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가 망해야 돈을 번다’…극단 대결을 이끄는 세력들[윤다빈의 세계 속 K정치]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 당선의 주역이었던 스티브 배넌 전 미국 백악관 수석전략가는 2019년 ‘워룸(War Room)’이라는 극우 성향의 팟캐스트를 만들었습니다. 그는 미국 워싱턴 D.C. 국회의사당 인근 건물에 방송국을 차리고 주 6일에 걸쳐 하루 4시간씩 생방송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워룸은 미국 팟캐스트 순위 100위 안에 꾸준히 들어가는 인기 프로그램입니다. 정확한 청취자 수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배넌은 팟캐스트 출범 1년도 안 돼 누적 다운로드 수가 1억 회를 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트럼프 전 대통령의 극렬 지지층 ‘마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세력을 대변하면서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투표용지 오염 등 부정선거 음모론을 내세우면서 트럼프가 패한 2020년 대선 결과가 조작됐다고 주장했습니다. 그의 허위 정보 수준이 도를 넘자 유튜브, X(옛 트위터)는 계정을 차단한 상태입니다.
뉴욕타임스(NYT) 등 미국 언론은 헌정사상 초유의 하원의장 해임 사태 역시 그가 진두지휘했다고 분석합니다. 그는 공화당 내에서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던 맷 게이츠(플로리다) 하원의원을 팟캐스트에 꾸준히 출연시키면서 해임 전략을 짰습니다. 미성년자 성관계, 불법 약물 복용 혐의 등으로 미 연방수사국(FBI) 조사를 받았던 게이츠 의원은 그의 꼭두각시 노릇을 자임했습니다.
3일(현지 시간) 해임안이 가결된 뒤 배넌은 게이츠 의원을 비롯해 해임안 가결표를 던진 공화당 의원들을 방송에 출연시켜 “매카시 해임의 설계자이자 영웅”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청취자에게 방송 중 모금을 독려하는 것도 잊지 않았습니다. 마가 세력을 선동하고 이들을 통해 막대한 돈을 버는 ‘배넌식 생태계’를 완벽히 구축한 것입니다.
● 극우 매체 만들어 음모론 퍼트린 배넌
대화와 타협을 바탕으로 현대 민주주의의 중심임을 자부해온 미국 의회에서도 강경파에 의한 극단 정치가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대안 없이 하원의장을 축출하면서 우크라이나 전쟁 지원, 내년도 예산안 처리 등 의회 기능이 사실상 마비된 상태입니다. 이러한 대결 정치의 중심에 미국 극우 매체들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배넌은 2007년 인터넷 매체 ‘브레이트바트’를 창간했습니다. 이 매체는 백인 우월주의, 반페미니즘, 외국인 혐오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극우 정치 세력의 확성기 역할을 했습니다. 2012년 배넌이 본격적으로 경영을 맡은 뒤에는 정치 분야에서 허위 정보를 적극 생산했습니다.
오바마 행정부 때는 오바마 대통령이 케냐 태생의 무슬림이라거나 그가 테러리스트를 지원했다는 허위 정보를 퍼트렸습니다.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는 트럼프 후보를 적극 지지하면서 경쟁자인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 후보가 뇌 손상으로 문제를 겪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매체는 이민자, 흑인에 대한 공격적인 기사를 바탕으로 영국, 독일, 이스라엘 등에도 지부를 만들어 전 세계적인 극우 미디어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세계 곳곳에 대결 정치의 씨앗을 뿌리는 동안 이를 만든 당사자는 돈벌이로 배를 불리는 중입니다.
배넌은 2020년 미국 남부에 ‘우리가 장벽을 세운다(We Build the Wall)’는 캠페인을 펼쳐 크라우드 펀딩으로 26만 명에게 2500만 달러(약 334억 원)를 모금했습니다. 그는 이 돈을 이민자 차단용 국경장벽 건설에 사용할 것처럼 홍보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100만 달러(약 13억 원) 이상을 사치품 구매 등 개인적인 목적으로 사용했다는 혐의로 체포돼 재판을 받았습니다.
극단 지지층을 동원해 번 돈으로 배넌의 호화 생활은 이어지고 있습니다. 미 언론에 따르면 그는 지난해 1월 미국 애리조나주에 136평 규모로 침실 4개, 손님용 공간 6개가 딸린 주택을 155만 달러(20억 원)에 산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는 2021년에는 ‘1·6 의회 폭동 사태’를 조사하는 하원 특별위원회에서 소환 통보를 받았으나 이에 불응하고 증언을 거부해 의회를 모욕한 죄로 징역 4개월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러나 트럼프 전 대통령 퇴임 19시간 전 사면을 받아 활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김어준 돈벌이 생태계’에 갇힌 민주당
배넌의 활동은 K정치에서도 묘한 기시감을 불러일으킵니다. 한국의 극단 성향 유튜버들과 상당 부분 닮았기 때문입니다.
친야 방송인 김어준 씨는 2012년 박근혜 후보가 승리한 18대 대선 당시 부정 개표를 주장했습니다. 안희정·오거돈·박원순 등 민주당 소속 광역단체장들의 성범죄 행위가 드러나자 미투(MeToo·나도 당했다)’ 운동이 문재인 정부 분열 공작에 이용될 수 있다는 비상식적인 주장을 펴기도 했습니다. 서울 서초구 서이초등학교 교사 사망 사건 때는 국민의힘 3선 의원이 연루됐다는 허위 사실을 유포했습니다.
