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현의 감성, 골프美학] 이 깊어 가는 가을, 무엇을 할까
이슥하도록 깊은 밤에 예고도 없이 한 통의 메시지가 왔다. 평소 SNS를 잘 하지 않던 지인이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열어보니 '이 깊은 가을에 가볼만 한 골프장 좀 추천 해 달라'고 한다. 순간 지인보다도 필자의 가슴에서 감지하지 못했던 가을바람이 밤새 마음을 쏘다녀 잠을 못 이뤘다.
가을을 탄다고 말한다. 왜 특히 남자들은 가을을 탈까를 인문학적으로 생각해 봤다. 모든 만물이 소생하는 봄은 여자의 계절이라고 한다. 어쩌면 새 생명과 생산의 기저에 깔려 있어서다. 새 생명과 생산에 동원되는 것이 바로 남자이며 모든 생장이 멈추고 생산이 끝나가는 가을은 그래서 남자에겐 불안이고 우울이다. 죽어가는 소나무는 솔방울 씨를 평소보다 몇 배를 더 날린다. 동물은 죽기 전에가 바로 가장 많은 욕구가 생기는데 이 역시 종족본능의 법칙이다.
하지만 인간은 생각을 가지고 있고, 이를 통제하고 산다. 남자가 좀 더 이성적이라면, 여자가 좀 더 감성적이다. 그러나 가을은 여성보다 남성의 감성이 더 지배적이다. 감성(感性), 도대체 감성이 무엇이기에 이 가을 이 늦은 밤에 연락을 했을까. 바람꽃과 지샌 달이 아름다운 몽베르 골프장과 레인보우힐스와 용평 골프장 몇 곳을 추천했다. 그곳에 가면 충만한 감성과 텅 빈 가슴에 바람을 맞으며, 꺼억 꺼억 눈물을 쏟아 내든 간에 실컷 감정을 쏟아내고 오라고 했다.
몇 해 전 골프장에서 라운드를 하다가 발갛게 물든 단풍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저 움직이는 단풍 나뭇잎을 한 참 동안 오래 동안 바라보았다. 함께 라운드 하던 물리학 박사 지인이 "단풍나무 흔들리는 거 처음 보냐며 바람이 흔드는 것이니 그만 가자"라고 했다. 순간 요즘 시쳇말로 '갬성'이 무너지는 듯 했다. 아마도 스님이라면 "나뭇잎이 움직이는 것도, 바람이 흔들리게 만드는 것도 모두 마음이다"라고 했을 것이다.
견월망지(見月忘指)라고 했나. 달을 보라는데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 끝을 본다는 비유다. 살아가면서 참 우린 생각과 삶의 궤도 이탈이 심하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정말 봐야 하는 것은 애써 보지 않는다. 달을 봤으면 손가락을 잊어버리라는 견월망지처럼 이 가을을 보내고 싶다.
골프장에 가면 바람 한 줄기, 지는 낙엽 하나, 바시락 거리며 숲속의 떨어지는 도토리 한 알이 그린 핀에 가까이 붙인 볼보다도 더 기쁘고 감동일 때가 바로 가을 라운드다. 그 붉은 산을 돌아 천천히 숲길을 달릴 때 차에서 들려오는 신계행의 가을사랑 노래가 250야드의 굿샷 보다도 더 굿샷 일 때가 바로 지금이다. 지금 이 아름다운 짧은 가을을 먼 훗날을 위해 생생하게 저장해 두자. 기억은 위대하다. 기억은 과거 경험의 심상, 관념, 지식, 신념, 감정 등을 보존한다. 좀 더 세월이 흐르면 어쩌면 그 가을을 기억하며, 추억하며 빙그레 웃음 짓는 그런 날이 올 것이다.
먼 산에 구름같이 끼는 뽀얀 기운을 바람꽃이라고 한다. 먼동이 튼 뒤 서쪽 하늘에 보이는 달을 우린 '지샌달'이라고 한다. 골프를 하다가 이런 풍경을 많이 보았거나 기억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아름다운 순간, 그 풍경에 대한 말이나 이름엔 관심이 없다. 혹 그 이름을 기억하면 주가가 오른다고 하면 십중팔구는 모두가 외우겠지. 서리가 내리는 늦가을 '서릿가을'에 재산증식을 위한 관심만 갖지 말고 갬성이 뚝뚝 떨어지는 골프장으로 가자. 가서 눈으로 마음으로 그리고 귀로 느끼고 혼탁해진 마음을 씻어내고 오자.
톨스토이는 "예술은 손으로 만든 작품이 아니라 예술가가 경험한 감정의 전달이다"라고 했다. 진정 아름다운 골프는 손으로 일궈 낸 버디와 언더파가 아니라 골프장 자연에서 만났던 구름, 단풍잎, 바람소리, 물에 비친 하늘이다. 낙옆은 져도 그 여름 푸른잎 피우며 반짝이던 풍요로운 그 큰 느티나무는 우리의 기억 속에 끝까지 남아 있을 것이다. 그래서 가을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하지만 텅 빈 가슴을 채울 수 없기에 가을 단풍 그윽한 골프장에서 가을바람 앞에서 커피 한 잔과 노래 한 소절 들으면서 그 쓸쓸함에 대하여 생각해보자. 이 깊어가는 가을에.
글, 이종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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