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난 척하지만 세상 물정 모르는…조선의 ‘까오리 외교’

한겨레 2023. 10. 13.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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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전도의 치욕 이후 조선은 청(淸)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1797년 동지사로 파견되었던 서유문(徐有聞)이 알아보니, 사신을 따라온 어떤 조선 선비가 임제춘을 만나 통성명을 하고 조상을 물어본 뒤 "당신 같은 명문가의 후손이 어떻게 머리를 깎고, 옷깃을 왼쪽으로 여미고, 이 왕조에서 벼슬을 하느냐?"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정작 얼음 언 땅에 왕이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린 것은 조선이었다.

조선 사람들은 이 현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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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명관의 고금유사]

삼전도의 치욕을 다룬 드라마의 한 장면.

삼전도의 치욕 이후 조선은 청(淸)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북벌로 복수를 꿈꾸기는 했지만 그게 불가능하다는 것은 공지의 사실이었다. 다만 마음 한켠에 자존심은 남아 있었다. 청과의 협상 끝에 지킬 수 있었던 의관(衣冠)이 그 징표였다. 물론 청쪽에서는 ‘그래, 갓 쓰고 도포 펄럭거리며 전쟁을 잘도 하겠다’며 비웃었다지만, 개의치 않았다.

중국 땅 한족(漢族)들은 변발을 하고 여진족의 옷을 입었다. 조선 사신단은 북경에 갈 때마다 은근히 옷 자랑을 하였다. 너네는 오랑캐 옷을 입고 있지만, 우리는 문명의 옷을 입고 있어! 찍소리도 못하고 청을 섬기면서 속으로는 청은 물론 오랑캐의 옷을 입고 관(冠)을 쓴 한족 역시 오랑캐로 생각하고 우월감에 젖었다. 대단한 정신승리였다.

조선 사신단이 머무르는 북경 옥하관(玉河館) 바로 밖에 임제춘이란 사람의 저택이 있었다. 임제춘은 장사를 하여 돈을 모은 뒤 자식을 가르쳤다.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자식은 과거에 합격하여 한림(翰林)이 되었다. 임제춘은 자신의 집을 찾는 조선 사신단을 후대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조선 사람을 들이지 않았다. 1797년 동지사로 파견되었던 서유문(徐有聞)이 알아보니, 사신을 따라온 어떤 조선 선비가 임제춘을 만나 통성명을 하고 조상을 물어본 뒤 “당신 같은 명문가의 후손이 어떻게 머리를 깎고, 옷깃을 왼쪽으로 여미고, 이 왕조에서 벼슬을 하느냐?”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명나라 명문가의 후손이 어떻게 변발을 하고 오랑캐의 옷을 입고 오랑캐 조정에 벼슬을 하느냐는 말이었다. 임제춘은 조선 사람에게 문을 닫았다.

극히 예외적인 소수를 제외하면 조선 사람들은 같은 생각에 젖어 있었다. 한족들에게 ‘너희는 사실상 오랑캐야!’라는 생각을 불쑥불쑥 내비쳤다. 한족들을 조선 편으로 끌어들여도 시원치 않을 판에 적으로 만들어 버리다니, 무례할뿐더러 현실감각이 전혀 없는 작태가 아닌가. 따지고 보면, 명(明)은 이자성(李自成)의 농민반란군에 의해 붕괴되었던 것이지, 청에 의해 멸망한 것이 아니었다. 정작 얼음 언 땅에 왕이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린 것은 조선이었다. 조선 사람들은 이 현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청도 조선을 믿지 않았다. “몽고는 추접스러우나 마음속에 오히려 갈구리가 없고, 조선은 비록 부드러우나 마음속에 벌써부터 ‘갈구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속내를 들킨 조선에 외교란 것이 있었을까?

1760년 북경에 갔던 이의봉(李義鳳)이 쓴 ‘북원록(北轅錄)’에 희한한 이야기가 전한다. 골동품과 서책을 파는 융복사 시장에서 어떤 사람이 턱없이 높은 값을 부르는 상인에게 소리를 버럭 질렀다. “너는 나를 ‘까오리’로 아느냐?” ‘까오리(高麗)’는 조선 사람을 부르는 말이었다. 중국 사람들에게 조선 사람은 혼자 저 잘난 체하지만, 물정 모르고 장사치에게 늘 속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반면 에누리를 많이 하여 아주 싸게 사는 사람을 ‘대비달자’라고 불렀다. ‘큰 코의 오랑캐’란 뜻의 대비달자는 러시아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에 이어 하마스와 이스라엘 사이에도 전화(戰火)가 타오른다. 국제정세가 혼돈에 빠져드는 것 같다. 전쟁의 종식과 평화를 기원하면서 한편으로 한국의 외교가 ‘까오리의 외교’가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강명관/인문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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