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을 혐오한 어떤 서구인 이야기 [역사의 뒤 페이지]
“백인 여행자가 처음으로 한국에 체류할 경우 처음 몇 주 동안은 기분 좋은 것과는 영 거리가 멀다. 만약 그가 예민한 사람이라면 두 가지 강력한 욕구 사이에서 씨름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낼 것이다. 하나는 한국인들을 죽이고 싶은 욕구이며, 또 하나는 자살하고 싶은 욕구다. 개인적으로 나라면 첫 번째 선택을 했을 것이다.”
한국인에 대해 이토록 강렬한 혐오 발언을 한 주인공은 누굴까? 20세기 초에 활동한 미국 작가 잭 런던이다. 러일전쟁(1904~1905) 취재차 한국에 와서 1904년 2월7일경부터 5월1일경까지 3개월 가까이 한국에 머물렀다. 스물여덟 살, 작가로서 성공의 길을 걷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네 개 매체에 보낸 기사들이 1982년, 프랑스의 한 출판사에 의해 〈잭 런던의 조선 사람 엿보기(원제 La Corée en Feu, 전쟁 속의 한국)〉라는 제목 아래 단행본으로 출판됐다.
러일전쟁은 한국인에게는 일본의 식민 지배로 귀결되는 민족사적 비극의 시작이다. 서구 열강의 시선에서 보면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이어진 영국과 러시아 간 패권 경쟁, 이른바 ‘그레이트 게임’에 종지부를 찍은 전쟁이다. 나폴레옹의 몰락 후 세계의 바다를 지배하는 영국에 도전하는 경쟁국은 더 이상 없었다. 아니, 딱 한 나라가 있었다. 대륙 규모의 영토를 이용해 바다를 통하지 않고도 영국의 패권에 도전하며 남하하던 러시아였다.
흑해 크림반도에서, 이란과 아프가니스탄에서, 티베트와 위구르에서 두 제국이 충돌했다. 곳곳에서 막힌 러시아가 마침내 다다른 곳이 동아시아였다.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완성을 목전에 둔 무렵이었다. 러일전쟁은 그레이트 게임의 대단원이었다. 일본은 영국의 대리전을 치렀다. 미국도 한편이었다. 러시아 뒤에는 프랑스와 독일이 있었다. 제0차 세계대전이라고도 불리는 이유다. 서구의 시선이 집중된 것은 당연했다. 잭 런던의 한국행은 이런 세계사 흐름 속에 있었다.
개화기에서 구한말 사이에 서구인들이 남긴 한국 여행기는 꽤 많다. 널리 알려진 것만 해도 윌리엄 엘리엇 그리피스가 쓴 〈은자의 나라 한국〉(1882), 새비지 랜도어의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1895), 이사벨라 버드 비숍의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1897), 호머 헐버트의 〈대한제국 멸망사〉(1906) 등을 꼽을 수 있다. 여성 최초의 영국왕립지리학회 회원이자 저명한 여행작가였던 비숍의 책은 서구에서 베스트셀러가 됐다.
이런 책에 비하면 잭 런던의 기사들이 미친 영향력은 미심쩍다. 하지만 백인 우월주의자가 내뱉은 헛소리에 불과하다고 치부하기만은 어려운 구석이 있다. 본명이 존 그리피스 채니(1876~1916)인 잭 런던은 당대에 “미국 작가 중 상업적으로 가장 성공한 작가”였다. 그의 대표작 〈야성의 부름〉(1903)은 해리엇 스토의 〈톰 아저씨의 오두막〉, 마크 트웨인의 〈톰 소여의 모험〉, 아서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의 모험〉보다 더 많이 팔렸다. 수없이 영화화됐고 교과서에도 실렸다. 1913년 무렵, 그는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고 돈을 많이 버는 작가라고 스스로 일컬었다.
더욱 문제적인 것은 잭 런던이 급진적 사회주의자였다는 사실이다. 열한 살 무렵부터 노동을 시작한 그는 독학으로 사회주의자가 됐다. 부랑자라는 이유로 구금되는 등 밑바닥 생활을 거치며 “나도 모르게 사회주의자가 되었”다(‘나는 어떻게 사회주의자가 되었나?’, 1903). 25세에 미국 사회당에 입당했고, 〈강철군화〉 〈밑바닥 사람들〉과 같은 자본주의 비판 작품으로도 유명했다. 정치평론과 강연에 매진했고, 선거에 출마하기도 했다. 인간의 평등을 믿는 사회주의자가 어떻게 이렇게 공공연히 인종적 편견을 드러낼 수 있을까?
잭 런던은 왜 그렇게 한국과 한국인을 혐오했을까? 그에 따르면, 한국은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 황제의 사신이 다니던 왕도조차 우스꽝스러운 웅덩이의 연속이었다. 장비 하나하나가 다 문제여서 “20개의 편자는 20개의 문제를 일으”켰다. 하지만 그에게 살인 충동까지 불러일으킨 것은 그런 물질적인 문제들이 아니었다. 한국인의 심성이 문제였다.
