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악어들’이 삼킨 東西무역 중심지… 말레이 민중 ‘고난’ 서린 땅[장은수의 도시와 문학]
향료·황금 등 진귀품들 모여
상선 2000척 동시 정박 교역
포르투갈·네덜란드·英 등 점령
잇속만 챙기고 발전은 등한시
무하맛 저서 ‘따한 산의 아들’
“山만큼 돈 줘도 땅 한뼘 안판다”
서양의 탐욕과 식민주의 비판
믈라카해협은 말레이반도와 수마트라섬 사이에 놓인 길이 약 800㎞에 달하는 아주 좁은 바다다. 인도양과 태평양을 연결하는 이 바다는 오래전부터 중국에서 동남아시아를 거쳐 인도, 아랍, 유럽까지 길게 이어지는 해양 실크로드의 요충지였다. 거센 계절풍이 거의 불지 않아 안전한 항해를 보장하는 이 바다는 고대 이래 세상에서 배가 가장 많이 들락거리는 곳이다. 오래된 도시 믈라카는 그 한복판에 있다.
“누구든 믈라카의 통치자가 되는 사람은 베네치아의 목에 손을 얹게 된다.” ‘말라카: 15세기 동남아 무역 왕국’에서 말레이시아 역사학자 파라하나 슈하이미는 말했다. 중세 후기 베네치아 왕국이 막강한 해군력으로 지중해 바다를 지배했을 때, 유럽인들은 아직 인도양 향료 무역의 중심지인 믈라카를 알지 못했다. 막연히 향료가 이슬람 세계 너머 인도에서 온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막강한 오스만제국을 거치지 않고, 베네치아의 중계무역 폭리도 배제하면서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인도에서 직접 향료를 수입하고 싶어 했다.
16세기 초 바스쿠 다가마가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 인도 고야에 이르렀을 때, 포르투갈 함대는 향료와 바꿀 만한 고급 교역품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다. 탐욕에 눈먼 그들은 물건 대신 포탄을 쏟아부어 고야를 점령하고 약탈을 저질렀다. 그러나 인도에선 정향이나 육두구 같은 향료가 생산되지 않았다. 향료를 찾아 포르투갈은 다시 인도양 동쪽으로 나아가 마침내 믈라카와 충돌했다.
15세기까지 믈라카는 작은 어촌 마을에 불과했다. 1396년 해양 유목민인 오랑 라웃의 후원을 받고, 이곳의 늪지에 최초로 도시를 건설한 사람은 스리비자야 왕국 출신의 파라메스와라였다. 나라가 망한 후 그는 오랜 유랑 생활 끝에 싱가포르를 거쳐 이곳에 이르렀다. 믈라카는 교역 말고는 살길이 없었다. 도시 뒤쪽 빽빽한 열대우림은 호랑이와 악어의 서식지로 농사를 지을 수 없었다.
그러나 믈라카 왕국은 운이 좋았다. 건국 직후인 1403년 정화(鄭和)가 이끄는 명나라 함대가 도착한 까닭이다. 정화 원정대는 대형 선박 60여 척, 소형 선박 190여 척 등 총 255척, 2만8000명에 이르는 대규모 세력이었다. 이들은 단숨에 남중국해와 인도양 무역의 패권을 장악했다.
정세에 밝았던 파라메스와라는 잽싸게 명나라 아래 들어갔고, 정화를 따라 남경(南京)에서 영락제를 알현했다. 명나라는 아유타야, 마자파힛 등 주변 강국의 공격을 막아주었고, 믈라카는 동서양 바닷길의 허브로 눈부신 도약을 시작했다.
기록에 따르면, 전성기 믈라카에는 배 2000척이 동시에 정박할 수 있었다. 충돌과 혼잡을 피하려고 배들은 주변 항구에서 대기하곤 했다. 입항 허가가 내리면 상선들은 진입해 관세를 낸 후 물건을 사고팔았다. 믈라카에는 상인들을 위한 대규모 창고와 거주지가 마련됐고, 계절풍이 지날 때까지 상인들은 몇 달이고 체류하면서 막대한 돈을 쓰곤 했다.
믈라카 왕국의 지배자들은 지혜로웠다. 국부의 원천인 중계무역을 활성화하려고 정치적으론 중국에 복속하고 종교적으론 이슬람을 수용했다. 이슬람 상인들이 형제애를 느끼도록 이슬람교로 개종한 것이다. “왕의 꿈에 예언자가 나타나, 아랍에서 무역선을 타고 선교사가 올 테니 그에게 복종하라고 말했다.” 믈라카의 역사를 기록한 ‘스자라 믈라유’에 나오는 설화다. 그 덕분에 향료, 후추, 황금, 면직물, 주석, 비단, 도자기, 백단향 등 진귀한 산물이 믈라카로 모였다가 온 세상으로 퍼져 갔다. 한때 이곳에서 84개 언어가 쓰일 정도였다.
영웅 서사시 ‘히까얏 항뚜아’엔 당대 믈라카의 실정이 잘 반영되어 있다. 히까얏은 이야기를 뜻하는 말레이어로, 작품은 영웅 항뚜아의 활약상을 담고 있다. 항뚜아는 술탄의 명령을 받아 중국, 자바, 태국, 인도, 콘스탄티노플 등을 여행하며 온갖 모험을 겪는다. 그 여행은 믈라카의 교역망 및 정치 동맹 확산 과정과 일치한다. 이야기 마지막 부분에는 하얀 악어가 그의 검을 물고 달아나는 장면이 나온다. 하얀 악어는 백인을 상징한다. 칼을 잃은 항뚜아는 밀림 속으로 사라지면서 말한다. “말레이는 영원할 것이다.”
