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사기 때문에 애 못 낳아”…빌라왕 사망 1년, 어둠은 짙어졌다
2,30대 전세 사기 피해자들 “저출산 대책에 돈 쓰면 뭐하냐”
정부 정책이 전세사기 잉태…피해 반복돼 근본적 해결책 필요
빌라왕은 떠났지만 전세사기는 끝나지 않았다. 대책이 쏟아졌지만 피해자들은 “실질적으로 도움을 받지 못했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2,30대인 피해자들은 전세사기 피해로 인해 결혼과 출산을 포기했다고 털어놨다.지난해 10월 12일 오전, 서울 종로구의 한 모텔방에서 장기 투숙하던 40대 남성이 숨진 채 발견됐다. 이른바 ‘빌라왕’으로 불린 김모(사망 당시 42세) 씨로, 그에게 전세 사기 피해를 입은 세입자가 1000명이 넘었다.
김씨가 소유했던 주택은 1500채, 피해자만 1244명에 피해액은 2312억 원에 달한다.
13일 연합뉴스는 빌라왕 사망 1년이 지난 지금, 전세사기 피해의 현실을 조명하기 위해 각기 사는 곳과 피해 유형이 서로 다른 4명의 피해자와의 인터뷰를 전했다. 전세사기 피해지원 특별법까지 제정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피해자는 1년 전 그 자리에 멈춰 있었다. 피해는 ‘현재 진행형’이다.
유모(31) 씨는 2020년 5월, 서울 강서구 화곡동의 6층짜리 빌라 1층에 보증금 1억6000만원을 주고 전세로 들어갔다. 계약한 지 한달이 채 안 돼 빌라왕 김씨로 집주인이 바뀌었고, 김씨는 보증금을 내주지 않고 ‘차라리 집을 사 가라’고 버텼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해당 빌라는 불법 건축물인 ‘근생 빌라’였다. 매년 거액의 이행강제금(건물 시가표준의 10%)까지 내야 하는 상황. 근생빌라는 정부 지원책과 특별법이 미치지 않는 사각지대에 있다.
유씨는 “마음에 분노가 쌓여 예민해지고 신경질적으로 변했다”며 “사람 자체를 못 믿게 돼 이제는 친구도 잘 안 만난다”고 했다.
결혼하고 아이 낳고 싶다는 꿈이 있었지만 산산이 깨져버렸다. 전세사기 피해자들이 모인 카카오톡 대화방에는 출산을 보류하게 됐다는 글이 자주 올라온다고 한다.
유씨는 “정부가 저출산에 몇조원씩 쏟아부으면 뭐 하나요. 전세사기를 당한 20∼30대는 결혼, 출산 계획이 다 망가져 버려요. 전세사기가 결국 저출산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이라 일갈했다.
2020년 10월, 신혼집으로 경기 수원 장안구 신축 빌라에 보증금 2억5천400만원 전세로 들어간 배소현(28) 씨는 전세 사기 당한 것을 알고 아기를 가지려던 계획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보증보험도 소용 없었다. 배씨가 들어간 빌라 집주인은 전세계약 직후 김씨로 바뀌었고, 계약 만료 직전 김씨가 숨졌다. 주택도시보증공사(HUG)에서 보증금을 받으려면 임대인에게 계약 해지를 통보하고 임차권 등기를 마쳐야 하는데, 김씨가 사망하면서 모든 절차가 중단돼 버린 것.
2년 전 오피스텔 사기를 당한 이철빈(29)씨는 지금 지식을 갖고 2년 전으로 돌아간다 해도 전세사기 피해를 면치 못했을 것 같다고 했다. 부동산 IT 스타트업에서 일하는데다 계약 전 등기부등본과 건축물대장을 꼼꼼히 살폈던 그였다.
백이슬(34) 씨는 전세 사기 피해 때문에 한때 나쁜 생각까지 했지만 ‘혼자 죽느니 얘기는 해보고 죽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인생을 뒤흔든 사건 앞에 결혼과 출산은 사치일 뿐이다. 어서 결혼하라고 밀어붙였던 백씨 어머니도 이제 ‘너 하나 먹고 살기도 힘들고, 앞날을 모르는데 어떻게 아이를 낳겠느냐’며 이해해 준다고.
그는 “저야 선순위 임차인이라 길거리에 나앉는 일이 없는데도 이 정도인데, 빚만 있는 채 쫓겨나게 된 피해자 누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겠느냐”면서 “언제 돈을 벌고 대출을 갚아 다시 ‘0원’에서 시작할 수 있을지 막막하다”고 말했다.
죽어서도 놓아주지 않는 망령처럼 빌라왕의 영향력은 같은 수법을 반복하는 ‘또 다른 빌라왕’과 부동산 업자들에 의해 반복되고 있다. 피해자 백씨의 사촌오빠와 사돈댁까지 연달아 전세 사기 피해를 봤고, 최근 경기도 수원에서 대규모 전세사기가 터졌다.
경매에서 ‘셀프 낙찰’받는 것이 차선책이지만 아직까지 김씨의 상속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피해자들은 ‘정부가 대책을 마련했다고 하지만 실질적으로 와 닿는 게 별로 없다’고 말한다. 그나마 전세대출 만기 연장과 저리 대환대출이 그나마 피해자들을 지탱시켜주고 있는 실정.
백이슬씨는 “이런 일을 가능케 한 국가가 사기를 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고 울분을 토했다. 이철빈씨는 “정부가 더는 미봉책, 땜질식 처방으로 끝낼 게 아니라 종합적인 예방·관리·감독 대책을 마련할 때”라고 바람을 전했다.
서다은 온라인 뉴스 기자 dad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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