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진 펀딩 시대는 끝났다…밸류체인 확장 여부에 성장 판가름” [헤럴드 기업포럼 2023]
최근 세계 경제의 화두로 ‘고금리’와 ‘탄소중립(넷제로)’이 꼽힌다. 인플레이션 장기화로 ‘3고(고환율·고물가·고금리) 리스크’가 세계 경제를 짓누르고 있다. 이미 고강도 긴축을 단행한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는 추가 긴축의 고삐를 죄면서 투자심리도 끌어내리고 있다. 여기에 미-중 경제패권 전쟁, 각국의 친환경 정책까지 더해지며 글로벌 공급망마저 흔들리고 있다. 기술주도권을 확보하고 새로운 투자 기회를 찾으려는 경쟁 속에 ‘그린 비즈니스’는 살아남기 위한 과제로 떠올랐다.
헤럴드경제는 불확실성이 커지는 시장에서 한국 자본시장과 정부가 어떤 기회를 모색해야 하는지 각 분야 전문가에게 묻고 듣는 토론회를 개최했다. 12일 오후 서울 중구 신라호텔에서 ‘기업의 신사업확대를 위한 그린 비즈니스 투자 및 M&A 전략’을 주제로 열린 토론회에는 정재훈 맥킨지앤드컴퍼니 파트너, 이상현 스틱인베스트먼트(PE부문) 파트너, 최원진 JKL 파트너스 부사장, 원종현 국민연금 투자정책전문위원회 위원장, 최진석 한국투자공사 책임투자팀장, 허준녕 GS벤처스 대표이사가 참석해 머리를 맞댔다.
▶“韓 그린비즈니스 기술력, 세계 상위권 수준”=전문가들은 그린 비즈니스는 밸류체인도 다양해 전후방 산업의 낙수효과도 이어질 것으로 주목했다. 특히 최근 몇 년 새 가파르게 성장한 그린 모빌리티가 대표적이다. 이상현 스틱인베스트먼트 파트너는 “화석 연료에서 친환경 에너지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그린 모빌리티의 성장세가 돋보인다”며 “모빌리티는 (각 정부가 보급) 목표시기를 정하고 강력한 친환경 정책을 펼치면서 글로벌과 국내 모두 빠르게 성장하는 중”이라고 분석했다.
이상현 파트너는 “그린 모빌리티는 완성차 등 특정 영역에만 국한된 게 아니라 부품, 소재 등 전후방위적으로 넓은 밸류체인을 형성하고 있다”며 “낙수효과는 중요한 요소인데 차량산업이 성장하면 뒷단에서 전기차 충전이나 배터리 리사이클링사업 등 인프라도 함께 성장하는 선순환이 이뤄지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국내 시장 경쟁력에 대해선 “이미 최고 수준 제품력을 확보하고 다수의 친환경차 OEM(주문자상표부착생산)과 배터리셀업계와 협력해 글로벌 밸류체인을 주도할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린 비즈니스 생태계에선 응용기술뿐만 아니라 핵심 자원을 선점하는 것 역시 중요한 과제다. 최원진 JKL파트너스 부사장도 “모빌리티 전기화와 신재생에너지는 피할 수 없는 트렌드”라며 “우리가 배터리산업의 핵심 광물인 구리를 주목한 이유”라고 설명했다. JKL파트너스는 지난해 5월 LS그룹과 손잡고 국내 최대 비철금속 제조업체인 LS MnM의 바이아웃(경영권 인수) 딜을 성사한 바 있다.
그린 비즈니스로 공급망이 재편되는 흐름에서 LS MnM이 구리·금 생산뿐 아니라 배터리·반도체 소재를 아우르는 밸류체인을 구축하는 데에 경쟁력이 있다고 본 것이다. 이와 관련해 최원진 부사장은 “LS MnM은 이차전지 핵심 광물인 니켈을 생산해냈고 전구체로 이어지는 밸류체인 수직화를 완성할 계획”이라며 “이 같은 사례는 우리가 그린 비즈니스를 바라보는 투자 방향이고 플랫폼으로 활용하며 거대 기업으로 탈바꿈하는 과정을 도울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린 비즈니스 생태계에선 기술력을 융합하는 힘도 중요해졌다. 단순히 벤처투자 단계를 넘어서 이제는 벤처 네트워크의 기술을 연결해 신사업으로 구체화하고 때로는 경쟁사와의 협력으로 판을 키우는 전략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허준녕 GS벤처스 대표이사는 B2C보다 B2B 사업이 많은 그린 비즈니스의 경우 이 같은 흐름이 더 중요해질 것으로 내다봤다.
