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코 인사이드] 정휘량이 정의한 농구, “아직 알아가고 있는 친구입니다”
손동환 2023. 10. 13. 09:39
본 기사는 바스켓코리아 웹진 2023년 9월호에 게재됐다. 인터뷰는 8월 9일에 진행됐다.(바스켓코리아 웹진 구매 링크)
농구와 한동안 정을 뗐다. 농구를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농구공을 쥐고 있다. 농구의 다양한 매력을 배우고 있다. 베트남에 있는 정휘량(전 안양 KGC인삼공사-전주 KCC)의 이야기다.
농구와 한동안 정을 뗐다. 농구를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농구공을 쥐고 있다. 농구의 다양한 매력을 배우고 있다. 베트남에 있는 정휘량(전 안양 KGC인삼공사-전주 KCC)의 이야기다.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정휘량은 고등학교 2학년에서야 농구부 입단 테스트를 받았다. 늦어도 한참 늦었다. 그런 이유로, 정휘량을 향한 시선은 긍정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신장과 운동 능력을 겸비한 정휘량은 빠르게 성장했다.
단국대 에이스였던 정휘량은 2008 KBL 국내신인선수 드래프트에 나섰다. 하승진(전 전주 KCC)과 김민수(현 경희대 코치), 윤호영(전 원주 DB) 등 대형 장신 자원이 즐비했지만, 정휘량은 꽤 높은 순번으로 프로에 입성했다. 전체 7순위로 안양 KT&G(안양 KGC인삼공사)의 부름을 받았다.
2008 KBL 국내신인선수 드래프트에서 전체 7순위로 프로에 입성했습니다.
프로에 가서 너무 좋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좋다고 표현하기는 어려웠습니다. 프로에 가지 못한 동기들이 있었거든요. 제가 잘할 수 있었던 건 동료들 때문이었는데, 저만 잘된 것 같아서... 그래서 마냥 좋아할 수 없었어요. 선발되지 못한 친구들을 대신해, 더 해야 한다는 마음도 컸고요.
입단 팀이 KT&G였습니다. 첫 인상은 어떠셨나요?
처음 인사드린 분이 주희정 선배님(현 고려대 감독)이셨어요. 앞도 보기 어려운 선배님이었죠.(웃음) 어떻게 할지 몰라서, 어리바리했어요. 하지만 선배님께서 저를 편하게 대해주셨어요. 어제 만난 것처럼 잘해주셨어요.(웃음)
데뷔 시즌(2008~2009)에 정규리그 20경기 평균 5분 15초를 출전했습니다.
대학교까지만 해도, 감독님과 코치님께서 하라는 대로만 했습니다. 경기가 어떻게 풀리든, 시키는 것만 했죠. 그렇지만 프로는 달랐습니다. 제가 알던 농구가 아니었어요. 저 스스로 생각하고, 저 스스로 발전해야 했어요. 제가 알아서 감독님과 코치님의 의중을 파악해야 했죠.
주어진 상황을 빠르게 적응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다시 공부했어요. 또, 형들을 따라가기 위해, 공부를 많이 했습니다. ‘내가 지금 이걸 해내지 못하면, 나는 도태될 수밖에 없어’라고 생각했죠.
정휘량은 고등학교 2학년에서야 농구부 입단 테스트를 받았다. 늦어도 한참 늦었다. 그런 이유로, 정휘량을 향한 시선은 긍정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신장과 운동 능력을 겸비한 정휘량은 빠르게 성장했다.
단국대 에이스였던 정휘량은 2008 KBL 국내신인선수 드래프트에 나섰다. 하승진(전 전주 KCC)과 김민수(현 경희대 코치), 윤호영(전 원주 DB) 등 대형 장신 자원이 즐비했지만, 정휘량은 꽤 높은 순번으로 프로에 입성했다. 전체 7순위로 안양 KT&G(안양 KGC인삼공사)의 부름을 받았다.
