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정신과 전문의 “거대한 정신병원이 된 강남을 위한 처방전”

김명희 기자 2023. 10. 13.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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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부와 권력이 모여 있는 강남에서 30년 가까이 정신건강센터를 운영해온 김정일 원장이 이곳을 거대한 정신병원이라고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기를 하도 당하다 보니 배신당하는 게 괴로워 아무도 만나지 않고 칩거해 사는 준재벌가의 장남, 과잉보호로 키운 아들이 조현병에 걸리자 무서워서 모임을 핑계로 아이를 만나지 않는 부모, 다른 학생을 왕따시키려다 오히려 왕따를 당하고도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지 못하고 억울해서 길길이 날뛰는 학생과 엄마, 결혼하고도 부모의 부에 의존해 정신적으로 독립하지 못하는 딸, 성공에 만족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자신을 쥐어짜다 공황장애, 탈진, 급기야 자살에 이르는 사람들.

전국에서 가장 비싼 아파트, 매출이 제일 높은 백화점, 사교육 1번지라는 동네, 명품 브랜드의 플래그십스토어, 억 소리 나는 성형외과와 피부과…. 대한민국의 모든 반짝이는 것과 부러운 것들은 강남에 모여 있다. 그런데도 강남에서 28년간 정신건강센터를 운영해온 김정일 정신과 전문의의 눈에 비친 강남의 모습은 한없이 우울하다. 서울시 평균(22.6명)보다 높은 것은 물론 OECD 회원국 평균보다 2배나 높은 강남구의 자살률(인구 10만 명당 23.2명·2022 자살예방백서 기준)이 그의 주장에 힘을 싣는다.

물질만능주의의 끝판왕인 강남에서 대우받기 위해선 돈을 벌어야 하고, 호구를 등쳐야 하고, 내 아이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남들에게 기죽지 않도록 최고로 키워야 한다는 그릇된 사고가 관계를 망치고 인간을 파괴한다. 최근 자신의 상담 경험을 겪은 책 '강남은 거대한 정신병동이다’를 펴낸 김정일 원장은 "환자들에게 '사람을 믿느냐?’고 매번 질문하는데, 99.9%가 안 믿는다고 답한다. 타인과 말을 섞고 싶어 하지 않고, 사람들과 엮이는 걸 두려워한다"고 말했다. 약물을 투여한 채 차를 운전하다 20대 여성을 중상에 빠뜨린 이른바 '압구정 롤스로이스 사건’과 '서이초 사건’ '서현역 묻지마칼부림 사건’ 등은 이런 왜곡된 사고와 파탄 난 관계에서 비롯된 대표적인 사건들이다.

이 거대한 정신병동에서 탈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김정일 원장은 규칙을 중심으로 공정한 세상을 만드는 것, 공짜를 피하고 움직이며 일을 하는 것 그리고 관계의 회복을 꼽는다.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출신인 김정일 원장은 국내 최초로 우울증 의료기기인 '뉴로스타(NEUROSTAR TMS)’를 도입해 'NEUROSTAR TMS 우울증 센터’, 히키코모리 전문 클리닉을 오픈했다. '낭만과 범죄 사이’ '나는 다만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지 않을 뿐이다’ '이런 부모가 자식을 정신병자로 만든다’ 등의 책을 펴낸 밀리언셀러 작가이기도 하다.

자살의 가장 큰 원인은 부끄러움으로 인한 충동

김정일 원장은 “부모의 이기적인 모습을 보고 자란 아이는 필연적으로 이기적으로 성장한다”고 말한다. 사진은 서이초 교문 앞에 근조 화환이 놓인 모습.
이번 책 제목이 인상적입니다. 강남 사람들에게 항의를 받진 않았나요.

한적한 시골 동네라면 그럴 수 있겠지만, 강남은 서로에게 관심을 갖고 그런 동네가 아니라 항의를 받은 적은 없습니다. 다만 경찰관 두 분이 사건 조사 때문에 저희 병원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책 제목을 보더니 딱 맞는 말이라고 하더군요. 그분들은 마약, 도박을 비롯해 여러 사건 사고를 많이 접하다 보니 제목에 많이 공감했던 것 같습니다.

대한민국 대표 부자 동네 강남을 화두로 삼은 이유는요.

