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짓밟은 ‘왕의 길’ 복원…검정 바탕 광화문 현판도

노형석 2023. 10. 13. 08:05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15일 일반 공개
2018년 일본에서 발견된 ‘경복궁영건일기’에서 검은 바탕에 금색 글자란 기록을 찾았다고 밝힌 광화문 현판의 추정 복원품을 내건 모습. 문화재청 제공
현재 내걸린 광화문 현판. 문화재청 제공

왕의 길과 계단이 100여년 만에 제 모습을 되찾아 시민과 만난다.

조선왕조의 정궁 경복궁 권역의 시작점으로 임금과 신하들이 출입했던 통로와 들머리 계단인 서울 광화문 앞 월대와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의 현판이 복원 작업을 끝내고 15일 일제히 일반 공개된다. 

문화재청은 15일 오후 5시부터 광화문 앞 광장에서 정부 고위 관계자와 시민 수백명이 참석한 가운데 광화문 월대와 현판의 복원 기념행사를 열 예정이라고 12일 누리집을 통해 밝혔다.

월대는 국립서울문화재연구소가 지난해 9월부터 지난 4월까지 집중발굴 작업을 벌여 일제강점기의 전찻길에 덮여 있던 옛터의 전모를 드러낸 바 있다. 월대는 경복궁 광화문 문루 들머리로 임금과 왕족이 의례를 하거나 행차를 할 때 출입하는 인공통로 얼개로, 양옆에 높은 대를 쌓아 올려 위엄을 돋보이게 한 구조물이다. 경복궁에는 광화문과 근정전 등의 주요 전각의 출입 부분에 만들어졌다. 복원된 월대는 19세기 후반 고종이 경복궁을 중건한 당시 만들어진 것으로 전체 남북 길이 49m, 동서 너비 30m이며, 한가운데 난 ‘임금의 길’인 어도의 너비는 7m에 달한다. 구한말까지 존속하다 일제강점기인 1923년 박람회인 ‘조선부업품공진회’를 여는 과정에서 일제가 관객을 실어나를 전차 선로를 부설하면서 파괴된 것으로 전해진다.

광화문 월대 복원 조감도. 파란 원을 친 곳이 새로 복원되는 월대 영역이다. 문화재청 제공

특히 월대의 어도 앞부분 끝에 상서로운 동물의 조각상인 서수상(瑞獸像) 2점이 온전한 모습으로 설치된 채 공개될 예정이어서 주목된다. 이 서수상 두점은 원래 경기 용인 호암미술관 정원에 놓여져 있던 고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유물 컬렉션 중 일부였다. 지난 4월 시민 제보로 문화재청이 유물 내력을 파악한 끝에 광화문 월대의 장식물임을 확인했고, 삼성가 유족이 뒤이어 기증해 눈길을 모은 바 있다.

경기 구리 동구릉에 옮겨졌던 월대 난간석 부위의 원래 부재와 서수상 등 50여점의 석물에다 월대 앞머리 서수 상징물까지 이례적으로 찾아내면서 19세기 중반 고종의 중건 당시 모습에 가까운 복원이 가능해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문화재청은 광화문 전각 바로 옆에 있던 상상의 수호동물 해치(해태)의 상도 최근 문 남쪽 월대 앞으로 자리를 옮겼다.

새로 만들어 제막하는 광화문 현판도 월대 못지않게 관심을 끈다. 수령 200년을 넘은 적송 소나무를 재료로 기존 현판과 색상 배치를 완전히 뒤바꿔 검은 바탕에 금색 글자 동판을 붙여 만들었기 때문이다.

광화문 현판은 수난의 역사를 지닌 문화유산이다. 한국전쟁 때 원래의 광화문 건물과 현판이 불탄 뒤 1968년 콘크리트 건축물로 1차 복원할 당시에는 고증을 무시한 채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 글씨를 써서 걸었다. 2010년 광화문을 원래 자리에 목구조 전각으로 복원할 때는 19세기 고종의 경복궁 중건 당시 현판 글씨를 썼던 훈련대장 임태영의 해서체 필적을 되살린 한자 현판을 흰색 바탕에 검은 글씨로 써서 기존 박정희 친필 현판을 내리고 교체했다. 그러나 새 현판은 그해 8월15일 광복절에 제막한 뒤로 석달여만에 부실 복원으로 표면이 갈라지고 뒤틀리는 현상이 나타났고, 뒤이어 바탕색과 글자색의 고증 오류를 둘러싼 논란도 잇따라 불거졌다. 문화재계에서 색상이 다른 것으로 보이는 미국 스미소니언박물관 소장 구한말 사진 자료와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발견된 경복궁 중건공사의 기록인 ‘경복궁영건일기’ 등을 근거로 현판의 색상 고증이 잘못됐다는 비판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특히 2018년 ‘경복궁영건일기’를 판독한 결과 현판의 색상을 검정 바탕에 금색 글자임을 뜻하는 ‘흑질금자’(黑質金字)로 표기한 기록이 나온 것은 현판을 전면 교체하는 결정적인 근거가 됐다. 이에 문화재청은 고증 촬영 실험 결과를 토대로 2018년 1월 검정 바탕에 금박 글씨로 현판 색상을 바꾸겠다는 방침을 발표했고, 지난 5년 동안 ‘…영건일기’ 기록 등을 참고해 글자 크기, 단청 등의 정밀 고증과 내구성 강화를 위한 건조 작업을 거듭해온 바 있다.

지난 5월25일 공개된 월대 발굴 현장. 남쪽으로 돌출된 월대 어도 계단의 한가운데를 깨뜨리고 그 위에 잡석과 콘크리트를 타설해 철로 기초부를 놓은 뒤 바로 철로 침목을 놓은 흔적이 보인다. 노형석 기자

월대의 복원과 새 현판의 교체는 1990년부터 이어진 경복궁 복원 프로젝트의 고갱이다. 사실상 30년을 넘긴 복원 사업의 화룡점정을 찍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최응천 문화재 청장은 “경복궁을 대표하는 핵심적인 상징이었으나 그동안 고증 문제로 논란을 빚었던 현판과 월대 복원의 역사적 진정성을 나름대로 충실히 확보하면서 시민들 앞에 공개할 수 있게 돼 다행스럽고 기쁘다”고 감회를 밝혔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