2008 KBL 국내신인선수 드래프트에서 전체 7순위로 프로에 입성했습니다.
프로에 가서 너무 좋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좋다고 표현하기는 어려웠습니다. 프로에 가지 못한 동기들이 있었거든요. 제가 잘할 수 있었던 건 동료들 때문이었는데, 저만 잘된 것 같아서... 그래서 마냥 좋아할 수 없었어요. 선발되지 못한 친구들을 대신해, 더 해야 한다는 마음도 컸고요.
입단 팀이 KT&G였습니다. 첫 인상은 어떠셨나요?
처음 인사드린 분이 주희정 선배님(현 고려대 감독)이셨어요. 앞도 보기 어려운 선배님이었죠.(웃음) 어떻게 할지 몰라서, 어리바리했어요. 하지만 선배님께서 저를 편하게 대해주셨어요. 어제 만난 것처럼 잘해주셨어요.(웃음)
데뷔 시즌(2008~2009)에 정규리그 20경기 평균 5분 15초를 출전했습니다.
대학교까지만 해도, 감독님과 코치님께서 하라는 대로만 했습니다. 경기가 어떻게 풀리든, 시키는 것만 했죠. 그렇지만 프로는 달랐습니다. 제가 알던 농구가 아니었어요. 저 스스로 생각하고, 저 스스로 발전해야 했어요. 제가 알아서 감독님과 코치님의 의중을 파악해야 했죠.
주어진 상황을 빠르게 적응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다시 공부했어요. 또, 형들을 따라가기 위해, 공부를 많이 했습니다. ‘내가 지금 이걸 해내지 못하면, 나는 도태될 수밖에 없어’라고 생각했죠.
화려한 복학생
정휘량은 데뷔 시즌에 약간의 경험을 쌓았다. 2009~2010시즌에는 비약적으로 기회를 얻었다. 정규리그 47경기 평균 13분 19초를 소화했다. 핵심 백업 자원으로 봐도 무방했다.
그러나 정휘량은 군으로 향했다. 군에 있는 2년 동안, 입대 직전 시즌의 퍼포먼스를 기억해야 했다. 쉽지 않았다. 2년은 꽤 긴 시간이기 때문.
하지만 정휘량은 제대 직후 시즌(2012~2013)에 커리어 하이를 찍었다. 오세근(현 서울 SK)과 김일두(현 MBC스포츠플러스 해설위원), 김민욱(현 수원 KT) 등 장신 자원이 줄줄이 다치면서, 정휘량이 기회를 얻은 것.
안양 KGC인삼공사도 순항했다. 정규리그 4위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고, 6강 플레이오프에서 고양 오리온스(현 고양 소노)를 3승 2패로 꺾었다. 정휘량은 KGC인삼공사의 4강 진출에 보이지 않는 공을 세웠다.
2009~2010시즌에 기회를 많이 얻었습니다.
그때도 비디오 미팅이 있기는 했지만, 저는 비디오 분석을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트레이드로 합류한 (김)태술이(현 SPOTV 해설위원)가 비디오 분석으로 저에게 많은 걸 알려줬습니다. 그래서 저도 비디오를 많이 봤고, 농구를 더 많이 이해했습니다. ‘이제 조금 아네’라는 칭찬도 들었고요. 그때 기분이 정말 좋더라고요.(웃음)
2009~2010시즌 종료 후 군에 입대했습니다. 군대에서는 어떤 훈련을 하셨나요?
훈련은 다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상무는 탑 클래스 선수들만 모인 팀이었습니다. 그런 친구들의 마음가짐을 많이 배웠습니다.
어떤 게 다르던가요?
단 한 번의 플레이인데도, 분석과 토론을 하더라고요. “내가 감독이라면, 나는 이런 플레이를 할 거야”라고요. 그런 말들이 너무 재미있었고, 그게 저에게는 컬쳐 쇼크였어요.(웃음) 또, 탑 클래스 선수들의 분석을 보다 보니, 제가 해야 할 일도 뚜렷해졌어요. 그래서 상무는 제 농구 인생의 전환점이 됐어요.