"강남은 정신병원"이란 말은 상담받으러 왔던 환자분이 한 얘긴데, 사실 우리가 강남에 대해 한번 짚고 넘어가긴 해야 해요. 강남에서 잘 살고 대우받으려면 돈이 있어야 하는데, 돈 벌기가 어디 쉬운가요. 수단과 방법 안 가리고 돈만 탐하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인간관계는 망가지고 거짓말, 사기, 배신, 복수가 난무하죠. 마약, 도박, 코인 등 각종 중독도 많고 잘못된 교육열 때문에 부모와 자식 관계가 틀어진 경우도 허다합니다. 많은 사람이 강남을 대단한 동네라고 여기고 동경하는데 저는 강남에 대해 균형 잡힌 시각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병원을 찾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호소하는 질환은 무엇인가요.

여기 오는 분들 대부분 잠을 거의 못 자요. 잠이 잘 안 든다든가, 자다가 자주 깬다든가, 아침에 일찍 깬다든가 하죠. 수면 때문에 일상생활에 지장이 있는 경우 불면증으로 진단하는데, 가장 큰 원인은 성취 불안입니다. 학업이나 성과에 대한 스트레스 때문인데, 성공한 분들 가운데 특히 많죠. 낮과 밤이 바뀐 사람도 있고, 열심히 살 필요가 없어서인지 하루 종일 아무 일도 안 하다가 밤에 잠이 안 온다며 찾아오는 분들도 있습니다. 불면이 우울증으로 이어질 수도 있고 우울증이 불면을 일으킬 수도 있기 때문에, 불면증을 치료할 때 그 이면에 있는 정신질환을 함께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울증 환자도 많다는데, 우울증은 생물학적 원인으로 발생하나요. 아니면 환경적인 이유로 발생하나요.

정신질환의 원인은 멀티팩터럴(multifactoral)이라고 해서, 유전 등 생물학적 요인과 스트레스, 성장과정 등 환경적 요인이 다 포함된다고 봅니다. 우울증은 사랑의 대상을 상실했을 때 많이 발생합니다. 우리가 경험을 하면 뇌에서 신경 연결이 이루어지고 그 연결을 통해 자아가 형성되고 세상에 적응도 하게 됩니다. 사람들과의 관계나 경험이 끊기다 보면 신경도 끊어지게 되는데, 경험을 통해 신경이 연결되는 것보다 경험을 안 해서 끊기는 속도가 훨씬 빨라요. 신경들이 연결될 때 불꽃 같은 스파크가 생기는데 고립이 되면 연결이 다 끊기면서 불꽃이 하나둘씩 꺼지게 됩니다. 그 불꽃이 꺼지면 치매, 우울증이 오는 거고요. 은퇴한 사람들이 우울증을 많이 겪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죠. 한가롭게 쉬다 보면 몸도 마음도 다 퇴화하기 때문에 열심히 사는 게 정신건강에는 굉장히 좋습니다.

‘우울은 수용성’이라는 말이 있더라고요. 우울감이 들 때 밖에 나가 땀 흘려 운동한 후 씻고 나면 기분 전환에 도움이 된다고요.

항우울제를 쓰는 것만큼 효과가 있는 게 운동이에요. 사람은 움직이면서 전기를 만들고 그 전기를 통해 뇌세포가 활동하게 됩니다. 움직이지 않으면 발전기가 돌아가지 않는 것과 같아요. 우리 병원에서 사용하는 우울증 치료 장비 가운데 '뉴로스타’라는 게 있어요. 자기장을 통해 뇌에 전기를 흘려주는 장비인데, 치료비가 꽤 비싸요. 우울증이 심한 분이 찾아 오셨는데 형편이 넉넉지 않다며 뉴로스타 치료를 망설이기에 "하루 종일 바쁘게 움직이면 이걸로 치료받는 것과 똑같은 효과가 있다"고 말씀드렸더니, 그 후론 한 번도 안 오셨어요. 나중에 말씀 듣기론 스포츠센터와 문화센터에 등록해 열심히 살고 계신다고 하더군요.

주변에 우울증 환자가 있다면 어떻게 대하는 게 좋을까요.

우울증 환자들은 마음속에 자기 비하, 무기력, 열등감 같은 것들이 응축돼 있어요. 현실에 적응 못 하고 항상 남들이 자기를 비난할까 봐 예민해져 있죠. 자신이 얼마나 못났는지 스스로 잘 알고, 이 때문에 남들이 그걸 지적하면 더 힘들어지고, 그게 한꺼번에 폭발해 자살로 이어지게 됩니다. 자살의 가장 큰 원인이 부끄러움으로 인한 충동입니다. 우울증 환자들은 매일 자신을 자책하고 괴로워하는데, 주변 사람들이 이를 충분히 받아주고 기다려주면 어느 순간 좋아질 수 있습니다.

