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단계 ‘하얀 쥐’ 84단계 ‘피아니스트’…종이 한 장에 무아지경

한겨레 2023. 10. 13.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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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 커버스토리]ESC 커버스토리 _ 종이학에서 우주공학까지 ‘종이접기’
지난달 23일 서울 중구 한국종이접기협회에서 이인섭 작가가 한지로 만든 ‘호아친’(남미 아마존에 서식하는 새·2020년 작품)을 매만지고 있다. 스튜디오 어댑터 윤동길 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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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분할 구역에 ‘학 접기’를 할 거예요.” 검은색 무테안경 뒤로 큰 눈을 빛내며 이인섭(31) 작가가 ‘종이접기 마니아’들을 향해 말했다. ‘학은 종이 한장을 다 써서 만드는 것 아닌가?’ 의심하며 강의실 정면의 스크린을 뚫어져라 쳐다본 건 나뿐이었다. 고개 숙인 어린이 9명은 자기 머리를 감쌀 법한 가로세로30㎝ 크기의 종이를 뒤집고 돌리더니 한 귀퉁이에 학 접기의 중간단계인 ‘학 접기 기본형’을 만들었다. ‘학 접기 기본형’은상어, 메뚜기, 로켓, 장미 등 다양한 작품으로 변주할 수 있다.

학 접기가 목적이 아닌 수단이 되는 곳, 지난달 23일 서울 중구 한국종이접기협회에서 열린 ‘종이접기 마니아를 위한 오프라인 특강’이었다. 수강생은 나를 제외하고 전부 초등학교 남학생들이었는데 이들은 2시간 동안 종이 스치는 소리만 내며 수업에 몰입했다.

‘종이접기 마니아를 위한 오프라인 특강’에서 초등학생 수강생들이 종이접기에 열중하고 있다. 스튜디오 어댑터 윤동길 실장

수업을 진행한 이인섭 작가도 어릴 적부터 종이접기 마니아였다. 책을 보면서 독학한 그는 삼성전자 반도체 엔지니어로 일하며 ‘오리가미’ 작가로도 활동 중이다. 종이접기의 일본말인 오리가미는 △정사각형 종이만 사용 △접착 금지 △칼 또는 가위로 분할 금지 △두장 이상 결합 금지 △어느 각도에서 보아도 무엇인지 알 수 있어야 완성품 등의 규칙을 지닌 예술이다.

이인섭 작가는 이날 ‘분자 구조 추가를 통한 창작’을 가르쳤다. 그는 “그냥 종이를 주고 창작하라고 하면 어렵다. 흔히 쓰는 초기 공사법, 즉 기본선 내는 법부터 알려줘야 한다. 선을 미리 만들면 종이를 다루기 쉬워지고, 그다음부터는 아이들도 아이디어가 넘친다”고 설명했다. 수업이 끝날 무렵 아이들의 손에는 고래, 기린, 멧돼지 등 동물 모양이 들려 있었다.

기본선과 산접기와 골접기

수업을 들으며 아이디어가 넘치기는커녕 기본선을 내는 법도 이해할 수 없던 나는 집으로 오는 길, ‘뜯어 쓰는 양면 색종이’를 2000원에 샀다. 미국의 종이접기 작가 겸 물리학자 로버트 랭이 쓴 책 ‘로버트 랭의 완벽한 종이접기’도 도서관에서 빌렸다. 곧장 1단계 ‘하얀 얼굴의 쥐’부터 시작하는데, 그림 설명 아래 적힌 ‘대각선으로 종이를 골접기 하라’는 문구가 발목을 잡았다. ‘골접기’는 접은 선이 골짜기처럼 들어가도록 하는 방식을 뜻한다. 반대로 접은 선이 산처럼 올라오는 걸 ‘산접기’라고 한다.

또 종이접기에는 ‘함몰접기’ ‘뒤집기’ ‘2번 반복하기’ 등 15개가 넘는 ‘접기 용어’가 쓰이며, 각각이 부호화돼 그림 설명 위에 덧붙는다. 하나의 단계(스텝)에 여러 개 부호가 등장하기도 하며, 복잡한 작품일수록 단계는 늘어난다.‘하얀 얼굴의 쥐’는 10단계면 끝나지만, ‘피아니스트’는 84단계로 완성된다.

그렇게 온종일 쥐, 오리, 물고기, 백조, 상어, 로켓, 독수리, 작은 새를 만들던 내가 포기를 선언한 건 토끼의 귀를 접으면서였다. 설명을 반복해서 읽고, 종이를 펼쳐 처음부터 다시 접어봐도 모양을 만들 수 없었다. “종이접기가 쉬운 놀이인 줄 알았는데 막상 해보니 어렵더라”고 토로한 내게 김영만(73) 종이문화재단 평생교육원장은 “처음부터 어려운 것을 하기보다, 인터넷이나 책을 통해기초부터 익혀야한다”고 했다.