제대 직후 시즌을 커리어 하이로 만들었습니다.
앞서 말씀 드린 대로, 역할과 목표가 더 뚜렷해졌습니다. 수비와 리바운드, 속공을 많이 했죠. 그리고 찬스에서는 주저하지 않고 던졌고요. 그 정도만 해도 충분했던 게, (양)희종이와 태술이, (이)정현이(서울 삼성)와 (오)세근이(현 서울 SK) 등 스코어러가 많았거든요. 제 역할이 심플했기에, 좋은 결과가 나왔다고 생각합니다.
정휘량은 데뷔 시즌에 약간의 경험을 쌓았다. 2009~2010시즌에는 비약적으로 기회를 얻었다. 정규리그 47경기 평균 13분 19초를 소화했다. 핵심 백업 자원으로 봐도 무방했다.
그러나 정휘량은 군으로 향했다. 군에 있는 2년 동안, 입대 직전 시즌의 퍼포먼스를 기억해야 했다. 쉽지 않았다. 2년은 꽤 긴 시간이기 때문.
하지만 정휘량은 제대 직후 시즌(2012~2013)에 커리어 하이를 찍었다. 오세근(현 서울 SK)과 김일두(현 MBC스포츠플러스 해설위원), 김민욱(현 수원 KT) 등 장신 자원이 줄줄이 다치면서, 정휘량이 기회를 얻은 것.
안양 KGC인삼공사도 순항했다. 정규리그 4위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고, 6강 플레이오프에서 고양 오리온스(현 고양 소노)를 3승 2패로 꺾었다. 정휘량은 KGC인삼공사의 4강 진출에 보이지 않는 공을 세웠다.
2009~2010시즌에 기회를 많이 얻었습니다.
그때도 비디오 미팅이 있기는 했지만, 저는 비디오 분석을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트레이드로 합류한 (김)태술이(현 SPOTV 해설위원)가 비디오 분석으로 저에게 많은 걸 알려줬습니다. 그래서 저도 비디오를 많이 봤고, 농구를 더 많이 이해했습니다. ‘이제 조금 아네’라는 칭찬도 들었고요. 그때 기분이 정말 좋더라고요.(웃음)
2009~2010시즌 종료 후 군에 입대했습니다. 군대에서는 어떤 훈련을 하셨나요?
훈련은 다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상무는 탑 클래스 선수들만 모인 팀이었습니다. 그런 친구들의 마음가짐을 많이 배웠습니다.
어떤 게 다르던가요?
단 한 번의 플레이인데도, 분석과 토론을 하더라고요. “내가 감독이라면, 나는 이런 플레이를 할 거야”라고요. 그런 말들이 너무 재미있었고, 그게 저에게는 컬쳐 쇼크였어요.(웃음) 또, 탑 클래스 선수들의 분석을 보다 보니, 제가 해야 할 일도 뚜렷해졌어요. 그래서 상무는 제 농구 인생의 전환점이 됐어요.
제대 직후 시즌을 커리어 하이로 만들었습니다.
앞서 말씀 드린 대로, 역할과 목표가 더 뚜렷해졌습니다. 수비와 리바운드, 속공을 많이 했죠. 그리고 찬스에서는 주저하지 않고 던졌고요. 그 정도만 해도 충분했던 게, (양)희종이와 태술이, (이)정현이(서울 삼성)와 (오)세근이(현 서울 SK) 등 스코어러가 많았거든요. 제 역할이 심플했기에, 좋은 결과가 나왔다고 생각합니다.
다가온 마지막
정휘량은 2013~2014시즌에도 백업 포워드의 역할을 해냈다. 그러나 정휘량의 출전 기회는 2014~2015시즌에 급격히 줄었다. 25경기 평균 5분 4초 밖에 나서지 못했다.