부끄러움 때문에 자살을 한다고요.

우울증 환자들은 자신의 말과 행동이 잘못됐다는 걸 다 알아요. 하지만 자기가 살려면 어쩔 수 없으니까 그러는 거거든요. 행동 하나하나를 지적하고 비난하는 건 그들의 부끄러움에 기름을 붓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우울증이 오면 사람이 무기력해지고 머리도 안 돌아가고 기억도 없고 대화도 힘들고 가라앉게 됩니다. 그런 상태에서 부끄러움이 쌓이다 보면 어느 순간 희망이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 죽고 싶어지는 거죠.

싸울 때 화가 나면 직설적으로 퍼붓기도 하는데, 우울증 환자에겐 치명적일 수 있겠네요.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괜찮겠지만 자아가 약하고 정신적으로 튼튼하지 못한 사람에겐 치명타죠. 그런 사람들에겐 주의 깊게 들어주고 기다려주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자녀를 컨트롤하는 부모는 그 결과도 책임져야

성공한 사람도 자살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그건 왜 그런가요.

성공 후 관리가 안 돼서 그래요.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건 나를 아껴주는 사람,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후회 없이 함께하는 것인데 성공하고 돈을 많이 벌고 유명해지면 그런 걸 잘 못 하죠. 경쟁도 심하고 이용하려는 사람도 많고, 주변이 삭막해지기도 하고요. 또 인생에서 창조적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시간이 많지 않은데 그걸 다 소진하면 지쳐서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탈진(burnout) 상태가 됩니다. 주변에 의료기기 사업으로 성공한 지인이 있는데, "앞으로 뭘 할 거냐"고 물었더니 "회사를 그만두고 연로한 어머니와 함께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는 거예요. 굉장히 인상적이었어요. 그렇게 일을 놓을 줄 알아야 해요.

학생들은 어떤 문제로 힘들어하나요.

사회성 결핍이죠. 사회성은 사람들 속에서 부대끼며 함양되는 건데, 요즘은 사람들하고 어울리다 상처받느니 그냥 방에 틀어박혀 조용히 있는 걸 좋아하는 아이들이 많아요. 그렇게 사회생활을 오랫동안 단절하게 되면 다시 사회에 나갔을 때 굉장히 낯설고 무서워집니다. 제 환자 중에 아주 좋은 집안에서 잘 커 명문대에 들어간 학생이 있어요. 그런데 수업만 듣고 돌아와 밖에 안 나가요. 사람도 안 만나고요. 부모는 자식 교육에 성공했다고 생각했는데, 아이가 망가지니까 미치는 거죠. 좋은 대학 나와도 취직이 안 되거나 일이 잘 안 풀려서 열등감에 빠진 아이들도 있고요. 그러면 "아빠, 엄마가 하라는 대로 다 했는데 왜 이렇게 됐냐"고 부모를 원망하게 됩니다. 아이들을 존중하면서 성향에 맞춰 키워야 하는데 "무조건 1등 해야 한다" "의대 가야 한다" 이렇게 닦달하면서 키우면 다 망가지거든요. 강남에는 그런 아이들이 참 많아요.

최근 발생한 '서현역 묻지마칼부림 사건’ 가해자도 은둔형외톨이였다고 하더군요. 나중에 기사 나온 걸 보니 10억 원짜리 집에서 부모와 따로 살았다고 하던데요.

저는 부모들에게 "아이가 사회관계를 어려워하면 당신이라도 아이와 함께 놀라"고 해요. "같이 시장도 가고 영화도 보고, 데리고 다니라"고요. 사회와 단절된 상태로 집에만 있으면 망상이 생겨요. 사람들하고 어울려야 세상을 비슷하게 볼 수 있는데, 혼자 있으면 망상대로 세상을 보고 느끼게 되거든요. 그러면 피해의식이 쌓이고 자기가 자기를 해치거나 문제를 일으킬 수 있죠. 부모나 친척이라도 사회생활 경험을 채워주지 않으면 혼자 무슨 일을 벌일지 몰라요.

부모가 자식 교육에 올인하는 건 아이가 나보다 잘되길 바라는 마음 때문인데, 이것이 잘못된 건가요.

