실이다. 이범석장군도 자유시로의 부대이동에 동행하지 않고 만주로 넘어갔다가 나중에 다시 연해주 수창 일대에서 잠시 러시아 적백내전시 적계 러시아군과 합동민족군의 연합기병대장으로 일본 시베리아 파병군과 백계러시아 연합군에 대해 항일무장투쟁한 바가 있다. 하지만, 이는 항일무장 투쟁의 수단이었고 후에 중경 임시정부에 합류하고 광복 후에는 신생 대한민국 국군 건설의 주역이 된 것이다. 홍장군은 불행히도 마지막이 그러하지 못한 것이 몹시 아쉽다. 또한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홍장군의 고려독립은 그의 소련 공산당 입당과 연결시켜 봤을 때 그 종착점이 볼셰비키 혁명 완수로 결국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한민족이 가장 대일항쟁이 필요한 1921년부터는 항일무장투쟁 대오에서 벗어나 러시아 공산당 입당과 소련군 대위로 임관해 공산주의사회 건설에 매진했다는 것은 육사의 정예장교단 양성과는 어울리지 않는 경력임에 분명하다."
정충신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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