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스피싱 대포통장 추적했더니 의류업체가 나왔다[꾼들의 세계]

박채영 기자 2023. 10. 13. 06:00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유튜브에서 발견된 대포통장 업자 광고
※금융시장이 커질수록 그 속에 숨어드는 사기꾼도 많아집니다. 조 단위의 주가조작부터 수천억원에 이르는 횡령, 트렌드에 따라 아이템을 바꿔가며 피해자를 속이는 보이스피싱까지. 기발하고 대범한 수법은 때론 혀를 내두르게 만듭니다. ‘꾼들의세계’는 시장에 숨어든 사기꾼들의 수법을 들여다보는 경향신문 칸업(KHANUP) 콘텐츠입니다. 더 많은 내용을 읽고 싶으시면 로그인 해주세요!

2021년 10월21일. 김연수씨(가명)는 한 코인 리딩 업체의 유튜브 광고에 혹해 카톡 상담을 받았다. 이들은 “우리가 알려주는 코인 거래 사이트에 투자금을 넣고, 우리가 시키는 대로 코인 매매를 하면 1시간마다 투자금의 0.1%만큼의 수익을 낼 수 있다”고 홍보했다. 연수씨는 바로 다음날 코인 거래 사이트 계좌로 850만원을 보냈다. 하지만 모든 것은 사기였다. 이들이 알려준 거래 사이트는 실제로는 거래가 이루어지지 않는 가짜였다. 연수씨가 돈을 보낸 계좌의 주인은 불과 2주 전에 설립된 의류 업체였다.

금융범죄 조직에게 수사기관 추적을 피할 수 있는 대포통장은 필수품이다. 대포통장 유통만 전문으로 하며 ‘장집’이라고 불리는 관리자 또는 조직이 따로 있을 정도다. 사기꾼들의 세계에서 짧게 쓰고 버릴 대포통장은 ‘앞장’, 자금 세탁을 거쳐 최종적으로 현금을 뽑기 위해 마련한 대포통장은 ‘뒷장’으로 불리며 사고 팔린다. 대포통장을 이렇게 종류별로 팔고 있다는 광고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도 수두룩하다.

금융범죄 조직들은 명의대여자 이름으로 개인계좌를 만들기보다는 주로 명의대여자 이름으로 유령법인을 설립한 뒤 법인계좌를 만들어 쓴다. 의류, 잡화, 식품…. 법인 업종은 상관 없다. 아무 사업이나 내세워 유령법인을 만든 뒤 법인계좌를 찍어내는 식이다. 연수씨가 돈을 입금했던 의류 업체도 이렇게 대포통장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유령법인이었다.

보이스피싱 조직은 왜 유령법인을 만들까

금융범죄 조직이 대포통장을 만들 때 개인계좌보다 법인계좌를 선호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개인계좌가 금융사기에 연루되면 해당 계좌 명의자는 한동안 신규계좌 개설이 제한된다. 법인계좌도 신규계좌 개설이 제한되는 것은 마찬가지다. 하지만 명의대여자가 문제가 된 법인을 폐업한 다음 또 다른 유령법인을 설립해 새로운 법인계좌를 만드는 것까지는 막기 어렵다. 법인계좌는 개인계좌보다 이체 한도가 크다는 점도 장점이다.

법인계좌가 유리한 점은 또 있다. 법인계좌는 피해자가 계좌번호를 누르고 입금을 할 때 예금주 이름으로 사람 이름이 아닌 기업명이 뜬다. 피해자의 돈이 입금되는 범행의 마지막 순간에 피해자의 의심을 조금이라도 덜 수 있는 포인트다. 때문에 보이스피싱 업체들은 법인 등기부의 사업목적은 의류나 잡화 판매로 기재하면서도 법인명은 주식이나 가상자산에 어울리는 것으로 바꾸기도 한다.

‘사이버 금융사기 피해복구 및 예방을 위한 시민모임’의 최정미 단장은 “OO스탁이라는 투자 빙자 사기업체에 대한 제보가 들어와서 법인 등기부를 봤더니, 업종이 ‘셔츠 및 블라우스 소매 판매’였다”며 “피해자들을 속이기 쉬운 이름을 붙여둔 것”이라고 밝혔다.