허 대표는 “대기업과 스타트업 간 협업이 주였던 오픈 이노베이션은 다른 대기업부터 심지어 경쟁사, PE가 투자한 회사들까지도 PoC(기술 검증) 협업이 확장 중”이라며 “이 중 유망한 기업은 우리가 그로스 투자로 인수할 수도 있지만 이 벨류체인 안에서 대기업이 할 수 있는 역할과 사업 영역을 찾는 게 우리의 핵심 고민”이라고 말했다.
▶“청사진 ‘펀딩’ 시대 끝났다…촘촘한 분석 필요”=그린 비즈니스를 필두로 한 ESG(환경·사회·지배구조)시장은 코로나 팬데믹 동안 급성장하면서 오늘날 성장통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특히 고금리와 전쟁은 ESG 회의론에 불을 붙였다. 우크라이나 전쟁에 이스라엘-하마스 전쟁까지 벌어지면서 에너지 등 전 영역의 비용이 오르고 고금리 기조 장기화로 자금 조달 여건도 악화되는 상황이다. 고유가 상황에서 화석 연료 투자의 수익성이 높다는 점도 투자자로서 무시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이 때문에 그린 비즈니스 역시 청사진만으로 투자금을 끌어모았던 시기는 끝났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이상현 파트너는 “과거 그린 비즈니스는 펀더멘털에 기반을 둔 밸류에이션보다 성장성에 초점을 많이 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제는 금리인상 등 전체적인 매크로 환경이 악화하고 장기화할 가능성이 크다. 펀딩 자체가 어려워지고 있는 상황”이라며 “중장기적으로 J커브 구간을 어떤 식으로 지나고 이익을 실현하는지 등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KPI(성과지표)나 마일스톤(단계적 경영 성과) 등을 상당히 잘 준비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린 비즈니스가 커질수록 사회(S)와 지배구조(G) 등 함께 고려해야 할 요소도 다양해질 수 있다는 진단도 나왔다. 최진석 한국투자공사 책임투자팀장은 “미국 최대 태양광 모듈업체인 퍼스트솔라(FSLR)의 경우, IRA(미국 인플레이션 감축법)의 최대 수혜기업으로 투자자들의 관심도 컸다. 하지만 최근 말레이시아 공장에서 노동자들이 강제노동 등 열악한 환경에서 근무해온 사실이 밝혀지면서 친환경으로 쌓아온 기업 평판을 훼손한 사례가 있다”며 “테슬라도 인종차별, 비즈니스 행동규범 부재 등을 이유로 ESG지수에서 퇴출됐다가 다시 편입됐는데 이런 현상들이 글로벌 시장에서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고 분석했다.
원종현 국민연금 투자정책전문위원회 위원장도 “그린 비즈니스로 전환하면서 석탄산업 등 기존 인력에 대한 정의로운 전환(Just Transition)도 함께 고려해야 할 지점”이라고 했다. 그린 비즈니스를 육성하기 위한 정책 제언도 잊지 않았다.
그는 미국의 IRA법과 같이 “앞으로는 어떤 정부가 기술 경쟁력을 토대로 선도적으로 시장 기준을 제시하고 규칙을 만들어 가느냐가 중요해질 것”라며 “이미 국내 기업들의 그린 비즈니스 기술은 세계 수준보다 우월한 만큼 이제는 팔로워가 아닌 시장 기준을 제시해보는 시도도 필요하다. (이를 위해선) 국내 기업을 위한 충분한 세제 혜택, 지원정책도 선제적으로 뒷받침해줘야 할 것”이라고 제언했다.
유혜림·김은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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