잘되는 기준이 중요한데, 그게 부나 명예라면 문제가 있죠. 대한민국은 좀 이상한 사회가 돼서 부와 명예, 성공의 기회가 있는데 그걸 놓치면 큰일 나는 줄 알아요. 저는 TV에 나오는 돈 많고 유명한 사람들을 보면 어떨 땐 좀비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다들 탈진해 있거든요. 너무 일이 많아 힘들지만 그걸 놓지 못하는 거죠. 그런데 한번 탈진하면 창의성도 없어지고, 그땐 정말 힘들어집니다. 영화 '아마데우스’를 보면 모차르트가 결국은 연주하다 쓰러져 죽잖아요. 돈과 명예에 집착하다 잘못되면 아이가 죽을 수도 있어요. 자식이 나보다 더 잘되는 기준이 돈과 명예여서는 안 돼요. 자식은 자식의 길을 가는 것이 중요하거든요. 진료받으러 온 학생에게 "네 소원이 뭐냐?"고 물었더니 "의대 가서 부모님 잘 모시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부모가 정해준 기준에 맞춰 살던 그 아이는 결국 입시에 실패하고 조현병에 걸렸어요. 부모도 결국에는 후회하게 되죠.

자녀가 무서워서 피하는 부모도 있다고요.

아이를 컨트롤하고 과잉보호해서 엉망으로 만들어놓고, 아이가 망가지니까 회피한다거나 감당을 못 하는 부모도 많습니다. 부모가 이기적인 모습을 보이면 아이도 이기적으로 큽니다. 실제로 그런 케이스를 알고 있는데, 아이가 직장에서 계속 자기중심적인 주장을 하다가 안 통하니까 대인관계도 엉망이 되고 자살하겠다는 거예요. 사람은 참을 때도 있어야 하고 기다리거나 타협할 줄도 알아야 하는데 왕처럼 떠받들며 키운 아이는 그게 안 되는 거예요.

‘왕의 DNA 사건’ '서이초 사건’의 부모처럼 아이를 키우는 게 오히려 아이를 망치는 길이 될 수도 있겠네요.

왕으로 키우는 건 좋아요. 그런데 부모 품 안에 있을 때는 왕이더라도 세상에 나가면 공평해야 하거든요. 사람들이 제일 못 견디는 게 공평하지 않은 거예요. 왜냐면 인간 사회가 각자의 이기심과 욕망을 억누르고 서로 타협해서 여기까지 온 건 공평함이 있었기 때문이거든요. 이기적으로 키운 아이는 부모 밑에 있을 때는 좋지만 사회에 나가면 적응을 못 해요. 골방에만 있으려 하고, 사람들 만나면 싸우고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비참해지죠. 사람은 사람을 많이 만나고 특히 사랑받는 것이 중요한데, '네 것도 내 거, 내 것도 내 거’ 하면 누가 좋아하나요. 본인은 혼자 억울해 죽겠다는데, 결국 그건 '너만 잘 살면 된다’는 부모의 잘못된 생각에서 비롯된 겁니다.

정신과 약을 기피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정신과 약을 잘 쓰면 재벌도 될 수 있다"고 책에서 언급하셨더군요.

정신과 약은 잠을 잘 자게 하고, 남을 덜 의식하고 대담하게 만들고, 부정적인 생각을 긍정적으로 바꿔주고, 무기력을 없애주고, 집중력을 높여주고, 감정 조절을 잘하게 하고, 대인관계를 원만하게 해줍니다. 실제로 재벌들 가운데 정신과 약을 쓰는 이도 많고, 약물을 통해 조울증이나 무기력증 등을 잘 극복하고 성공한 삶을 사는 사례도 있습니다. 중요한 PT나 시험을 앞두고 약을 복용하기도 하고요. 하지만 약의 효능은 사람마다, 상태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용량을 잘 조절하고 배합을 잘해야 합니다. 조급하게 약을 늘리다가는 부작용이 생길 수 있거든요. 세상에 공짜만큼 무서운 게 없어요.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선 그에 부응하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정신과 약은 재벌이 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줄 수 있지만 재벌이 될지 말지는 본인의 선택과 용기, 끈기에 달렸어요.

28년 간의 치료 경험을 바탕으로 ‘강남은 거대한 정신병동이다’를 펴낸 김정일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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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지호영 기자 동아DB 뉴스1

김명희 기자 mayh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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