해당 시즌 종료 후 FA(자유계약)를 취득했다. 정휘량의 새로운 행선지는 전주 KCC. 하지만 KCC에서도 25경기 평균 5분 57초만 코트를 밟았다. 2017~2018시즌에도 코트에 나설 수 있었지만, 은퇴했다. 정휘량의 KBL 커리어는 ‘244경기’에서 끝났다.
출전 경기 수와 평균 출전 시간이 2012~2013시즌 종료 후 줄어들었습니다.
감독님께서 저에게 기대하는 것도 있고, 제가 수행해야 할 역할이 있습니다. 제가 감독님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거나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면, 출전 시간은 당연히 줄어듭니다. 그런 이유 때문이라고 봐요.
2014~2015시즌 종료 후 FA가 됐습니다. 고민을 많이 하셨을 것 같은데요.
고민은 딱히 없었습니다. 다른 팀으로 갈 생각이 없었거든요. 그리고 2015년에 부임하셨던 전창진 감독님께서 저에게 믿음을 주셨습니다. 잠깐의 시간이었지만, ‘감독님과 함께 한다면, 난 2~3단계 더 발전할 수 있다’는 확신도 들었습니다.
2016~2017시즌 종료 후 은퇴하셨어요. KGC인삼공사가 아닌 KCC에서 은퇴하셨는데요.
제 고향이 전주이고, KCC의 홈 코트도 전주입니다. 그래서 KCC에서 은퇴한 게 남달랐어요. 물론, 욕심 같아서는 3~4년 정도 더 하고 싶었어요. 그렇지만 마지막 시즌 때 ‘내가 정체됐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전까지만 해도 성장한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제 농구가 멈춰버린 거죠. 그런 이유로, 마지막을 예감했습니다. 아내 역시 “벤치에서 흐지부지하게 보내느니, 빨리 은퇴하는 게 낫다”고 조언해줬고요.
정휘량은 2013~2014시즌에도 백업 포워드의 역할을 해냈다. 그러나 정휘량의 출전 기회는 2014~2015시즌에 급격히 줄었다. 25경기 평균 5분 4초 밖에 나서지 못했다.
해당 시즌 종료 후 FA(자유계약)를 취득했다. 정휘량의 새로운 행선지는 전주 KCC. 하지만 KCC에서도 25경기 평균 5분 57초만 코트를 밟았다. 2017~2018시즌에도 코트에 나설 수 있었지만, 은퇴했다. 정휘량의 KBL 커리어는 ‘244경기’에서 끝났다.
출전 경기 수와 평균 출전 시간이 2012~2013시즌 종료 후 줄어들었습니다.
감독님께서 저에게 기대하는 것도 있고, 제가 수행해야 할 역할이 있습니다. 제가 감독님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거나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면, 출전 시간은 당연히 줄어듭니다. 그런 이유 때문이라고 봐요.
2014~2015시즌 종료 후 FA가 됐습니다. 고민을 많이 하셨을 것 같은데요.
고민은 딱히 없었습니다. 다른 팀으로 갈 생각이 없었거든요. 그리고 2015년에 부임하셨던 전창진 감독님께서 저에게 믿음을 주셨습니다. 잠깐의 시간이었지만, ‘감독님과 함께 한다면, 난 2~3단계 더 발전할 수 있다’는 확신도 들었습니다.
2016~2017시즌 종료 후 은퇴하셨어요. KGC인삼공사가 아닌 KCC에서 은퇴하셨는데요.
제 고향이 전주이고, KCC의 홈 코트도 전주입니다. 그래서 KCC에서 은퇴한 게 남달랐어요. 물론, 욕심 같아서는 3~4년 정도 더 하고 싶었어요. 그렇지만 마지막 시즌 때 ‘내가 정체됐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전까지만 해도 성장한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제 농구가 멈춰버린 거죠. 그런 이유로, 마지막을 예감했습니다. 아내 역시 “벤치에서 흐지부지하게 보내느니, 빨리 은퇴하는 게 낫다”고 조언해줬고요.
