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수소 전략 르포] ③영국은 왜 수소車 아닌 수소 자체에 보조금 지급할까?
지난해 4000억원 규모 ‘넷제로 수소 펀드’ 마련
韓, 청정 수소 기준 아직 모호
“영국 정부로부터 자금을 지원 받았다.”
지난달 18일(이하 현지 시각)부터 나흘 동안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잉글랜드 워링턴과 셰필드에서 만난 영국 수소 산업 관계자들이 입을 모아 한 말이다.
18일 에든버러 외곽에 위치한 자사의 공장을 소개해 준 빌 아일랜드 로건 에너지(Logan Energy) 대표는 자사 소개에 앞서 “영국 정부로부터 펀딩을 받게 됐다는 소식을 방금 들었다”며 기쁨을 표했다. 다음 날, 에든버러대에서 만난 안형웅 공대 교수 역시 “이산화탄소 포집 연구와 관련해 “현대중공업과 협력하는 과정에서 정부로부터 펀딩을 받았다”고 말했다.
잉글랜드 워링턴에 위치한 영국 국립 원자력 연구소에서 20일에 만난 로버트 알포드 원자력 에너지 애플리케이션 프로젝트 책임은 “영국 정부의 지원 아래 원자력 수소에 대한 연구가 이뤄지고 있다”고 말했다. 영국의 전력 생산업체인 EDF 에너지의 크리스 키일리 넷제로 허브 및 연구 개발(R&D) 선임 매니저는 같은 날 셰필드에서 열린 AMRC 주최 ‘영국 원자력 수소 현황과 기회’ 행사에서 “영국 정부가 원전수소를 아스팔트 생산 연료로 사용하는 시범 사업인 ‘베이 하이드로젠 허브’(Bay Hydrogen Hub) 프로젝트에 자금을 지원했다”고 강조했다.
◇ 영국 정부, 2조원 규모 수소 프로젝트 지원금 마련
영국은 2050년까지 넷제로를 달성하기 위해 ‘수소 전략’을 마련하면서 그 안에 강력한 보조금 정책을 넣었다. 수소가 청정에너지인 것은 맞지만, 아직은 비싼 수소 가격을 낮춰야 한다는 과제를 풀기 위한 전략이다.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유럽의 천연가스 가격은 MWh당 32달러(약 4만3000원) 미만인 반면, 수소 가격은 운송 가격을 제외하고 MWh당 150달러(약 20만2000원)이상이다.
영국 정부는 국민이나 기업이 감당해야 할 경제적 부담을 줄이기 위해 수소 생산부터 수소 생산 과정에서 발생하는 이산화탄소 포집 및 저장(CCUS), 수소 사용에 들어가는 보조금을 마련했다. 지난달 20일 만난 원자력 및 수소 관련 컨설팅 회사 이퀼리브리언(Equilibrion)의 앨런 심슨 수석 기술자는 “영국 정부의 정책은 수소 생산자와 최종 사용자를 격려하도록 설계돼 있다”고 설명했다.
영국 정부의 수소 관련 보조금 정책은 크게 두 가지다. 우선 영국 정부는 2022년 4월, ‘에너지 안보 전략’을 발표하면서 2억4000만 파운드(약 3962억원) 규모의 ‘넷제로 수소 펀드’(NZHF·Net Zero Hydrogen Fund)를 만들었다. NZHF는 저탄소 수소 생산을 지원하기 위한 펀드로 수소 개발 단계에 있는 프로젝트에 자본금을 제공한다. 영국 정부는 지난 3월, NZHF 지원을 받을 수소 관련 프로젝트를 선정해 3790만 파운드(약 625억6000만원)를 제공했다. 올해 안에 NZHF로부터 두 번째로 지원을 받을 프로젝트를 선정해 발표할 예정이다.
또한, 영국 정부는 수소 생산 기술 혁신을 위해 ‘넷제로 혁신 포트폴리오’(Net Zero Innovation Portfolio·NZIP)도 마련했다. NZIP을 통해 이뤄지는 지원금은 총 10억 파운드(약 1조6507억원)에 달한다. NZIP의 우선순위는 수소 혁신이다. 이를 통해 저탄소 기술 및 시스템 상용화에 나선다는 계획이다. NZIP는 산업용 수소 가속기, 원자력 수소 생산 등을 지원한다. NZIP는 지난 6월, 1차 지원금(2120만파운드·약 350억원)을 수소 프로젝트에 투입했다. 이외에도 영국 정부는 차세대 원자력 기술 개발을 위해 250만 파운드, 이산화탄소 포집 연구를 위해 500만 파운드를 추가로 투입한다.
