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제국 상징 지붕 위 3개 바늘탑… 근대 수탈 상흔 간직 [스페이스도슨트 방승환의 건축진담]

2023. 10. 13.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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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세관 역사 담긴 호남관세박물관
日, 대한제국 재정난에도 군산세관 건립
벨기에산 건축 자재 공수… 공들여 지어
신고전주의 양식 따라 ‘정면 대칭’ 강조
단층건물임에도 지붕 경사 높게 과장해
옛 세관 창고는 인문학공간으로 탈바꿈
예술인·소상공인·청년 모인 북카페로

우리나라 최초의 세관은 부산 동래부에 설립된 두모진 해관이다(1878년 9월29일). 하지만 조선정부와 일본 상인들 간의 무관세 문제로 두모진 해관은 3개월 만에 폐관됐다. 이 사건과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을 계기로 조선 정부는 관세를 관장하는 기관의 필요성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청나라의 도움을 받아 인천해관을 창설했다(1883년 6월16일).

첫 번째 해관 총세무사는 묄렌도르프가 맡았다. 그는 청나라 주재 독일영사관에서 근무하다 청나라의 세관사로 전직했다. 통리아문(統理衙門)의 참의가 된 묄렌도르프는 민영익과 함께 청의 초상국(招商局)으로부터 해관 창설 자금 21만 냥을 빌렸다. 이후 해관원을 모집했는데, 그중 프랑스인 라포트(羅保得)가 있었다.
군산세관 본관은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세관 건물 중 현재까지 남아있는 유일한 흔적이다. 그래서 우리나라 세관의 역사와 그 이야기를 만들어간 사람들을 기억할 단 하나의 장소이기도 하다.
인천, 원산, 부산을 시작으로 진남포, 목포, 마산, 성진 그리고 군산(1899년 5월1일)에 해관이 설치됐다. 당시 군산은 150가구 정도가 사는 한적한 어촌이었는데 개항 이후에는 한반도 쌀 수출의 80%를 도맡았다. 개항과 동시에 조계 조약이 체결됐고 이후 옥구감리서, 일본목포영사관 군산 분관, 경무서 등과 같은 기반시설 설치와 함께 시가지가 형성됐다.

1905년에는 대한제국의 자금으로 제1차 군산항 축항이 시작됐다. 이듬해 인천해관은 군산지사 청사 건립 계획을 수립했는데, 당시 대한제국의 재무를 총괄하던 탁지부의 건축소 산하 임시세관공사부가 담당했다. 이 시기에 재정 고문으로 온 메카다 다네타로(目賀田種太郞)가 총세무사를 겸임하면서 청나라 명칭이었던 ‘해관’이 일본에서 사용하는 ‘세관’으로 바뀌었다. 인천세관장에도 일본인이 취임했다. 이러한 변화와 함께 군산세관 본관(現 호남관세박물관)이 준공됐다(1908년 6월20일).

군산세관 본관을 두고 ‘대한제국의 관세 행정 기관을 물리적으로 보여주는 유일한 흔적’이라고 평가한다. 하지만 대한제국은 군산항 공사를 일정대로 진행하지 못할 만큼 재정난에 처해 있었다. 이런 사실을 감안하면 대한제국이 군산세관 본관 건립에 신경 쓸 여력은 없었다. 그럼에도 본관에는 벨기에로부터 수입한 벽돌과 건축자재가 사용됐고 제1차 세계대전 때 인질로 잡혀 온 독일인이 설계를 맡았다. 아마도 일본이 앞으로 자신들이 더 많이 쓸 건물을 대한제국의 재정으로 공들여 지은 것 같다. 그래서 지붕 위에 3개의 바늘탑이 일본제국의 자긍심을 상징한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건물 가장 안쪽에 있는 군산세관장실
정면에서 건물을 바라보면 현관을 중심으로 양쪽 부분이 돌출된 대칭성이 완연하다. 대칭성은 신고전주의 양식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혹두기로 다듬어진 화강석과 인조석이 쓰인 현관은 붉은색 벽돌로 처리된 다른 부분에 비해 무겁게 느껴진다. 출입구 상부는 아치로 처리돼 있고 그 위에도 볼록한 형태의 난간이 설치돼 있다. 설계도를 보면 난간이 더 유려한 곡선이었고 가운데에는 문양도 새겨져 있었다. 대칭을 이루는 돌출된 양쪽에는 아치창과 세로로 긴 한 쌍의 창이 다르게 만들어져 있다.