책에 적힌 설명만으로 부족하다면 ‘네모아저씨’, ‘종이쌤’, ‘색종이 연구소’ 등 유튜브 채널들의 영상을 활용하는 것도 방법이다. 김영만 원장은 “종이를 접을 때는 각을 뾰족하게 맞추고, 손톱 끝으로 눌러서 다음 과정을 하기 좋게 만들어야 한다”며, 기초를 익힌 뒤에는 전문 강사를 찾아보라고 권했다. 1988년 한국방송(KBS) 어린이 프로그램 ‘티브이(TV) 유치원 하나둘셋’ 등을 통해 어린이들과 소통했던 김 원장은 종이접기를 대중화한 이 분야의 선구자다. 그 옛날 ‘코딱지 친구들’을 격려하듯 김 원장은 말했다. “전문가에게 어느 정도 배우고 나면, 혼자 창작도 할 수 있어요!”

이인섭 작가가 한지로 만든 금동미륵반가사유상(2018년). 이인섭 제공

여러번 접어도 튼튼히 버티는 한지

이인섭 작가는 ‘피에타’, ‘별이 빛나는 밤’ 등의 명화나 회오리·파도와 같은 자연 현상, 페가수스 등 환상 동물을 작품화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다른 분들은 대개 동물을 많이 만드는데, 저는 남들이 안 하는 특이한 걸 좋아한다”고 했다.

“새로운 작품을 만들 때는 제일 먼저 주제를 정합니다. 그 뒤로는 계속 접으면서 설계를 수정해요. 쉬운 건 하루 만에 끝나지만, ‘페가수스’ 같은 경우는 두달 이상 걸렸어요. 설계가 끝난 뒤에 종이 크기를 정하고 맨 나중에 도면을 그리죠.” 작품이 세밀해질수록 종이는 커지고 난도도 높아진다. 작게는 가로세로 10㎝부터 크게는 미터 단위로 넘어간다.

이인섭 작가가 한지로 만든 피에타(2015년). 이인섭 제공

종이접기의 핵심은 ‘종이’ 그 자체다. 이인섭 작가는 “일단 뭘 만들지 결정하면 다음으로 종이의 크기와 색 그리고 재질을 정해야 한다”고 했다. 예를 들어 로봇을 만든다면 겉이 미끈하고 뒤쪽이 포일로 된 포장지가, 토끼를 만든다면 보송보송하고 가벼운 마분지가 더 적절한 선택이 되겠다. 연습을 위해서라면 화방이나 문구점에서 양면·단면·금은·무늬 색종이를 살 수도, 평범한 인쇄지를 쓸 수도 있다. 단, 이인섭 작가는 “종이에 따라 완성도가 크게 달라진다. A4용지로 접으면 아무리 좋은 작품도 넝마 조각 같다”며 완성도 있는 작품에는 좋은 종이를 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런 그가 즐겨 쓰는 건 한지다. 접기가 거듭될수록 종이 바깥쪽에 가해지는 힘이 세지는데, 질긴 한지가 이를 버텨내기 때문이라고.

“종이접기의 매력은 일단 저렴하다는 겁니다. 종이만 있으면 되니까요. 그리고 도면을 만들어서 공유할 수 있어요. 혼자 손으로 뭔가를 만드는 사람들에게 제격이에요.” 네이버 ‘종이접기 카페’의 게시판 ‘국내 창작 작품 도면’에 들어가면, 다양한 창작 도면이 올라와 따라 만들 수 있다.

첫 방송부터 3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수업을 진행 중인 김영만 원장은 종이접기가 지닌 교육 효과를 강조한다. 그는 “색종이 특유의 냄새가 있고, 알록달록한 색깔, 또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있다. 완성하고 나면 3D 입체물이 되니 그림으로부터 얻을 수 없는 효과가 있다”며 종이접기가 인지발달과 창의성을 기른다고 밝혔다. ‘유아교육의 아버지’로 불리는 독일 교육자 프리드리히 프뢰벨(1782~1852)은 일찍이 유아교육을 위해 비행기, 돛단배, 다트, 기하학 도형 종이접기를 고안했고, 일본은 프뢰벨식 종이접기를 초등학교 수업에 활용했다.

이인섭 작가가 한지로 만든 페가수스(2016년). 이인섭 제공

세종시 고등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치는 조성률(27) 교사는 어린 시절 취미였던 종이접기로 종종 학생들과 소통한다. 그는 대학 시절 지역아동센터에서 유치원생 교육 봉사를 하며 오랜만에 종이를 접었다. “티라노사우루스, 브라키오사우루스 같은 걸 접어주니 아이들이 무척 좋아하더라고요.” 올해 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도 종이접기는 효과를 발휘했다. “고3 수학 수업 시간에 상자에 공을 집어넣는 경우의 수를 설명하는 부분이 있었는데, 자는 학생들 흥미 유발을 위해 직접 상자를 접게 했더니 그냥 할 때보다 참여도와 집중도가 높았어요.”