논란을 일으킨 야권 인사들을 방송에 대거 출연시켜 검증되지 않은 주장을 퍼트리기도 했습니다. 국회 상임위원회 회의 도중 코인 거래를 했던 김남국 의원, 자녀 입시 비리 혐의 등으로 1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딸 조민 씨, 고(故) 장자연 씨 사건의 유일한 증언자를 자처하다 거짓 증언과 기부금 전용 의혹을 받은 배우 윤지오 씨가 찾은 곳도 바로 김어준 방송이었습니다.
김남국 코인 게이트 당시 “진보는 돈 벌면 안 되냐”는 본질과는 다른 화두를 던졌던 김어준 씨는 그의 말을 실천하면서 돈벌이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그는 TBS 라디오 회당 출연료가 200만 원에 달하는데도, 별도의 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은 채 방송에 출연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 기간 김 씨가 벌어들인 수익이 총 23억 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됐습니다.
친야 성향 인물을 방송에 대거 투입시키면서 그의 유튜브 방송 조회수는 평균 100만 건에 달합니다. 그가 올해 1월 새로 만든 유튜브 방송은 첫날 하루에만 3000만 원에 달하는 ‘슈퍼챗’ 이익을 거둬 당일 전 세계 유튜브 채널 중 가장 많은 이익을 얻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지난해에는 여론조사 업체를 직접 차려 총선 관련 여론조사를 주기적으로 실시하고 있습니다. 그는 여론조사 분석을 대가로 회원제 멤버십을 운영하면서 구독자들에게 1년에 10만원씩 회비를 받고 있습니다.
그의 영향력은 날로 커지고 있습니다. 민주당 정청래 의원 등이 김 씨 업체의 여론조사 결과를 당 최고위원회에서 언급하는 등 확성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정치 뉴스 생산과 유통을 통한 돈벌이 시스템을 완벽히 구축한 모양새입니다.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는 올해 2월 ‘정치 무당 김어준’ 책에서 김 씨에 대해 “한국 현대 정치사에서 가장 막강한 권력을 누린 정치평론가”라면서 “한국인의 증오와 혐오 본능에 불을 지름으로써 정치를 선악 대결 구도로 몰아간 방화범”이라고 지적했습니다.
● 보수 유튜버 중용하는 尹정부
이러한 행태는 보수 세력에서도 비슷하게 보여집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이후 우파 성향의 일부 시민들은 기존 언론에 강한 불신을 토로했습니다. 이들은 대거 유튜브로 유입됐고, 보수 유튜버들에게는 더 없이 좋은 환경이 조성됐습니다.
일부 보수 유튜버들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당시에 태블릿PC 조작설 등 각종 음모론을 설파했습니다. 선거 때마다 사전투표 부정론을 내세워 보수층의 투표 불신을 쌓아갔습니다. 미래통합당은 2020년 총선에서 극우 성향의 사랑제일교회 전광훈 목사와 사실상 정치적 연합을 맺으면서 대패하기도 했습니다.
극우 유튜버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은 채 또다시 중국 공산당 해커가 개입했다는 등의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일부 극우 유튜버들은 월 1억 원이 넘는 수익을 올리면서 극단 정치의 수혜자로 등극했습니다.
오죽하면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가 언론 인터뷰에서 “지금까진 내가 참았는데 앞으로는 보수 유튜버들과 싸우려 한다”며 “전부 돈 벌어먹으려고 하는 놈들”이라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윤석열 정부가 출범한 이후에는 극우 유튜버로 대변되는 강성 지지층과 명확히 선을 긋지 못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윤석열 정부는 강성 유튜버 출신 인사를 중용하고 있습니다.
북한 체제 전복 등 강경 대북관을 가진 김영호 통일부 장관은 별도 사무실을 차리고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며 약 3억7000만 원 수익을 냈던 인물입니다. 신원식 국방부 장관은 2019년 유튜브 방송에서 전두환의 12·12 쿠데타를 “나라를 구하려고 나온 것”이라고 발언해 비판을 받았습니다.
김채환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장 역시 구독자 50만 명이 넘는 강성 보수 성향의 ‘김채환의 시사이다’ 채널을 운영했습니다.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건 당시 촛불시위에 중국인이 대거 참여했다고 주장해 물의를 일으켰습니다. 강승규 대통령실 시민사회수석은 대통령 핵심 참모 신분으로 보수 유튜브에 출연한 바 있습니다.
여권 내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지만 국정 운영의 기조가 달라질지는 의문입니다. 국민의힘 관계자는 “대통령이 이념 논쟁을 비롯해 일반 국민 관심과는 동떨어진 소위 ‘그들만의 리그’에 너무 큰 관심을 보인다”며 “문제는 대통령 스타일상 앞으로도 이런 기조가 달라질지 알 수 없다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한국 정치의 수준은 왜 나아지지 않는가?’라는 주제로 글을 쓰고 있습니다. 대통령, 국회의원 선거를 각각 두 번씩 취재하며 가진 의문을 해외 정치와 비교하면서 정리하고 있습니다. 여야가 특수이익집단 패거리로 뭉쳐서 상식을 배척하는 상황에 대해 지적해주신 독자님께 감사드립니다. empty@donga.com으로 독자 여러분의 소중한 의견을 기다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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