낯선 그 곳, 낯선 일
앞서 이야기했듯, 프로 스포츠 선수는 누구나 새로운 인생과 마주한다. 선수만 평생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휘량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다른 농구인들과 다른 행보를 걸었다. 지난 2022년 12월 27일 한 매체를 통해 베트남 호치민에 위치한 몬스타즈 FC의 단장이 됐음을 알렸다. 농구인 출신 축구 팀 단장. 꽤 이색적이었다. 그리고 베트남의 농구 인프라를 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은퇴 후 베트남으로 가셨습니다.
이유는 딱히 없었습니다. 그냥 좋아보이더라고요. 베트남에 꽂히기도 했고요.(웃음)
생계 고민은 하셨을 것 같아요.
베트남에 온 후 1년 동안 놀았습니다. 다만, 어떤 사업을 해야 할지 고민했어요. 그리고 지금은 호치민에서 농구 아카데미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호치민의 농구 환경이 성장하는 게 보였거든요. 물론, 고민은 지금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살아남기 위한 고민이요.(웃음)
뜬금없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베트남 축구 팀의 단장이 되셨습니다.
베트남으로 처음 왔을 때, (하)승진이 아내의 소개로 ‘코이티비’ 유튜브 채널 운영자와 친분을 쌓았습니다. 그 친구의 유튜브 채널이 커지면서, 다양한 컨텐츠와 다양한 사업이 진행됐죠.
그 중에 스포츠 관련 사업도 있었습니다. 축구가 베트남에서 워낙 유명했기에, (코이티비를 운영하는 친구가) 축구단 운영을 원하더라고요.
저도 프로농구 선수를 했기에, 프로 팀의 운영 방식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 친구와 협업해서, “축구단을 만들어보자”고 했죠. 하지만 지금은 보류 상태입니다. 저희 팀에 맞는 감독을 찾고 있거든요.
농구 선수 출신이 축구 관련 일을 하는 건 쉽지 않습니다.
제 역할은 구단의 원활한 운영을 돕는 것입니다. 그것만 놓고 보면, 농구와 축구의 차이는 크지 않다고 봅니다. 그래서 어려움을 크께 느끼지는 않았습니다.
어떤 업무를 주로 하시나요?
(베트남의) 운동 인프라는 확실히 미흡합니다. 운동 시설과 운동 후 몸을 회복할 수 있는 한경이 특히 그렇죠. 그렇기 때문에, 저는 한국에서 했던 것들을 코칭스태프한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 시스템에 많은 신경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한국으로 돌아오고 싶은 마음은 없으신가요?
한국에서 하면 잘할 자신도 있고, 한국에 있는 게 더 나을 거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렇지만 여기에 있는 시스템을 배우는 건 저한테 자극이 됩니다. 여기에서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는지도 마찬가지고요. 물론, 어려운 길만 골라서 가는 느낌이지만요.(웃음)
시스템을 여러 차례 이야기하셨습니다. 어떤 게 많이 다른가요?
베트남 같은 경우, 엘리트 시스템 자체가 없어요. 운동하는 친구들 모두 학업과 병행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저한테는 고객이에요.(웃음) 그래서 선수 시절과 다른 마음으로 고객을 확보해야 합니다. 엘리트의 시각으로만 보면, 농구 시장이 작아지거든요.
앞서 이야기했듯, 프로 스포츠 선수는 누구나 새로운 인생과 마주한다. 선수만 평생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휘량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다른 농구인들과 다른 행보를 걸었다. 지난 2022년 12월 27일 한 매체를 통해 베트남 호치민에 위치한 몬스타즈 FC의 단장이 됐음을 알렸다. 농구인 출신 축구 팀 단장. 꽤 이색적이었다. 그리고 베트남의 농구 인프라를 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은퇴 후 베트남으로 가셨습니다.