경기 성남시 수정구에 사는 정지후(12)군은 유치원 시절부터 종이접기를 시작했다. ‘뿌듯한 성취감’ 때문이었다. 그가 접는 작품은 꽤 수준이 높다. “용을 좋아해요. 날개, 비늘과 얼굴이 멋져요. 특히 한지로 접으면 더 진짜 같은 느낌이 나요!”

“최대한 포기하지 않고 종이를 반복해서 접는다”는 그는 종이접기에 몰입하기 딱 좋은 근성을 갖췄다. 정군의 목표는 종이접기의 거장 가미야 사토시가 제작한 ‘류진 3.5’. 가로세로 3m짜리 종이로 접는 초대형 용이다.

지난달 23일 서울 중구 한국종이접기협회의 ‘종이접기 마니아를 위한 오프라인 특강’에서 사용된 다양한 색한지. 스튜디오 어댑터 윤동길 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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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접기가 앞당길 우주 개발

종이접기는 뇌 건강 및 혈액 순환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서울 동대문구 회기동 인산한의원의 한진우 원장은 종이접기를 ‘손을 많이 쓰는 행동치료 중 하나’로 본다. 한 원장은 “인간의 신체 중 뇌를 지배하는 영역이 제일 넓은 건 손이다. 그래서 손을 많이 사용하면 치매 등 뇌의 노화 지연에 도움이 된다”고 설명했다. 또 “‘손이 인체 전체를 반영한다’는 수지침 이론에 따르면, 손에 건강한 자극을 주면 전신 건강에도 긍정적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말초 혈액 순환에도 도움을 준다. 옛 어른들이 호두 두알을 주머니 속에서 항상 돌렸던 데도 이런 이유가 있다”고 덧붙였다.

종이접기는 아날로그의 대명사처럼 보이지만, 첨단 공학에도 활용되고 있다. 부품의 형태와 부피를 조정하는 데 ‘접었다 펴는’ 종이접기 원리가 적용되기 때문이다. 우주 탐사에 쓰이는 태양전지판, 스타셰이드(별빛 차단막), 가변형 바퀴 등은 모두 종이접기의 원리를 활용했다. 가변형 바퀴는 바닥 상황에 따라 너비와 지름을 바꾸는 것으로 우주 탐사에 필요한 기술이다.

관련 연구를 진행해온 이대영(35) 한국과학기술원(카이스트) 항공우주공학과 교수는 “처음에는 작은 종이 모형 바퀴에서 출발했다. 로봇이 바퀴의 크기를 바꿀 수 있다면, 계단 등 험난한 지형지물은 큰 바퀴 상태로 통과하고 협소한 지역에서는 바퀴의 크기를 줄여 민첩성을 유지할 수 있다”며 “종이접기를 이용하면 복잡한 기계 부품 없이도 이러한 메커니즘을 만들 수 있다”고 설명했다. 10여년 전 종이로 얼기설기 만들어 100g을 채 견디기 어려웠던 종이접기 바퀴는 이제 1t 이상의 하중을 견디며 사람까지 태울 수 있는 자동차에 적용 가능한 수준까지 도달했다. 달 탐사 등 우주 탐사 로버에 장착 가능한, 크기가 변하는 바퀴를 개발하는 게 목표다.

종이접기 원리를 이용해 개발한 ‘가변형 바퀴’. 서울대학교 소프트 로보틱스 연구센터 제공

“우리는 본격적인 우주 개발 시대를 맞이했고 앞으로는 자원 탐사, 채굴, 거주지 건설 등 더욱 많은 활동들을 해야 합니다. 더욱 다양한 로봇들과 구조물들을 우주로 보내야 하는데 종이접기가 강력한 도구가 될 것입니다. 종이접기를 적용하면 실물의 부피를 줄일 수 있습니다. 종이접기 우주 로보틱스는 우주의 가혹한 환경을 견딜 수 있으면서도, 크기를 압축해 효율적으로 로켓에 실어 보낼 수 있음과 동시에, 형상을 변형해 다양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로봇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종이접기 우주 로보틱스도, 예술로서의 종이접기도 부단한 실패와 노력 끝에 차츰 나아간다. 지난달 23일 ‘마니아 특강’에서도 참석한 모든 학생이 종이접기에 성공한 건 아니었다. 수업이 끝날 무렵 이인섭 작가는 작품을 완성하지 못한 아이를 보고 덤덤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괜찮아요. 선생님도 망했어요. 너무 복잡하게 접다 보니 이상한 모양이 됐네요. 원래 창작이 이런 거예요. 여러 번 해야 뭐가 나옵니다. 다른 사람 거 많이 보고, 만들었다 펼쳐서 선을 이해하려고 하면 실력이 늘 거예요.” ‘로버트 랭의 완벽한 종이접기’의 대출 기한이 하루 남은 시점에 나는 접다 만 하늘색 토끼를 다시 완성할 때까지 여러 번 도전하기로 결심했다.

유해강 허프포스트코리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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