“한국인은 나약하고 게으르다”
한국인은 세계에서 가장 나약하고 겁 많은 민족이었다. 러시아군에 맞서기는커녕 모두 도망만 치고 있었다. 사진을 찍으려고 피난민들을 잡아오면 두려움에 울부짖었다. 한국인들은 게으르고 도둑질에 능하며 약자에게 강했다. 황주에 도착했을 때의 일이다. 숙소를 구하려는데 도착하는 마을마다 “십 리만 더 가라”는 상투적인 대답이 돌아왔다. 또다시 “십 리만 더 가라”는 대답이 돌아오자 일행 중 두 명이 권총을 꺼내 들었다. 한국인들은 2분 만에 편안한 곳으로 안내했다.
한국인들이 잘하는 일은 딱 하나 짐을 지는 것이었다. 마치 짐 끄는 동물이라도 되는 양 묵묵히 짐을 지는 데는 선수였다. 하지만 일의 효율성은 형편없었다. 한국인들은 그들의 상전인 ‘왜놈’들을 몸집으로 훨씬 능가하는 건장한 민족이지만, 기개도 맹렬함도 없었다.
반면 일본군에 대한 잭 런던의 인상은 호의적이다. 일본군은 질서, 규율, 효율성, 호전성이라는 측면에서 최고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일본군보다 더 질서정연하고 조용한 군대는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일본군은 무거운 군장을 지고도 흐트러지지 않은 모습으로 행군했다. 일본군은 하나처럼 움직이는 단체였고, 능률 있게 일했으며 한 목표 아래 모두 같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일본군의 ‘영혼’에 대해서라면 그의 태도는 돌변한다. 일본인에게는 생명에 대한 존중이 전혀 없었다. 압록강 도하 작전에서 보듯 인명 피해를 줄일 수 있어도 무리한 정면 돌파로 수많은 일본군이 전사했다. 그것은 자살 공격이었다. “일본은 아시아 인종이다. 그리고 아시아인들은 우리만큼 생명에 커다란 비중을 두지 않는다.”
일본인은 고통에 대한 연민도 없었다. 일본인들은 서구의 기술은 도입했지만 윤리적 발전은 무시했다. 서양인만의 것인 올바름, 바른 양심, 삶에 대한 책임감, 동정심, 우정, 인간의 정 등은 동양인에게 가르쳐줄 수 없었다. 서양인의 역사는 영적인 싸움과 노력의 역사였던 반면, 일본인에게는 이런 면이 전적으로 결여되어 있었다.
한국인에 대한 잭 런던의 평가가 맞는지를 따질 일은 아니다. 그는 마음에 안 들면 거리낌 없이 폭력을 행사하고 총을 겨누는 인물이었다. 서구 문명의 우월성과 서구에 의한 세계 지배를 ‘사실’로 받아들였다. 일본군에 배속된 종군기자로서 일본군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지만, 같은 백인종인 러시아군 포로를 보고는 큰 충격을 받는다. “나는 마치 주먹으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정신이 멍해졌다. 피부는 희고 눈이 파란 사람 한 명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 나는 숨이 막혔다. 목을 조이는 듯한 느낌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그들은 나와 같은 종족이었다. … 그리고 이상하게 내가 창문 저편에 있는 사람들과 연대 관계를 맺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사회주의자로서 그는 세계를 계급 사이의 투쟁으로 바라보았지만, 백인으로서 그는 세계를 백인종과 황인종 사이의 투쟁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적어도 그 순간, 그는 사회주의자가 아니라 백인으로서 러시아군 포로에게 정서적 연대감을 느꼈다. 그의 태도는 이 무렵 서구의 지식인, 엘리트, 일반 민중 사이에서 특별히 예외적인 것이 아니다. 청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을 염두에 두고, 독일 황제 빌헬름 2세가 황화론을 제기한 것이 1895년이었다. 미국에서는 19세기 후반 유입된 중국인 노동자(쿨리)에 대한 혐오 감정이 황화론으로 번졌다.
황화론의 영향력을 과장할 필요는 없다. 황화론은 특정 인종을 대상으로 한 조악한 정치 선동에 지나지 않았다. 황화론을 포함하여 그 시대를 설명하는 ‘보편이론’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던 사회진화론이 훨씬 심각한 문제였다. 영국의 사회학자 허버트 스펜서와 미국의 심리학자 윌리엄 그레이엄 섬너 등이 다윈의 진화론을 단순하게 왜곡한 사회진화론이 시대를 지배했다. 인간 사회의 생활은 본질적으로 생존경쟁이며, 강자가 생존하고 약자가 도태되는 것이 법칙이라고 믿었다. 도태되어야 할 약자를 보호하는 행위는 자연의 질서에 반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사회진화론은 국내적으로는 기득권을 옹호하는 보수주의의 이데올로기로 작동했고, 국제적으로는 제국주의 침략과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 노릇을 했다.