이유는 딱히 없었습니다. 그냥 좋아보이더라고요. 베트남에 꽂히기도 했고요.(웃음)
생계 고민은 하셨을 것 같아요.
베트남에 온 후 1년 동안 놀았습니다. 다만, 어떤 사업을 해야 할지 고민했어요. 그리고 지금은 호치민에서 농구 아카데미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호치민의 농구 환경이 성장하는 게 보였거든요. 물론, 고민은 지금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살아남기 위한 고민이요.(웃음)
뜬금없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베트남 축구 팀의 단장이 되셨습니다.
베트남으로 처음 왔을 때, (하)승진이 아내의 소개로 ‘코이티비’ 유튜브 채널 운영자와 친분을 쌓았습니다. 그 친구의 유튜브 채널이 커지면서, 다양한 컨텐츠와 다양한 사업이 진행됐죠.
그 중에 스포츠 관련 사업도 있었습니다. 축구가 베트남에서 워낙 유명했기에, (코이티비를 운영하는 친구가) 축구단 운영을 원하더라고요.
저도 프로농구 선수를 했기에, 프로 팀의 운영 방식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 친구와 협업해서, “축구단을 만들어보자”고 했죠. 하지만 지금은 보류 상태입니다. 저희 팀에 맞는 감독을 찾고 있거든요.
농구 선수 출신이 축구 관련 일을 하는 건 쉽지 않습니다.
제 역할은 구단의 원활한 운영을 돕는 것입니다. 그것만 놓고 보면, 농구와 축구의 차이는 크지 않다고 봅니다. 그래서 어려움을 크께 느끼지는 않았습니다.
어떤 업무를 주로 하시나요?
(베트남의) 운동 인프라는 확실히 미흡합니다. 운동 시설과 운동 후 몸을 회복할 수 있는 한경이 특히 그렇죠. 그렇기 때문에, 저는 한국에서 했던 것들을 코칭스태프한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 시스템에 많은 신경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한국으로 돌아오고 싶은 마음은 없으신가요?
한국에서 하면 잘할 자신도 있고, 한국에 있는 게 더 나을 거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렇지만 여기에 있는 시스템을 배우는 건 저한테 자극이 됩니다. 여기에서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는지도 마찬가지고요. 물론, 어려운 길만 골라서 가는 느낌이지만요.(웃음)
시스템을 여러 차례 이야기하셨습니다. 어떤 게 많이 다른가요?
베트남 같은 경우, 엘리트 시스템 자체가 없어요. 운동하는 친구들 모두 학업과 병행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저한테는 고객이에요.(웃음) 그래서 선수 시절과 다른 마음으로 고객을 확보해야 합니다. 엘리트의 시각으로만 보면, 농구 시장이 작아지거든요.
“농구, 아직 알아가고 있는 친구입니다”
‘뭐하고 지내세요?’의 마지막 주제는 자신의 농구 인생을 돌아보는 것이다. 정휘량에게도 같은 질문을 했다. “다시 태어나도 농구를 하겠냐?”고 말이다.
정휘량은 한참을 고민했다. 질문과 다른 말로 시간을 끌었다. 그러다가 결론을 내렸다. 결론의 끝은 “다시 하겠다”였다. 그리고 “‘농구’라는 친구를 알아가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농구’는 어떤 의미인가요?
은퇴할 때만 해도, 농구가 아닌 다른 걸 하고 싶었습니다. 농구와 다른 세계를 접하고 싶었죠. 그런데 지금도 농구를 하고 있습니다.(웃음)
베트남에서의 경험이 ‘농구’를 더 소중한 존재로 만든 것 같아요.