건물의 인상을 좌우하는 지붕은 우진각 지붕과 박공지붕이 합쳐진 형태다. 단층 건물이라는 점을 감안했을 때 지붕의 경사는 심하고 높이도 과장돼 있다. 건물의 상징성을 중요하게 생각했음을 짐작하게 하는 부분이다. 지붕 아래에 있는 창은 사무실에 자연광을 드리운다. 작은 건물에 5개의 출입구가 있었다는 것도 특이한 점인데 아마도 세관 업무의 특수성 때문인 듯하다. 현재는 서쪽과 남서쪽에 있었던 출입문이 벽돌로 메워져 있다.

군산세관 본관 북서쪽에는 과거 세관 창고로 썼던 건물을 개조한 ‘인문학창고 정담’이라는 북카페가 있다. 창고였기 때문에 기둥 없이 지붕의 목조 트러스가 하중을 받치고 있다. 북카페 안에는 ‘먹방이와 친구들’이라는 캐릭터 상품이 진열돼 있는데, 지역의 청년, 소상공인, 예술인들이 모여 만든 군산문화협동조합 ‘로컬아이’의 첫 번째 사업 결과물이다. ‘먹방이와 친구들’은 개화기 때 군산에 정착한 여러 민족들을 이미지화한 캐릭터다. 주인공은 ‘먹방이’라는 이름의 프렌치 불독이다. 인문학창고 정담 홈페이지에 따르면 1900년대 초 군산세관 세무사로 온 라포트가 애완견으로 프렌치 불독을 데리고 왔는데, 이를 처음 본 조선인들이 코가 마치 돼지코를 닮았다고 하여 먹성 좋은 개 ‘먹방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세관 창고로 썼던 건물을 개조한 ‘인문학창고 정담’. 기둥 없이 지붕의 목조 트러스가 하중을 받치고 있다.
조선으로 들어와 줄곧 인천해관에서 근무했던 라포트는 1898년 부산해관원 세무사 서리로 부임했다. 하지만 부산 생활은 길지 않았고 1902년부터는 인천해관장을 역임했다. 라포트가 우리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건 부산해관에 있을 당시 작성한 <울릉도 조사보고서(1899)>다. 조선 정부는 일본인들의 울릉도 불법 입도를 조사하기 위해 제2차 국제조사단원을 꾸렸는데, 이때 라포트가 우용정(내부 조사관), 아카쓰카 마사스케(赤塚正助·부산 일본영사관 부영사)와 함께 참여했다. 당시 조선과 일본 간의 문제를 파악하기 위한 조사였기 때문에 제삼자의 입장으로 참여했던 라포트의 시선은 무엇보다 중요했다. 당시 탁지부 고문이자 총세무사였던 맥레비 브라운은 라포트가 국제법을 잘 알고 있다는 이유로 추천했다. 그런데 지금까지 <울릉도 조사보고서>는 <황성신문>에 실린 요약문만 알려져 있었고 전문의 행방은 알 수 없었다. 그러다 2014년 신용하 서울대 명예교수가 영국 국립문서보관서에서 전문을 발견했다.

군산세관이 인천해관의 관할하에 있었으니 라포트가 군산세관의 상황을 잘 알고 있었을 수는 있다. 하지만 라포트가 군산세관에 얼마나 관여했는지는 알 수 없다. 라포트의 거주지도 인천 송학동2가 4번지였다. 그는 그곳에 주택을 지어 1905년 5월까지 살았다. 라포트 이후에는 맥코넬이 해관장 직무대리를 맡았고 일본인 세관장이 부임한 이후에는 부세관장으로 일했다. 그래서 군산세관 본관 건립에 더 깊이 관여했던 인물은 라포트가 아닌 맥코넬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라포트가 군산세관 본관 건립에 얼마나 관여했는지는 먹방이 캐릭터를 만드는 스토리라인에 그렇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캐릭터를 만들 때 철저한 역사적 고증이 필요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건물을 두고 ‘식민지 수탈’을 이야기하는 건 역사적 사실이기에 당연하다. 그래서 시대적 아픔과 함께 그 건물에서만 들을 수 있는 이야기를 찾을 필요가 있다. 군산세관 본관은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세관 건물 중 남아있는 유일한 흔적이다. 그리고 라포트를 비롯한 우리나라 세관의 역사와 관련된 인물들의 이야기를 들려줄 단 하나의 장소이기도 하다.

방승환 도시건축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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