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철주의 옛 그림 이야기] 국화를 사랑하는 시인의 먼 마음

관리자 2023. 10. 13.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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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 그림은 보는 눈마저 서늘해진다.

무엇보다 국화는 낙목한천(落木寒天)에 홀로 꽃을 피우는 존재다.

하고많은 꽃 중에 국화를 무작스레 즐겼다.

'동쪽 울타리에서 국화꽃을 캐다'라는 제목 없이도 이 그림은 도연명의 일상을 그린 줄 다들 알아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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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자로 살아간 中 시인 도연명
그의 느긋한 일상 화폭에 담겨
낙목한천에도 꽃 피우는 국화
애써 절개 내세울 필요 있는가
정선의 ‘동리채국’(17세기, 부채에 수묵담채, 22.7×59.7㎝,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국화 그림은 보는 눈마저 서늘해진다. 꽃이 새뜻하고 향기가 어여쁘니 그렇다. 붓을 잘 만나 맵시가 나겠지만 가슴속에서 먼저 국화가 피어나야 운치가 산다. 그림에 담긴 뜻도 가든하거나 섣부르지 않다. 옛 화가들이 꽃 모양새 너머의 우의(寓意)를 끄집어내려고 애쓴 까닭이다. 매화·난초·대나무처럼 군자이노라 뻐기는 식물도 가상하게 여기긴 했다. 화가는 그들에 비해 별스러운 국화의 덕목을 기어코 찾아낸다.

무엇보다 국화는 낙목한천(落木寒天)에 홀로 꽃을 피우는 존재다. 대견스럽기 그지없다. 또 가을을 맞이하되 서리가 그 색을 지울 수 없고, 갈바람이 그 잎을 지게 할 수 없다. 꽃잎은 얼마나 눈물겨운가. 말라비틀어질 때까지 가지에서 앙버틴다. 여북하면 남송의 화가 정사초가 이토록 애달피 읊었을까. ‘차라리 향기를 끌안고 가지 끝에서 죽을지언정(寧可枝頭抱香死·영가지두포향사)/ 어찌 북풍에 휩쓸려 꽃잎을 떨구겠는가(何曾吹落北風中·하증취락북풍중).’

국화를 입에 올리자고 마음먹으면 이 사람을 빼놓고 얘기하긴 어렵다. 동진의 시인 도연명 말이다. 시시한 벼슬을 버린 도연명은 베옷으로 갈아입고 비바람 겨우 가릴 집에 숨어 살았다. 그의 방에는 줄 끊어진 거문고 하나 놓였다. 뛰어난 소리는 어렴풋하기 마련이라 그는 소리 없는 음악을 즐길 줄 알았다.

그의 국화 사랑은 자자했다. 하고많은 꽃 중에 국화를 무작스레 즐겼다. 시속을 떠난 은자의 텅 빈 마음자리가 여무지게 표현된 그의 명구가 있다. 누대에 걸쳐 암송되는 대목이 바로 ‘동쪽 울타리에서 국화를 따다가(採菊東籬下·채국동리하)/ 한가로이 남산으로 눈을 돌리네(悠然見南山·유연견남산)’이다.

그는 술을 마시다가 흥취가 일면 국화를 따 들고 무연히 남산을 바라봤는데, 이 음전한 포즈가 중국 문학사를 수놓은 도연명의 강고한 이미지가 돼버렸다. 국화는 그에게 은둔하는 품성을 길러주었고 흐린 세상을 건너는 싱그러운 방편이 되었다. 마침 겸재 정선이 부채에 그린 ‘동리채국(東籬採菊)’에 바로 그이가 등장한다.

‘동쪽 울타리에서 국화꽃을 캐다’라는 제목 없이도 이 그림은 도연명의 일상을 그린 줄 다들 알아먹는다. 사립문을 열고 나온 그가 소나무 쪽에 앉아 있다. 울타리 밖에 오종종하게 심어놓은 국화는 샛노랗게 물들었다. 물끄러미 먼 데 산을 바라보는 노인의 품새가 올곧아서 외려 놀랍다. 무릎 앞에 뒹구는 술잔과 꺾어놓은 꽃가지들이 어쩐지 심상찮다. 우리 귀에 익은 노랫가락 한 대목이 설핏 떠오른다. ‘곳나모 가지 것거 수(數)노코 먹으리라’ 하는 흥얼거림 말이다.

한잔 술에 국화 한잎, 두잔 술에 국화 두잎, 꽃으로 셈 놓으며 마시는 그의 한가로움이 부럽다. 도연명은 자작시에서 일찍이 명토 박은 바 있다. ‘술은 온 가지 근심 떨쳐 없애고(酒能祛百慮·주능거백려)/ 국화는 늘그막에 붙들리지 않는다네(菊解制頹齡·국해제퇴령)’라고. 그는 양기가 벅차오르는 국월(菊月)이면 달달한 국화주로 노년을 달랬다. 저 느긋함이 시비에 귀 막고 사는 그다운 뱀뱀이일 테다. 무서리를 이기는 절개를 내세우지 않고도 국화는 먼 마음을 데리고 사는 자의 단짝으로 넉넉했다.

손철주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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