법인계좌의 취약성이 알려지면서 일부 은행은 유령법인을 걸러 내기 위한 대응책을 마련했다. 법인 고객이 많은 기업은행은 2021년 8월부터 은행에서 처음으로 ‘계좌개설용 사업장 실태조사’ 제도를 도입했다. 법인계좌를 만드는 사업장에 직접 찾아가 실제로 영업을 하는 사업장인지 아닌지 살펴보는 것이다.

전직 은행원의 대포통장 관리법…한도 높이기 위해 기존 법인 매수

저축은행과 보험사에서 11년간 근무했던 A씨는 사기죄로 수감 중 얻게 된 인연으로 보이스피싱 조직에서 일하게 됐다. 가짜 코인 거래 사이트를 운영하면서 피해자들을 속여 투자금을 빼앗는 조직이었다. 이곳에서 A씨는 자신의 금융권 근무 경력을 살려 2021년 9월부터 지난해 5월까지 대포통장을 관리했다.

처음에 A씨는 장집에서 대포통장을 사들이고 관리하는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문제가 발생했다. 명의대여자가 대포통장에서 돈을 빼내 잠적하는 ‘먹튀’가 발생한 것이다. A씨는 ‘우리가 직접 노숙자를 대표로 법인을 세우고, 법인통장을 만드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을 하게됐다.

A씨는 행동에 나섰다. 그는 조직의 총괄 관리자가 알려준 명의대여자 2명의 이름으로 유령법인을 설립하고 법인통장을 만들기 시작했다. 대포통장의 이체 한도를 높일 수 있는 아이디어를 내기도 했다. 그는 총괄 관리자에게 “새로 법인을 설립하면 이체 한도가 낮으니 기존 법인을 매수해 대표 명의자를 변경하는 것이 좋다”고 말했고 이를 실행에 옮겼다.

재판에 넘겨진 A씨는 “통장은 불법 도박 사이트에 이용되는 것으로 알았다. 코인 사기에 사용될 것으로는 예상 못 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법원을 A씨가 유령법인 상호를 코인 거래소에 어울리는 것으로 바꾼 정황 등을 비추어 볼 때 그의 주장이 타당하지 않다고 봤다. A씨는 지난해 12월 서울중앙지법에서 사기와 전자금융거래법위반으로 징역 6년을 선고받았다.

명의 대여자는 책임 없을까

유령법인 대표로 내세울 명의대여자는 어떻게 구할까. 금융범죄 조직들은 소위 ‘장주’로 불리는 명의대여자를 구할 때 온라인에서 대출이나 급전이 필요한 사람을 모집하는 방법을 즐겨 썼다. 때문에 재판에 넘겨진 명의대여자들은 “돈이 필요해 통장을 넘겼을 뿐 통장이 범죄에 악용될지 몰랐다”고 항변하기도 한다. 하지만 범행에 직접 가담하지 않은 명의대여자도 형사 처벌 대상이 될 수 있다.

연수씨가 850만원을 보냈던 유령법인의 계좌도 비슷한 방법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유령법인 대표 B씨는 대출을 알아보던 중 인터넷에서 ‘법인통장을 만들어주면 사용실적을 쌓고 신용등급을 높여서 대출을 받게 해주겠다’는 사람을 알게됐다. 이후 B씨는 2021년 9월부터 한 달 동안 유령법인 3개를 설립등기하고 유령법인 명의로 대포통장도 만들었다. 각 법인 설립등기를 할 때는 매번 다른 등기소를 이용했다.

대포통장은 은밀하게 전달됐다. B씨는 검은색 비닐봉투에 대포통장, 일회용비밀번호생성기(OTP), 대포통장의 비밀번호가 적힌 쪽지를 담아 ‘인터넷에서 만난 사람’이 지정한 건물의 우편함에 넣었다. B씨가 만든 대포통장은 연수씨를 속인 보이스피싱 조직에 흘러들어갔다.

재판에 넘겨진 B씨는 전자금융거래법위반 등으로 올해 1월 전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0개월, 집행유예 2년의 형을 선고 받았다. 법원은 “B씨의 범행은 공전자기록에 대한 공공의 신용과 전자금융거래의 안전성 및 신뢰성을 훼손하는 범죄”라면서도 “B씨가 반성하고 있는 점, 대출을 알아보던 중 범행에 연루된 것으로 보이는 점, 형사처벌 전력이 없는 점 등을 유리한 정상으로 참작했다”고 밝혔다.

참고한 판결문: 전주지방법원 2023. 1. 19. 선고 2022고합218
서울중앙지방법원 2022. 12. 6.자 2022고단2818

박채영 기자 c0c0@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