1511년 아폰소 데 알부케르크가 이끄는 포르투갈 함대가 믈라카 앞바다에 나타났다. 알부케르크는 말했다. “믈라카를 무어인 손에서 빼앗는다면 카이로와 메카는 파괴될 것이고, 베네치아는 포르투갈 말고 다른 데서 향료를 얻을 수 없을 테다.” 두 달에 걸친 공방 끝에 하얀 악어는 믈라카를 삼켰고, 이 도시는 동남아 최초의 유럽 식민지로 변했다. 포르투갈이 동서 바닷길의 패자로 등장한 대사건이었고, 부의 흐름이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이동한 분기점이었다.
포르투갈은 믈라카 발전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의 관심은 향료뿐이었다. 부정부패, 자의적 세금, 종교적 배타성은 그들에 대한 혐오와 환멸을 불러일으켰다. 믈라카를 거점 삼아 아시아 선교에 나섰던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가 다시는 이 도시를 찾지 않겠다고 다짐할 정도였다.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왕국 유민들은 조호르, 페락, 아체 등에 나라를 세워서 포르투갈을 괴롭혔다. 1558년 이슬람 세력의 후원을 입은 아체는 300여 척의 함선을 동원해서 믈라카를 공격했고, 조호르는 네덜란드와 협력해 서서히 해협 무역망을 빼앗아 갔다. 1641년 네덜란드는 조호르의 도움을 받아 믈라카를 점령했다.
네덜란드 역시 자바섬에 건설한 바타비아(자카르타)를 중시할 뿐 믈라카엔 관심이 없었다. 이 탓에 믈라카는 조호르에 패권을 넘겨준 채 약해져 갔다. 네덜란드 식민시대 믈라카 역사와 싱가포르 건설 과정을 그려낸 ‘히까얏 압둘라’에서 말레이시아 근대문학의 아버지 압둘라 문시는 네덜란드의 과중한 세금을 비판하면서 말했다. “신이여! 네덜란드 왕이 죽어야 믈라카가 평안할 것입니다.”
1824년 나폴레옹 전쟁 와중에 믈라카는 영국의 손에 넘어갔다. 인도에 자리 잡은 영국이 중국 항로를 확보하고 향료 제도의 바닷길을 얻어내려 애쓴 결과였다. 영국은 페낭, 싱가포르, 믈라카 등을 한데 묶어 해협식민지를 건설했다. 영국 식민지 시대의 시작이었다.
포르투갈도, 네덜란드도, 영국도 황금을 향한 탐욕만을 식민 통치의 유일 동력으로 삼았다. ‘반란’은 1857년 말레이인과 중국인이 힘을 합쳐 영국 통치에 저항한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돈은 믿음과 명예, 심지어 민족까지 살 수 있어. 권력이 곧 돈이지.” 영국인 제임스 부룩의 독백을 통해서 종 치안 라이는 서구 제국주의의 타락상을 비판한다.
‘니코사 사령관 이야기’에서 아흐마드 샤왈은 청년 300명을 모아 도둑과 강도를 평정하고, 새로운 나라를 세운 민족 영웅 니코사의 삶을 그려냈다. 샤왈은 말레이 민족의 각성을 촉구하면서 말했다. “날이 바뀌어도 할 일이 없으면 사는 즐거움도 없다. 이럴 때 후손에게 물려줄 유산은 아무것도 없다.”
19세기 후반 말레이반도의 풍부한 주석 광산에 눈독 들인 영국은 이웃 술탄국들을 설득(?)해 말레이 연방을 결성한 후, 그 지배권을 독차지했다. ‘따한 산의 아들’에서 이삭 하지 무하맛은 영국의 탐욕을 경계하고 식민주의를 비판한다. “산 높이만큼 돈을 주어도 땅을 한 뼘도 팔지 않겠다.” 영국인 윌리엄은 산을 사들여서 휴양지를 건설하려 하나, 땅 주인 라뚜 봉수 왕자는 이를 단호히 거절한다. 그러자 영국은 비행기를 보내 마을을 폭격한다. 그의 작품이 식민시대 내내 출판 금지가 된 이유다.
1942년 일본이 믈라카를 점령했다. 일제 패망 이후, 영국 식민지로 돌아온 믈라카는 1946년 독립한 후 1948년 말레이 연방에 합류한다. 말레이 민중의 고난 어린 삶을 다룬 작품 ‘끝없는 역경’에서 작가 샤논 아흐맛은 말했다. “고통과 실패는 삶의 시험이며, 성공을 위한 과정일 뿐이야.”
현재 미국과 중국이 충돌하면서 물류의 요충지 믈라카가 다시 시선을 끌고 있다. 역사는 믈라카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손아귀에 넣었음을 알려준다. 조용한 역사 문화 도시 믈라카는 과연 이 기회를 활용해서 옛 영화를 되찾을 수 있을까.
출판평론가
■ 용어설명 - 오랑 라웃(Orang Laut)
유사 이래 동남아시아의 섬과 바닷가에서 살던 해상 유목민 집단이다. ‘바다 사람들’이라는 말뜻에 걸맞게 이들은 바다를 터전 삼아 살아가며, 아예 바다에서만 생활하는 집단도 있다. 땅보다 바다가 더 익숙한 오랑 라웃은 일찍부터 해양 교역에 종사했고, 상황이 나쁠 때 해적으로 변신하곤 했다. 믈라카의 번영은 이들의 협력 없이 불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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