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우물만 파라?… 다빈치·파스칼도 ‘잡학다식’ 인재였다[북리뷰]

박동미 기자 2023. 10. 13.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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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폴리매스
피터 버크 지음│최이현 옮김│예문아카이브
다빈치, 악사·조각가·화가 재능
라이프니츠, 역사·법·수학 연구
메이킨, 7개 언어로 시집 출간
다양한 학문 섭렵‘폴리매스’조명
중세이후 학자·예술가 등 500인
인류 역사에 남긴 주요업적 살펴
16∼17세기에는 개인 박물관이 유행했다. ‘경이로운 것들’로 명명된 물건이나 작품을 수집하는 폴리매스가 늘었기 때문이다. 그림 속 박물관의 주인은 덴마크 의사 올레 보름으로, 그 역시 무기부터 박제 동물, 새, 물고기까지 관심 영역이 넓고 호기심이 충만한 지식인이었다. 예문아카이브 제공

‘지식’의 정의는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달라진다. 또 같은 시간과 공간에서도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지식을 추구한다. 그러나 변함없이 ‘그들’은 존재했다. 바로 ‘폴리매스(Polymath)’들이다. ‘지식의 사회사’ ‘지식은 어떻게 탄생하고 진화하는가’ 등으로 국내에도 잘 알려진 영국의 문화 사학자인 저자는 폴리매스를 다양한 분야에 관심과 지식, 전문성을 갖고 출중한 재능을 발휘하는 사람으로 규정한다. 그들은 호기심이 너무 넘쳐 한 분야에만 머물 수가 없다. ‘좋은 의미’로 ‘지적 겸손함’이 부족한데, 이는 엄청난 힘을 지녔다. 관심 가는 모든 분야를 고도의 집중력과 성실함으로 탐구하고, 여러 영역을 융합하거나 새로운 영역을 창조하며 시대 변화의 최전선에 선다.

다빈치

책은 ‘서양 폴리매스 연대기’다. 저자는 그리스와 중세 말을 포함해 15세기 이후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에서 분야를 넘나들었던 폴리매스 500인의 발자취를 따라간다. ‘천재’라는 말 아래 평면적으로 이해했던 폴리매스들의 다양한 삶과 감춰져 있던 표정까지 엿보는 묘미가 있다. 예컨대 폴리매스의 대명사 격인 르네상스 시대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젊은 시절 밀라노의 궁중 음악사였고 동시에 화가, 건축가, 조각가였다. 또 지리학, 기호학, 공학, 식물학, 동물학, 지질학 연구에도 손을 댔다. 혼자 해부학을 공부해 동맥경화증을 최초로 연구하고 심장 대동맥 판막의 기능을 발견한 것도 큰 업적 중 하나. 그러나 그가 늘 노트에 ‘배우지 못한 사람’이라고 쓰고 다녔던 것을 아는지. ‘르네상스인’ 하면 ‘인문주의자’라는 말이 따라붙지만, 정작 다빈치는 제대로 인문학 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 17세기 프랑스 수학자 파스칼은 어떤가. 신학, 철학, 물리학까지 섭렵한 폴리매스의 전형인데, 유년기에 기하학을 재발견할 당시에도 책이나 교사의 도움이 없었다고 한다.

라이프니츠

현대 폴리매스의 초기 버전이 르네상스 시기에 만들어졌다고 보는 저자는 앞서 다빈치를 집중 조명했으나, 더욱 흥미로운 이야기는 뒤이은 17세기에 펼쳐진다. 책은 이 시대를 “박학다식한 괴물들의 시대”로 명명하고, 당시 활약한 폴리매스들을 소환한다. 대표적인 인물은 독일의 철학자이자 정치가였던 라이프니츠(1646∼1716)다. 그는 수학자이면서 역사학, 법학도 연구하고 기여했다. 또, 중국 전문가로도 이름을 날렸다. 특히 그는 가장 바람직한 폴리매스의 자세, 즉 이상적인 지식인의 면모를 보여줬는데, “모든 것을 연결할 수 있는 한 사람이 열 명 이상의 몫을 할 수 있다”며 다재다능한 사람의 역할을 선명하게 의식하면서도 늘 열린 자세로 ‘지식의 협력자’를 찾아다녔다.

메리 서머빌

여성이 폴리매스가 되는 일은 제약과 제한이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반드시 기억해야만 할 사례도 적극적으로 발굴했다. 대부분이 “폴리매스의 황금기”인 17세기에 등장했다. 신학, 철학, 법학, 문학, 음악 그리고 라틴어와 멕시코 원주민의 언어까지 섭렵했던 멕시코의 후아나 라미레스는 다수의 청혼을 거절하고, 자유롭게 공부하기 위해 수녀가 됐다. 또 당시 ‘영국에서 가장 박식한 여성’이라는 평을 들은 바슈아 메이킨은 7개 언어로 시집을 출간했고, 의학과 교육 등 관심 분야가 다양했다. 여성도 양질의 교육을 받아야 한다며 ‘고대 여성 교육 부활론’을 발표하기도 했다. ‘모든 것을 알았다’는 기록이 있는 스웨덴의 크리스티나 여왕은 언어, 철학, 천문학, 연금술 등에 관심이 많았고, 학자들을 직접 불러 모아 토론하기를 즐겼다고 한다. 그 속에는 당대 가장 뛰어난 학자였던 르네 데카르트도 있었다.

과학의 발달과 지식의 분업, 전문화가 보다 가속화되는 18세기 이후엔 폴리매스의 조건도 조금씩 변모한다. 가장 큰 도전이자 장벽은 학문의 발전으로 인해 분야별로 전문 용어가 증가한 점이다. 그러나 저자는 그렇기 때문에 더욱 폴리매스의 역할이 중요해졌다고도 역설한다. 전문가들이 놓친 연결을 발견해 내는 것으로 폴리매스의 새로운 탐험이 시작된 것. 이러한 흐름에서 19세기에는 아이디어를 종합하고, 연결하는 학문 방식으로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이 탄생할 수 있었다. 스코틀랜드 여성 과학자 메리 서머빌 역시 비슷한 연구 방법으로 ‘자연과학의 연결성에 관하여’를 출간한다.

무엇도 규정되지 않는 시대. 지식의 반감기가 점차 짧아지는 시대. 왜 다시 폴리매스일까. 어차피 그것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스마트폰이 대체해 버리지 않았나.

저자는 가벼운 터치에 쏟아져 내리는 핸드폰 속 정보는 폴리매스들의 숙성된 지식과는 다르다고 선을 긋는다. 그러니까 기술의 발달로 인해 누구나 폴리매스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누구나 폴리매스인 척을 할 수 있을 뿐이다.

지난 세기 폴리매스들이 이룩한 위대한 업적들은 단순히 호기심과 재능에만 기인하지 않았다. 그것은 한 분야에 정통한 사람들 못지않게, 아니 그들보다 효과적으로 다양한 분야를 깊게 들여다보는 집중력과 꾸준함, 성실한 태도가 수반되어야 가능했다. 그리하여, 다시, 그리고 반드시, 폴리매스여야만 한다. 세분되고 전문화되며 계속 새로운 가지를 뻗어 나가는 지식을 연결하고, 융합하고, 그 틈에서 새로운 영역을 만들기 위해서. 그것은 라이프니츠가 선언했듯 호기심 충만한 ‘만능인’들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며 더 나은 기술, 삶, 지구를 위해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다. 448쪽, 1만8000원.

박동미 기자 pdm@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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