베트남과 태국, 인도네시아 모두 농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신체 조건과 1대1 능력이 좋은 친구들도 많고요. 그렇지만 체계적인 훈련과 교육이 없습니다. 트레이너와 심판도 마찬가지고요. 유튜브를 보고 심판을 배우는 사람도 있을 정도죠.(웃음)
동남아시아의 농구 시장이 지금은 작습니다. 하지만 농구를 체계적으로 배우면, 동남아시아의 농구 인프라는 더 커질 거라고 봅니다. 그런 환경을 보다 보니, 저도 농구를 더 많이 알게 됐어요. 아직도 모르는 게 많고요. 하여간 지금도 농구를 못 놓고 있습니다.(웃음)
‘정휘량의 농구 인생’을 한 번 돌아봐주세요.
‘농구’라는 친구를 아직 알아가고 있습니다. ‘농구’와 고민도 같이 하고, ‘농구’로부터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농구공도 지역에 따라 다른 성격을 갖고 있더라고요.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도 다양한 농구를 알고 싶습니다.
다시 태어나도 농구를 하실 건가요?
프로 시절까지 농구만 보고 살았습니다. 은퇴 직후만 해도, ‘이제 농구 안 해’라는 생각이 들었죠. 그렇지만 베트남에 온 후, 농구의 새로운 면이 많이 보입니다. 그렇게 보면, 다시 태어나도 농구를 할 것 같아요.(웃음)
일러스트 = 정승환 작가
사진 제공 = KBL(본문 2~4번째 사진, 본문 마지막 사진), 정휘량(본문 5번째 사진)
‘뭐하고 지내세요?’의 마지막 주제는 자신의 농구 인생을 돌아보는 것이다. 정휘량에게도 같은 질문을 했다. “다시 태어나도 농구를 하겠냐?”고 말이다.
정휘량은 한참을 고민했다. 질문과 다른 말로 시간을 끌었다. 그러다가 결론을 내렸다. 결론의 끝은 “다시 하겠다”였다. 그리고 “‘농구’라는 친구를 알아가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농구’는 어떤 의미인가요?
은퇴할 때만 해도, 농구가 아닌 다른 걸 하고 싶었습니다. 농구와 다른 세계를 접하고 싶었죠. 그런데 지금도 농구를 하고 있습니다.(웃음)
베트남에서의 경험이 ‘농구’를 더 소중한 존재로 만든 것 같아요.
베트남과 태국, 인도네시아 모두 농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신체 조건과 1대1 능력이 좋은 친구들도 많고요. 그렇지만 체계적인 훈련과 교육이 없습니다. 트레이너와 심판도 마찬가지고요. 유튜브를 보고 심판을 배우는 사람도 있을 정도죠.(웃음)
동남아시아의 농구 시장이 지금은 작습니다. 하지만 농구를 체계적으로 배우면, 동남아시아의 농구 인프라는 더 커질 거라고 봅니다. 그런 환경을 보다 보니, 저도 농구를 더 많이 알게 됐어요. 아직도 모르는 게 많고요. 하여간 지금도 농구를 못 놓고 있습니다.(웃음)
‘정휘량의 농구 인생’을 한 번 돌아봐주세요.
‘농구’라는 친구를 아직 알아가고 있습니다. ‘농구’와 고민도 같이 하고, ‘농구’로부터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농구공도 지역에 따라 다른 성격을 갖고 있더라고요.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도 다양한 농구를 알고 싶습니다.
다시 태어나도 농구를 하실 건가요?
프로 시절까지 농구만 보고 살았습니다. 은퇴 직후만 해도, ‘이제 농구 안 해’라는 생각이 들었죠. 그렇지만 베트남에 온 후, 농구의 새로운 면이 많이 보입니다. 그렇게 보면, 다시 태어나도 농구를 할 것 같아요.(웃음)
일러스트 = 정승환 작가
사진 제공 = KBL(본문 2~4번째 사진, 본문 마지막 사진), 정휘량(본문 5번째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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