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에 ‘빌런’이 필요한 이유[책과 삶]

허진무 기자 2023. 10. 13.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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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적 모험 통한 내면 변화 과정
고대 신화부터 현대 예능프로까지
역경을 딛고 성공하는 서사의 힘
판타지 소설이 원작인 영화 <반지의 제왕>의 한 장면. (주)디스테이션 제공
고대 그리스의 서사시 <오디세이아>의 주인공 오디세우스가 세이렌의 유혹을 물리치는 장면. 위키피디아

세상은 이야기로 만들어졌다

자미라 엘 우아실·프리데만 카릭 지음 | 장성주 옮김 | 원더박스 | 568쪽 | 2만7000원

“팝니다. 아기 신발. 한 번도 안 신었습니다.(For sale: baby shoes, never worn.)”

미국 소설가 어니스트 헤밍웨이에게 어떤 작가가 ‘여섯 단어로 사람을 울릴 수 있는 이야기를 쓸 수 있느냐’고 내기를 걸자 식당 냅킨에 썼다는 이야기이다.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인 셈인데 사실 이 이야기의 진위 여부는 불분명하다. 헤밍웨이가 작가가 되기 전부터 존재했던 이야기로 보인다. 하지만 세간에는 헤밍웨이가 쓴 ‘세상에서 가장 짧은 소설’로 유명해져 언론, 강연, 저술 등에 널리 인용됐다.

우리는 왜 이야기를 할까. 독일의 작가이자 팟캐스트 진행자인 자미라 엘 우아실과 프리데만 카릭은 <세상은 이야기로 만들어졌다>에서 이야기의 역사와 권력을 살펴본다. 저자들은 이야기의 힘 덕분에 인류가 문명을 이루고 사회를 발전시켰다고 본다. 고대 그리스의 서사시 <일리아드>부터 판타지 소설 <반지의 제왕>은 물론 페이스북·인스타그램·틱톡 등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까지 분석의 대상이다.

저자들은 첫번째로 인간이 왜 이야기의 영향을 많이 받는지 추적한다. 미국의 신화학자 조지프 캠벨은 1945년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에서 수천 가지 신화와 전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도식을 확인해 ‘단일신화(Monomyth)’라고 불렀다. 바로 육체적 모험인 외적 여정을 떠나며 정신적 발견인 내적 변화를 이루는 것이다. 캠벨은 영웅 신화의 근원이 문화적으로 비슷한 인간 심리에 있기 때문에 공통적인 단일신화가 나타난다고 봤다.

저자들은 여러 서사 이론을 설명한다. 조지프 캠벨의 ‘영웅의 여정’ 17단계, 커트 보니것의 ‘신데렐라’ 그래프 등이다. 영웅은 모험을 통해 괴물을 물리치고 사랑에 빠지고 보물을 찾는다. 저자들은 “영웅은 소원과 욕구 성취에 대한 희망을 구현한다”며 “우리는 영웅과 관계를 맺고 자신을 영웅과 동일화하고 결합하면서 우리 자신의 문제와 희망, 가치를 이해하려고 노력한다”고 적었다.

저자들은 두번째로 이야기가 어떻게 사회의 모습을 형성하고 얼마나 많은 피해를 끼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우리는 영화나 소설뿐 아니라 언론, 교육, 광고에서도 이야기를 발견할 수 있다. 언론은 재난이나 재해가 일어나면 영웅과 의인을 찾아다닌다. 언론이 조명한 영웅은 사건 자체보다 더 대중의 관심을 받기도 한다. <슈퍼스타K> <프로듀스 101> <스트릿 우먼 파이터> 같은 경연 프로그램은 약자가 역경을 딛고 성장해 성공을 거머쥐는 서사를 만든다.

인기 경연 프로그램 <스트릿 우먼 파이터>의 한 장면. 경연 프로그램은 종종 약자가 역경을 딛고 성공하는 이야기로 시청자를 사로잡는다. 엠넷 유튜브 캡처
전두환 정권의 ‘서울 물바다론’을 실은 1986년 11월26일자 경향신문

흔히 빌런이라고 불리는 ‘적대자’는 주인공을 영웅으로 만들기 위해 필요한 존재다. 적대자 이야기가 정치적으로 이용되면 잔혹한 비극을 일으키기도 한다. 나치 독일은 대중의 지지를 얻고 국가 전체를 일체화하기 위해 유대인을 낙인찍고 학살했다. 1923년 일본에서 관동대지진이 발생하자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푼다’는 이야기 때문에 6000명이 넘는 조선인이 자경단에게 목숨을 잃었다.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은 북한이 대량의 물을 남쪽으로 흘려보내 서울을 공격한다는 ‘서울 물바다론’을 퍼뜨려 댐 건설을 위한 국민 성금 수백억원을 모았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널리 보급된 현대에 이야기의 힘은 더욱 강력해졌다. 스마트폰은 우리가 글자, 그림, 사진에 끊임없이 반응하고 표현하게 만들었다. 저자들은 SNS에서 특정 집단에 소속감을 느끼고 다른 집단을 공격하는 ‘부족주의’를 발견한다. “소셜 네트워크는 전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그러한 부족주의적 경향을 강화한다. 온라인 부족 안에서 자신의 소속감을 지키는 것은 상상으로 만들어진 ‘우리’라는 감정에서 생겨나는 자기주장과 정체성 형성의 표현이 된다.”

저자들은 마지막으로 어떤 이야기가 우리의 미래를 더 좋게 만들 수 있는지 탐구한다. 이 책은 각 장의 제목이 영웅 서사를 따르고 있는데, 마지막 12장 ‘묘약을 들고 귀환하다’에선 문화비평에서 정치적 논설로 한순간에 도약한다. 저자들은 코로나19와 기후변화를 예로 들어 인류가 위기 앞에서 변화할 순간이라고 호소한다. 현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너무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변화를 주저하게 하는 상황이며, 인류 자신이 자연에게 ‘적대자’임을 깨달아야 ‘주인공’으로 거듭나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 이야기를 잘못 전하고 있다는 단순한 깨달음을 얻으면 막다른 골목에서 되돌아갈 수 있다. 지구상의 거의 모든 비인간 생명체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이 행성의 주인공이 아니라 사악하고 잔인하며 위험한 수십억 생명의 적대자이다. 이러한 반성은 진정한 주인공이 되기 위한 첫걸음이다.”

허진무 기자 imagin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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