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울, 등뼈 드러난 고양이가…'새끼'를 물고 왔다

남형도 기자 2023. 10. 13.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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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마리의 유기동물 이야기 - 열여섯 번째, 써스컷] 삐쩍 마른 길고양이, 힘없이 회사 사무실 앞 배회해…"밥 줄테니 내일 꼭 오렴", 그 말에 새끼 고양이 네 마리 데리고 온 모정(母情), 가족 돼 행복하게 지낸 8년의 시간
[편집자주] 이제는 소중한 가족이 된, 유기동물 이야기를 하나씩 들려 드립니다. 읽다 보면 관심이 생기고, 관심이 가면 좋아지고, 그리 버려진 녀석들에게 좋은 가족이 생기길 바라며.

8년간 함께 살며 이젠 집이 편해진 존재가 바라본다. 하나뿐인 나의 가족을. 추운 겨울, 길을 헤매었던, 가장 약했던 시절, 자신을 품어준 이들을. 회색 고양이는 '써스컷'이란 이름이 생겼고, 이름이 생기자 매일 불러줄 이들도 생겼다. 비인간 동물과 인간 동물이 우연히 인연이 닿아 그리 살아가는 이야기를 좋아한다./사진=써스컷을 사랑하는 언니 심서하님
8년 전인 2015년, 몹시 추운 겨울날이었다. 길 위에 사는 존재들에게 한없이 고단한 계절. 뒤지던 음식물 쓰레기도 얼어붙고, 운 좋게 보이면 소소하게 홀짝이던 물들도 다 차가운 얼음이 됐다. 수분이 부족하면 신장에 무리가 간다. 아프거나 굶어 죽거나 얼어 죽는다. 바깥은 그러기 쉬웠다.

눈이 동그란 회색 고양이도, 힘겹게 그해 겨울을 견디고 있었다. 먹을 걸 찾느라 길을 헤매었으나 부질없는 날이 더 많았다. 찬 바닥을 딛는 발걸음은 뗄수록 더 묵직해졌다.

그리 정처 없이 다닐 때였다. 서하씨 아버지가 배회하던 회색 고양이를 보았다. 그의 사무실 앞이었다. "어, 고양이네"하고 말 수도 있었으나 그러지 않았다. 문을 열었다. 바깥을 내다보았다.

회색 고양이는 삐쩍 말라 있었다. 제대로 먹지 못한 듯 했다. 등뼈가 드러나고 갈비뼈가 만져질 정도였다. 몹시 위태로워 보였다.

그걸 본 서하씨 아버지가 이리 말했다. 아마도 고양이가 좀처럼 길에서 들어보기 힘들었을, 다정한 말이었다.

"우리 집에 고양이 사료가 있단다. 그걸 가져와서 줄게. 그러니 내일 꼭 오렴."

다음날, 같은 시간에…고양이가 찾아왔다
삐쩍 말라 등뼈가 보이던, 그해 겨울. 써스컷의 표정도 다르다. 잔뜩 긴장한 게 느껴진다. 살아남기 위해서였으리라. 그러니 어느 존재에게도 온정은 필요한 거다./사진=써스컷을 사랑하는 언니 심서하님
서하씨 아버지는 출근길에 고양이 사료를 챙겼다. 당시 집에선 이미 토실토실한 고양이 하나를 키우고 있었다. 그랬기에 바싹 마른 회색 고양이가 더 맘이 쓰였단다.

회색 고양이와 말로 나눈 귀한 약속. 밥을 주겠단 약속. 언어가 달라도, 고양이가 알아들었을진 몰라도, 약속은 약속이었다. 하물며 이 추운 겨울에, 생사(生死)를 가를 약속이라면 더 그랬다. 잊어버릴 수도 있었으나 그러지 않았다.

다음날, 회색 고양이는 전날과 같은 시간에 사무실 앞으로 찾아왔다. 기막힌 생의 의지였다. 서하씨 아버지는 그릇에 사료를 부어주었다. 앙상한 고양이는 허겁지겁 밥을 배불리 먹었다. 모처럼의 좋은 식사였다.

매일 거의 비슷한 시간에, 회색 고양이가 찾아왔다. '여기에 오면 밥을 먹을 수 있구나', 그리 생각하는듯했다. 칼바람이 불어도 꽁꽁 얼어붙은 세상이어도, 뜨뜻한 난로 같은 곳 하나쯤은 있었다. 그 불을 지핀 건 오롯이, 외면할 줄 모르는 인간의 마음이었다.

회색 고양이는 사무실 안에도 들어오고, 책상을 한 자리 차지하고 앉기도 했다. 하루 한 번, 밥을 먹으러 만났으나 정이 쌓이고 맘을 나누는 시간이기도 했다.

한 달 반쯤 지났을까. 회색 고양이가 임신을 한 채 나타났다. 홑몸이어도 힘든 겨울에 새끼까지 생긴 거였다. 걱정이었다. 어느 날부터인가, 회색 고양이가 보이지 않기 시작했다.

"새끼 돌봐줄게, 데리고 오렴"…그 말에 하나하나 물고 온 고양이
"새끼를 데려와도 돼, 잘 키워줄게"란 말에 하나씩 물고온 어미의 마음이란 어떤 거였을까. 말이 달라도 그리 통하는 게 신기하고 기특하다./사진=써스컷을 사랑하는 언니 심서하님
다시 모습을 드러낸 건 2주가 지났을 때였다. 회색 고양이는 배가 다시 홀쭉해졌다. 힘겹게 길바닥에서 출산한 뒤 돌아온 거였다. 그를 유일하게 맞아줄 집 같은 곳으로.