◇ 수소 이용한 난방 실험, 정부 지원으로 천연가스 가격으로 낮춰
영국에서 진행 중인 대표적인 수소 프로젝트 중 하나는 ‘H100 파이프’(H100 Fife)다. 일반 가정의 난방을 천연가스 대신 수소로 하는 것으로 이른바 ‘수소 마을’ 프로젝트로 불린다. 스코틀랜드 레벤머스에서 진행 중인 이 프로젝트는 영국 전체 온실가스 배출량의 약 23%를 차지하는 가정 난방을 탈탄소화하겠다는 노력 속에서 진행 중이다. 영국에선 주택의 85%가 천연가스 보일러로 난방한다.
이에 영국 정부는 2035년까지 천연가스 보일러를 단계적으로 폐지하려는 목표를 갖고 있다. 거스 매킨토시 영국 에너지 안보 및 넷제로부 선임 고문은 지난달 18일 스코틀랜드 수소 및 연료 전지 협회 주최 행사에서 “2023년까지 동네 시범 사업, 2025년까지 마을 규모의 시범 사업을 시행할 것”이라며 “2024년에는 기존 천연가스 네트워크와 평행하게 설치된 신규 배관을 통해 약 300가구에 그린 수소를 공급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정부 차원에서 시범 사업에 참여하는 가정에는 천연가스와 동일한 가격에 수소를 공급할 것”이라고 말했다.
◇ 영국은 수소 자체에 보조금, 수소차에 보조금 주는 한국과 대조적
이렇듯 영국은 보조금을 ‘수소’ 자체에 지급한다. 언제든지 저장했다 전기로 변환할 수 있는 수소 자체의 가격을 낮추는 것이 수소 사회 전환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수소 가격 자체를 낮추면 수소 생산부터, 보조금을 받은 수소로 전기를 만들어 사용하는 수소 사업이 확산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수소 생산 비용을 낮추는 것은 물론 다양한 사용자를 보유한 엔드-투-엔드(End-to-End) 시스템 구축이 목표다. 수소 생태계의 마지막 단계인 수소차에 보조금을 지급하는 한국과 가장 큰 차이점이다.
물론 이는 영국 정부가 2022년 말 ‘저탄소 수소 표준’(Low Carbon Hydrogen Standard)을 도입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 표준에 따르면 수소 생산은 물론 전기 사용, 이산화탄소 포집 과정에서 배출되는 이산화탄소가 메가줄(megajoule) 당 20g 이내로 배출해야 ‘저탄소’로 분류된다.
여기다 영국 정부는 그린 수소 안에 원자력 수소(원자로에서 생성되는 열과 전기를 활용해 수소를 생산)도 포함했다. 유엔 에너지 분야 협력 기구인 유엔 에너지 역시 원전 수소를 탄소배출이 없는 에너지원으로 인정하고 있다. 이퀼리브리언의 심슨 수석 기술자는 “원전을 이용하면 GW 규모의 수소를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고, 수소 생산 장소도 유연하게 배치할 수 있어 소비자와의 거리를 줄일 수 있다”고 강조했다.
한국에선 아직 무탄소수소와 저탄소수소 등을 포괄하는 개념인 청정 수소 기준이 정해지지 않았다. 지난해 5월 국회 본회의에서 이른바 ‘수소법’으로 불리는 수소 경제 육성 및 수소 안전 관리에 관한 법률 개정안이 통과됐으나, 청정 수소 기준은 대통령령으로 마련되기 전이다.
다만, 수소법은 재생에너지를 이용한 수전해 방식으로 생산한 수소뿐만 아니라 배출되는 이산화탄소량이 일정 기준 이하인 수소 및 수소 화합물을 청정 수소로 정의하고 있다. 이로 인해 현재 기준 마련 중인 청정 수소의 범위에 원자력 에너지를 이용한 ‘분홍(핑크) 수소’도 청정 수소로 분류될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이 일반적이다.
법무법인 세종 프로젝트에너지그룹의 류재욱 변호사는 “영국처럼 수소 자체에 대한 보조금 논의가 시작되려면, 청정 수소에 대한 범위 결정이 우선 이뤄져야 한다”며 “내년부터 청정 수소 발전 시장 입찰이 이뤄질 것이기에 청정 수소 관련 수소법 시행령 및 고시가 신속하게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청정 수소 생산 비용이 높은 상황에서 청정 수소 시장을 형성하기 위해선 수소 생산과 사용, 모든 측면에 보조금을 지급하면 초기 시장 안착에 도움이 될 것”이라며 “시행령 개정안을 살펴봤을 때, 한국도 영국처럼 청정 수소 생산과 사용 모두에 대한 재정적 지원을 할 것으로 보인다”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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