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윤정의 식물 이야기] 깡패 같지만 알고 보면 착한 살림꾼
산사태 예방하고, 토양 건강 유지하고, 곤충 먹여 살리며, 이산화탄소 흡수 효과적
산에서 자라는 대나무는 산죽山竹, 조리를 만드는 산죽은 조릿대. 간단하지만, 조리를 모르는 사람에게 조릿대는 산죽보다 어렵겠다. 산죽은 우리나라 산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다. 조릿대속(Sasa 속)의 조릿대(Sasa. borealis)가 가장 흔하고, 제주에서는 제주조릿대(Sasa. quelpaertensis)가 대세다. 이밖에도 섬조릿대, 신이대(신우대), 조릿대속은 아니지만 문수조릿대, 해장죽, 이대 등이 자생하거나 널리 심어졌다. 등산할 때 산에서 만나는 것들을 산죽 혹은 조릿대라고 부르는데, 반 이상은 맞다.
조릿대풀이라는 식물도 있는데, 조릿대와 거의 유사하지만 조릿대에 비해 키가 작고 줄기가 가늘고 부드러워, 이름 그대로 풀처럼 보인다. 식물을 분류하고 이름을 짓는 일이야 지극히 전문적인 분야이지만, 친절한 이름을 만나면 이해하기 수월하다.
조릿대는 대나무가 살기에는 다소 추운 곳, 어두운 숲 속, 산 높은 곳에서 자라기 위해 몸집을 줄이는 적응을 이루어냈다. 영어로는 난쟁이대나무(왜성 대나무dwarf bamboo)라 불리며, 주로 동아시아에 분포한다.
일본에만 6속 70여 종 이상의 난쟁이대나무 종류가 있다. 우리나라에 주로 자라는 조릿대는 그중에서도 가장 기온이 낮은 곳까지 분포한다. 일본의 조릿대를 일컫는 말 사사ササ가 그대로 조릿대의 속명이 되었다.
조릿대는 대나무 나라에서는 난쟁이이지만, 잔디 나라에선 거인이다. 잔디는 겨울이면 지상부가 죽지만, 조릿대를 포함한 대나무는 '대'가 겨우내 대가 남아 있고, 그 대에서 새 가지와 잎을 피워 마치 나무처럼 여겨진다. 잔디는 분명 여러해살이풀인데, 조릿대나 대나무는 풀일까 나무일까.
기본적으로 뿌리, 줄기, 잎으로의 조직분화가 이루어진 식물은 목부(물관)와 사부(체관)로 이루어진 관다발 조직을 통해 물과 양분을 이동시킨다. 나무는 목부와 사부 조직 사이에 형성층(측방분열조직)이라는 분열하는 세포 조직을 가지고 있는데, 목부-형성층-사부로 이루어진 관다발 조직은 나무줄기를 원형으로 감싸고 있다.
해마다 형성층 분열에 의해, 줄기의 안쪽으로 목부세포와 바깥쪽으로 사부세포가 만들어지면서 줄기의 비대성장이 이루어진다. 줄기 안쪽의 오랜 목부세포는 통로의 기능을 잃고, 세포 속에 리그닌이나 셀룰로오스가 들어차면서, 단단한 목재로 영원히 남게 된다.
한편 나무는 가지 끝에 분열하는 조직(정단분열)이 있어, 이로부터 해마다 새로운 눈이 만들어진다. 그 눈으로부터 새 가지와 잎이 나오며 높이 성장을 한다. 결국 나무란 줄기 가장자리의 형성층과 가지 끝 분열조직에 의해 비대(부피) 성장과 수고(높이) 성장이 이루어지는 식물이다.
반면 초화류(초본)는 형성층 없이 목부와 사부로만 이루어진 관다발이 줄기 속에 불규칙하게 흩어져 있다. 봄에 줄기가 자라면서 만들어진 관다발은 가을이 되면 줄기와 함께 생명성을 다하고 쓰러진다. 살아남는 가지가 없으니 가지 끝 분열조직에 의한 수고 성장도 없다.
조릿대를 비롯한 대나무류의 식물들은 관다발조직이 풀과 같아서 형성층이 없으며, 줄기 끝에도 분열조직이 없어 비대 성장과 수고 성장이 일어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죽순 시기에 만들어진 분열 세포에 의해 한 번의 줄기 성장을 이루고 나면, 굵기든 높이든 더 이상의 성장은 일어나지 않는다.
특이적으로 조릿대나 대나무 종류는 줄기 마디에 분열하는 세포(절간분열조직intercalary meristem)가 있어, 마디 사이가 길어지는 절간 생장이 일어난다. 대나무류의 키는 마디 간 길이가 다 길어진 후 완성된다. 조릿대나 대나무류의 새 가지와 잎 역시 줄기(대) 마디의 절간분열조직으로부터 만들어진다.
나무가 아니기에 대나무류의 줄기는 영어로 '컴Culm'이라 한다. 말 그대로 '대'다. 죽순이 자라는 초기단계에서 줄기 중심부는 '수Pith'라는 조직으로 가득 차 있지만, 죽순이 생장하면서 그 속이 비어간다.
조릿대의 잎은 댓잎 모양 그대로다. 1년 내내 푸른색을 유지하지만, 기본적으로 1년생이다. 조릿대의 새 잎은 5월 이후 새로운 가지가 자라면서 그 끝에서 도르르 말린 채 쭉 나온다. 잎이 말린 시기에 곤충이 구멍을 뚫으면, 펼쳐진 잎에 멋진 기하학적 무늬가 생긴다.