이를 본 서하씨 아버지가 회색 고양이에게 말했다. 처음 만났던 그날처럼 따뜻했다.

"새끼들 돌봐줄 테니 전부 데리고 오렴. 잘 키워줄 테니."

써스컷이 낳은 네 꼬물이들. 모두 좋은 곳으로 입양갔다./사진=써스컷을 사랑하는 언니 심서하님

다음날이 됐다. 기특하면서도 소름 돋는 일이 벌어졌다. 회색 고양이가 새끼들을 하나씩 입에 물고 온 거였다. 하양, 갈색, 얼룩이, 회색이. 그리 다해 모두 네 마리였다.

그때부터 회색 고양이에겐 '써스컷'이란 이름이 생겼다. 서하씨 아버지가 판매하시는 공구 이름이었는데, 마침 신상품이 나와서 그걸로 지었단다.

마른 몸으로도 새끼들에게 젖을 주는 건 최선을 다했다고 했다./사진=써스컷을 사랑하는 언니 심서하님

그러던 어느 날, 써스컷을 잃어버린 일이 생겼다. 아픈 것 같아 병원에 데려가던 중에, 사거리 12차선을 넘어 쏜살같이 도망갔다. 서하씨는 SNS로 사람들에게 찾아달라고 알렸다. 하늘이 노래졌다.

"써스컷! 써스컷!"하고 새벽에 찾아다닐 때였다. 서하씨 아버지가 테니스코트 쪽에 가서 "써스컷!"하고 부르자, 쪼르르 나와서 그에게 폭 안겼다. 기적 같은 일이었다.

새끼들은 좋은 곳에 입양가고, 써스컷은 둘도 없는 가족이 됐다
나른한 자세로 집에서 한껏 애교를 부리는 써스컷. 눈에서 꿀이 떨어진다./사진=써스컷을 사랑하는 언니 심서하님
그 뒤로 써스컷은 서하씨 집에서 살게 되었다. 평생 가족이 된 거였다. 그 이유에 대해 서하씨는 이리 말했다.

"정이지요. 정이 너무 무서워요. 이름을 지어준 순간부터 원래 우리 가족이었던 것 같아요. 안 보이면 걱정되고, 너무 마음이 쓰여서, 바로 집에 데리고 왔어요."

지금은 무지개다릴 건넌 첫째 고양이 김치(왼쪽)와 둘째로 들어온 써스컷(오른쪽). 합사가 잘 되어서 사이 좋은 가족이 됐다. 김치도 고양이별에서 행복하게 뛰어놀고 있기를, 시간을 잊은듯 짧게 느끼며 지내다 사랑하는 가족들 만나러 부리나케 나오기를./사진=써스컷을 사랑하는 언니 심서하님

첫째 고양이와는 한 달 정도 분리해서 키우다가 합사했다. 둘째 고양이가 된 거였다. 다행히 잘 지냈다.

꼬릴 잡고 장난치는 써스컷. 사랑스러운 작은 존재./사진=써스컷을 사랑하는 언니 심서하님

그리 가족이 된 지 벌써 8년째. 함께 살며 써스컷에 대해 더 깊이 알게 됐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애교가 정말 많단 것. 눈치도 빠르고 말귀도 잘 알아듣는단 것. 셋째 막내 고양이가 들어왔을 때 먼저 다가가 어미처럼 핥아준 것. 그 좋아하는 간식도 다 양보했단 것. 원래는 어느 집에서 키우던 고양이였는데, 잃어버린 뒤 길에서 지내왔었단 것도.

눈이 어찌 이리 예쁘고 크고 동그랄꼬./사진=써스컷을 사랑하는 언니 심서하님

집에서 지내며 살도 오르고 건강히 지내던 써스컷. 그런데 최근 유선종양을 판정받았다. 폐에도 전이가 됐단다. 서하씨는 "매번 써스컷을 볼 때마다 기특하고 짠했는데, 믿기지 않아 눈물도 안 났다"고 했다. 서하씨의, 누구보다 좋은 동생이 된 써스컷. 그에게 언니가 할 말이 있다고 했다.

햇볕을 쬐고 있는 써스컷의 안온한 시간./사진=써스컷을 사랑하는 언니 심서하님

"더 빨리 친해져서 집에 데려왔으면 좋았을걸. 그럼 안 아팠을 텐데, 그리 자책할 때가 있어. 남은 삶은 고통 없이 행복했으면 좋겠어. 사랑으로만 채워졌으면 싶어. 너무 착하고 순해서 더 미안한 우리집 공주님, 써스컷아. 언니가 정말 많이 사랑한단다. 우리 행복하자."

팔에 가만히 기대어 본다. 턱을 괴는 건, 그래도 좋은 존재란 걸 믿는 거다. 닿은 부분의 냄새를 맡는다. 평온해진다. 서로가 서로에게 온기를 기대는 것이야말로, 유한하고 불확실한 세상에서 가장 확실한 방법이란 걸 잘 안다. 그래서 이 사진이 좋다./사진=써스컷을 사랑하는 언니 심서하님


남형도 기자 human@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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