사실 다윈의 진화론은 약육강식의 논리가 전혀 아니다. 다윈에게서 생존하는 것은 강자가 아니라 적합한 자, 즉 적자다. 약육강식이 아니라 적자생존이 진화의 메커니즘인 것이다. 강하거나 우수해서 생존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된 환경에 적합한 종이 자연에 의해 선택된다는 것이 다윈 진화론의 핵심이다. 그래서 공룡은 강했지만 멸종했고, 매머드도 코끼리보다 훨씬 크고 강했지만 멸종했던 것이다. 자연계에 ‘약한 것에서 강한 것으로, 열등한 것에서 우수한 것으로’ 따위 진화의 방향성은 없다.
강자가 약자를 지배한다는 사회진화론
사회진화론은 사회적 약자를 옹호하는 좌파 사이에서도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잭 런던은 그 표본이다. 그의 대표작 〈야성의 부름〉을 보자. 벅이라는 이름의 개가 따뜻하고 안온한 문명의 세계에서 알래스카의 거친 황야로 옮겨진 후 치열한 생존경쟁 끝에 야성을 되찾는다. 〈마이다스의 노예들〉(1901)에서는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겠다고 위협하여 자본가들에게 돈을 뺏는 지식인 프롤레타리아 테러 조직이 등장한다. 자본가 헤일에게 보내는 조직의 편지는 이렇게 주장한다. “강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 … 이러한 방법들로 당신(자본가 헤일)은 살아남은 것이다. … ‘당신과 우리 중 누가 주어진 사회관계 속에서 살아남게 될 것인가?’ 우리의 생각엔 우리가 더 강한 자인 것 같다. 결정은 물론 시간과 법칙이 내려줄 테지만….”
사회진화론을 받아들인 사회주의자 잭 런던처럼, 약소민족이면서 사회진화론을 받아들이고 내면화한 인물들이 있었다. 〈서유견문〉(1895)의 저자 유길준(1856~1914)은 도쿄 유학 중 사회진화론을 받아들였다. 1883년에 집필한 〈경쟁론〉은 “군자는 경쟁하는 법이 없다”라고 믿어온 조선의 유학자가 경쟁을 세상의 기본원리로 받아들였음을 보여주는 전향서였다. “대개 인생의 만사가 경쟁을 의지하지 않는 일이 없으니 크게 천하 국가의 일부터 작게 한 몸 한 집안의 일까지 실로 다 경쟁으로 인해서 먼저 진보할 수 있는 바라. 만일 인생에 경쟁하는 바가 없으면 어떤 방법으로 그 지덕과 행복을 증진할 수 있는가?”
윤치호(1865~1945)도 미국 유학 중 사회진화론을 받아들였다. 인종차별을 겪고 오히려 ‘힘이 곧 정의’라는 사회진화론의 주장을 수용하게 된다. 물론 윤치호는 유길준보다는 내면이 복잡한 인물이었다. 특히 기독교 신앙과 사회진화론 사이의 부조화는 고민거리였다. 1892년 어느 날의 일기에서 이렇게 고뇌한다. “나의 신앙이나 믿음의 가장 큰 방해물은 인종 간의 불평등과 그로 인해서 발생하는 여러 해악들이다. 왜 하나님께서 코카시안과 몽골리안, 아프리카인 등에게 평등한 기회와 동등한 심신의 능력을 부여하시지 않았는가? …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고자 하심에도 못하셨을까? 그렇다면 그의 지혜는 어떤 것인가? 그렇게 하실 수 있으심에도 일부러 하지 않으셨는가? 그렇다면 그의 사랑은 어떤 것인가? 오호, 수수께끼로다!”
약육강식의 질서를 승인하는 약자에게는 독립투쟁도, 계급투쟁도, 차별철폐 투쟁도 의미없다. 그들은 지배할 만해서 지배하는 것이고, 우리는 지배당할 만해서 지배당하는 것이다. 자가당착이지만 피지배자를 길들이는 이데올로기로는 최상이었다.
잭 런던은 작가로서 경이적인 성공을 거뒀다. 대저택을 마련하고 요트로 세계 일주 여행을 했다. 그렇게 성공을 거둔 체제를 타도하려 했다. 이 모순 사이에서 동요하다가 삶이 파괴됐다. 동료들과 불화했고, 말년에는 세상을 등진 채 은둔했다. 사인은 규명되지 않았지만 그의 때 이른 죽음은 자살로 믿어진다. 뒤틀린 삶의 모순을 모른 체할 만큼 뻔뻔한 인물이 못 되었다. 그가 모순 속에서 품었던 파렴치한 사유 중 어떤 것들이 한국인들의 사유에 깊고 넓게 스며들었다. 심지어 아직까지 그 생각을 이어가는 이들이 적지 않다. 잭 런던과 달리 이들은 괴로워하지도 않는다. 그저 세상은 강자가 지배하는 것이라며 부끄럼이 없다.
조형근 (동네 사회학자)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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