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에 이름 짓고 분류하기 전에 해야 할 일 [책&생각]
분류학 속 인물 통해 분류 변천사 들려줘
생명 세계 지각하는 ‘움벨트’ 필요성 강조
자연에 이름 붙이기
보이지 않던 세계가 보이기 시작할 때
캐럴 계숙 윤 지음, 정지인 옮김 l 윌북 l 2만2000원
지난해 출판 시장을 휩쓴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과학 논픽션에 홀딱 빠져본 사람이라면, 꼭 읽고 싶어 할 만한 책이 나왔다. 저자 룰루 밀러가 직관과 진실의 충돌에 관한 놀라운 사실을 들려준다며 걷지 말고 당장 뛰어가 만나보라고 했던 그 책, ‘자연에 이름 붙이기’(Naming nature)다. 미국에서는 2009년에 출간됐지만 뒤늦게 번역돼 한국 독자를 만나게 된 이 책은 한국계 미국인 진화생물학자 캐럴 계숙 윤이 썼다. 과학자 부모 밑에서 실험용 생쥐와 함께 놀고 동네 숲을 마음껏 뛰어다니며 유년 시절을 보낸 저자는 자신이 ‘과학의 젖’을 먹고 자랐다고 표현한다. 저자는 예일대에서 생물학을 공부한 뒤 코넬대에서 생태학 및 진화생물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뉴욕타임스에 20년 넘게 과학 칼럼을 연재해왔다.
책을 읽고 나면 룰루 밀러가 왜 이 저자와 이 책을 언급할 수밖에 없었는지 바로 이해가 간다. 분류학자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 그 인물을 바탕으로 과학 이야기를 전개하는 기법은 물론이고 인간이 절대적이라고 믿는 어떤 지식 체계가 얼마나 쉽게 부서질 수 있는 것인가와 같은 ‘과학 너머의 이야기’까지 아름다우면서도 흥미진진하게 들려준다는 측면에서 두 책은 많이 닮았다. 두 작가 모두 ‘크리에이티브 논픽션’의 고수라 불릴 만하며, 어떤 것을 깊고 넓게 알면 어려운 얘기도 이렇게 쉽게 할 수 있구나 하고 감탄하며 읽게 된다.
‘자연에 이름 붙이기’는 분류학 초창기인 18세기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분류학의 거대한 역사적 변천사를 다룬다. 인간이 나무, 물고기, 사자 등과 같이 생물에 이름을 붙이고 그것을 분류하고 체계화한 것이 분류학이다. 이 분류학은 혼돈투성이인 자연에서 어떤 질서를 찾아내고 그것을 개념화하고 보편타당한 기준을 바탕으로 생명의 지도를 만들고자 했던 과학자들에 의해 발전해왔다. 분류학은 ‘과학적 분류의 아버지’인 카롤루스 린나이우스(라틴어 이름, 칼 폰 린네)가 이명법을 만든 뒤 학문의 하나로 자리 잡는데, 다윈이 혜성처럼 등장해 ‘진화’라는 개념을 내놓으면서 패러다임을 뒤흔들어버린다. 이후 수리분류학, 분자분류학, 분기학으로까지 이어진다.
책은 계층과 규칙과 절차를 사랑하다 못해 집착한 칼 폰 린네라는 과학자의 삶과 그 과학자를 탄생시킨 시대를 생생하게 보여주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책에 따르면, 탐험의 시대였던 18세기에는 칼 폰 린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생명의 세계를 수집하고 체계화하고 정리하여 ‘자기만의 자연사 컬렉션’을 꾸리고 싶은 욕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수많은 따개비나 길이가 30㎝가 넘는 개구리, 고래의 음경과 같은 이색 생명체를 전시해놓고 어서 들어오라며 손님을 유혹하는 술집을 상상해보라. 지금은 생경해 보이는 풍광이지만, 그만큼 당시 사람들은 생명에 대한 감각이 살아 있었고 생명 세계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저자는 이 자연에 대한 감각, 인간이 감각을 통해 지각하는 세계를 ‘움벨트’(독일어로 환경, 주변세계)로 지칭하면서, 움벨트가 분류학 창시의 원동력이었다고 설명한다.
18세기부터 21세기까지 과학기술은 눈부시게 발전해왔다. 생명에 이름 짓는 일에도 패러다임의 전환이 거듭 일어났다. ‘생명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고 가정한 뒤 이름을 짓고 분류를 하던 칼 폰 린네 시대의 분류 개념은 다윈이라는 진화론자가 등장하면서 막을 내린다. 흥미로운 것은 다윈이 자연선택 이론과 진화분류학을 확립하기까지의 과정에서 8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따개비를 연구했다는 사실이다. 그 작은 생명체를 관찰하고 어떻게 분류할까를 고민하다 기존 분류 개념 속에서 혼돈에 휩싸였던 그는 모든 생명체는 고정돼 있지 않고 변이하며, 그것이 생명 질서의 핵심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학교에서 다윈의 진화와 자연선택론을 배우지만 왜 그 진화론이 그렇게 의미가 있는지 잘 모르는 사람이 많다. 그런데 이 탁월한 이야기꾼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읽다 보면, 다윈이 당시 사람들은 물론 현재까지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저절로 이해하게 된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과학책이라고 하면 너무 납작한 설명이듯, ‘자연에 이름 붙이기’ 역시 과학책이라고만 할 수 없다. 저자는 생명에 이름을 붙이고 분류를 하는 것과 관련해 생물학에만 천착하지 않고, 인류학과 심리학을 넘나들며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를 돕는다. 민속분류학이나 인지심리학 연구 결과를 보면, 분류학이 만들어지기 이전부터 인류는 생존을 위해 뇌의 특정 부위에 생물을 분류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 ‘움벨트’의 재발견이다. 본능적이고 직관적인 움벨트는 과학에 의해 처참하게 짓밟히고 비과학적인 것으로 치부됐지만, 저자에게는 다시 되살려내야 할 그 무엇이다. 그는 생명 세계를 지각하면서 이름 짓고 분류하는 일을 과학자의 소임으로 던져버리고 더는 움벨트를 작동시키지 않고 생명의 세계와 단절된 현대인들의 위험을 지적한다. 그러면서 그는 이 세계에 닻을 잘 내리기 위해서 또 여섯번째 대멸종 시대의 한가운데 들어선 인류가 움벨트에 눈떠야 한다고 역설한다. 분기학자들이 진화적 분류 체계 연구를 통해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지라도, 움벨트를 작동해 물고기를 물고기로 보는 우리는 ‘물고기는 있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당장 아파트 바깥으로 나가 내 주변에 있는 동물, 식물, 곤충들을 눈으로 보고 느껴보라고 권한다. 과학의 한계를 인정하는 한 과학자의 이 솔직하고도 대담한 여정은 웅장하면서 깊은 감동을 준다.
책의 번역은 ‘물고기는 존재하는 않는다’를 번역한 정지인씨가 맡았다. 출판사는 정씨에게 번역을 맡기기 위해 1년을 기다렸다고 한다. 적확한 표현과 아름답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문장들로 원문의 느낌을 잘 살린 번역도 돋보인다.
양선아 기자 anmad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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