새 잎이 나온 후에도 묵은 잎은 새 잎이 완전히 성장할 때까지 동행한다. 새 잎이 완전히 자라고 나면 묵은 잎의 가장자리에 흰색 테두리가 생기고, 서서히 전체 잎이 하얗게 변하면서 땅으로 떨어진다. 새 잎과 묵은 잎이 시기를 겹치며 피어 있기에 눈치 없는 사람은 조릿대 잎의 세대교체를 알아채지 못한다.
조릿대의 새 잎은 여름이 시작될 때쯤 완전하게 자라 본격적인 생산 활동에 들어간다. 가을이 되면, 키 큰 나무들은 낙엽을 떨구고, 자연스레 숲 아래까지 들어오는 햇빛의 양이 늘어난다. 조릿대는 이 빛을 독점하면서, 겨울이 오기 전까지 여름 못지않은 광합성을 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영양 물질은 땅속 뿌리에 저장되어 새로운 싹, 죽순을 만든다. 낙엽 지는 가을에 유난히 짙푸르고 억센 조릿대 잎 앞에서 숙연해진다.
1년 내내 빳빳한 잎을 가진 조릿대는 다른 식물이 자라는 데 부정적 역할을 한다. 조릿대 밑에서는 씨앗의 발아도 어렵고, 어린 나무가 조릿대를 뚫고 성장하기도 어렵다. 숲을 관리하는 사람들에게 조릿대는 다양한 식물의 출현을 방해하는 골칫거리다. 조릿대를 만나면 반갑지만 얼른 숨어라 말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말하면 대나무만의 숲은 있어도 조릿대만의 숲은 없다.
조릿대는 일생에 한 번 꽃을 피우고 죽는다. 난쟁이대나무이지만 대나무인 것. 대나무의 경우 극단적으로 100여 년 이상의 긴 개화주기도 관찰되지만, 조릿대 종류는 5~7년 내외의 개화주기를 가지며, 개화 집단의 크기도 제한적이다. 수명이 5~7년 정도인 것. 조릿대의 고사에 따른 잎 층의 사라짐은 숲의 다른 나무들에게 좋은 기회가 된다. 햇빛에 자극받은 씨앗이 발아하고, 어린 나무는 신속하게 자라 조릿대의 높이를 넘어선다.
조릿대를 숲의 다양성을 해치는 부정적 식물로 보는 이들도 있지만, 최근에는 긍정적 평가들이 보고되고 있다. 조릿대의 광대한 지하 줄기와 뿌리 조직은 망가진 숲에서 토양의 유실을 막고, 땅으로 질 좋은 낙엽물질을 제공해 토양 생물과 미생물들을 유지시키며, 어린 나무가 뿌리를 내릴 바탕을 만든다고 여겨진다. 산사태를 예방하고, 토양 건강을 지키는 것. 푸르고 무성한 잎층은 다양한 곤충들의 쉼터와 먹이터를 제공하고 이에 따른 포식곤충도 많아져, 곤충 다양성에도 기여한다. 곤충들도 먹여 살리는 셈이다.
식물의 몸체량(단위면적당 건조무게)은 이산화탄소 흡수효과로 환산되는데, 그 어떤 하층식생보다 많이 생산되는 조릿대의 잎과 줄기는 이산화탄소 흡수에 더욱 효과적이다. 밀집한 잎층으로 다른 식물들의 발생을 억제하는 현상을 난폭하고 독점적인 성격으로 비난만 할 수 없게 되었다.
서구인들에게 조릿대는 동양적 정서를 제공하며, 겨울 정원에 매력적인 경관을 만드는 식물이다. 우리나라 도시 녹지에서도 조릿대는 근사한 지피식물 역할을 하는데, 겨울에 푸른 잎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상당한 매력이다. 역설적이게도 조릿대의 상품 정보는 잘 키우는 방법보다 통제하는 방법이나 제거 방법이 더 강조되고 있다. 하나만 소개하자면 '물을 흠뻑 주고 철저하게 파내라'는 식이다.
대나무가 고급 공예품에 주로 사용되었다면, 조릿대의 줄기는 적당한 길이로 가늘고 유연성이 좋아 조리나 복조리뿐 아니라 소쿠리, 키, 채반 등 일상 생활도구의 재료로 쓰였다. 임진왜란 때 화살대로 사용되기도 한 신이대(고려조릿대, Sasa. coreana 그 이름이 예사롭지 않다)는 주로 남부지방에 자연적으로 분포하며, 조릿대보다 길고 유연한 줄기는 낚싯대로, 가는 가지는 연살을 만드는 데 이용되었다. 산죽은 흔하면서 요긴한, 고마운 식물이었다.
조릿대의 잎에는 단백질 성분뿐 아니라 암 치료에 도움을 주거나 성인병 예방에 좋은 성분들이 많다. 하지만, 조릿대를 이용한 식음료의 인기는 별로다. 아름다운 꽃이나 열매도 없이, 억세고 차가운 잎을 가졌고, 무엇보다 너무 흔한 조릿대는 사람의 식욕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판다라면 모를까.
잎을 가는지 조차 모르게 늘 푸르름, 긴장된 자세로 봄부터 가을 늦도록 밀도 있는 삶을 사는 조릿대. 초록 잎 무더기가 하얀 눈에 묻히면, 강제적인 휴식에 대해 안도를 느끼며, "조릿대야, 좀 쉬어라" 하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월간산 10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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