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키부츠‘에서 '노동자 공동체' 꿈을 보다
[신금호 전 서울지방노동위원장]
'불로 짓는 농사' 염농(焰農). 정확하게는 불로 짓는 '그릇 농사'라는 의미다. 현장 활동가로, 노동잡지 편집장으로, 서울·경기노동위원회 위원장으로, 노동의 세계에 근 30년을 몸담았던 신금호 선생이 은퇴 후 도예가의 길을 걸으며 사용하는 아호다.
1944년 생인 신 선생은 서울대 정치학과 출신 엘리트의 영예를 좇지 않고 '조국 근대화'가 빚어낸 불의에 몸과 머리로 맞서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의 길로 향했다. 팔순을 바라보는 지금도 '그릇빚음'을 잠시 멈춘 시간에 골프장 미화원으로 일하는 노동자다.
최근 주변의 권유로, 손자에게 꼭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자서전에 꾹꾹 눌러 담았다. 젊은날 정면으로 마주했던 군사정권 시대상, 사회에 나와 겪었던 척박한 노동 현장의 기억을 농사짓듯 기록했다. 시대에 저항하고 자연에 순응한 어느 '백발 노동자'가 견뎌 살아온 이야기를 연재한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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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 좋게도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한동안 좁혀져 오는 계엄사와 국가정보원의 그물망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됐다. 서른여덟 살 생애 처음으로 비행기에 올랐다. 그리고 도쿄와 홍콩을 거쳐 남태평양과 인도양 하늘과 사우디아라비아와 지중해 하늘을 날았다.
아테네에 도착한 즉시 이스라엘 항공기로 갈아타고, 이스라엘 텔아비브 벤구리온 공항에 내렸다. 이스라엘과 레바논이 전쟁 중이던 시기였으나 이스라엘 내부는 평온했다. 아마도 이스라엘은 일방적으로 레바논에 폭탄을 퍼붓던 중이었었던 듯하다.
벤구리온 공항에 착륙한 날은 화창하고 따듯한 날씨였다. 국제 협동조합 교육장은 텔아비브 해안가에서 멀지않은 곳에 있었다. 텔아비브는 유명한 국제도시임에도 불구하고 높은 건물이 드물었다. 또한 예루살렘은 백 리 밖 중부내륙 고지 위에 올라있었다.
자유, 홀가분함! 계급 계층사회로부터의 자유와 해방, 그리고 가정경제 올가미로부터의 자유, 분단돼 억눌린 대한민국으로부터의 자유, 반공법으로부터의 자유! 마음은 맑디맑게 개어있었다!
교육 참가자들은 케냐, 나이지리아, 콩고 등 아프리카 국가들에서 온 흑인 젊은 남녀들과 인도, 태국, 필리핀, 일본 그리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전부였다. 2인 1실로 배정받은 방에 짐을 풀고 식당으로 갔다. 뭔가 달랐다. 공간이 넓고 높고 청결했다. 분위기도 밝고 맑았다. 사방이 시원하게 툭 터 있었다. 식단도 마찬가지였다. '깔끔', '자유롭게', '먹고 싶은대로'. 따듯한 수프에 알맞게 살이 오른 닭고기 등. 후식도 풍성하고 깔끔했다.
방으로 돌아와 다시 보니 작은 침대 두 개에 화장실도 따로, 샤워실도 따로, 걸터앉을 만한 공간이 있는 창문도 있었다. 배정된 교육생들 방은 모두 1층 복도 양옆에 배치돼 있었다. 그리고 자료실과 사무실 등은 이층에 집중돼 있었다.
통용어는 영어. 나는 그렇게나 많은 세월 영어공부를 했으나 십 수 년 간 대화 경험이 전무한 처지였다. 그마저도 영어 읽은 지도 이십 년 이상의 세월이 지났다. 그러하니 의사소통이 되겠는가. 돌아가는 상황은 재빨리 사전과 눈치만으로 짐작해야 했다. 소위 나대로 독심술(讀心術). 영한사전은 언제나 지니고 다녀야 했지만, 다행히도 우리나라 참가자 중에 영어나 히브리어에 능통한 현지의 유학생이 끼어 있어 천만다행이었다.
그런 중에도 아프리카, 인도, 스리랑카, 동남아 곳곳에서 모여든 모든 젊은이들은 스스러움도 없고 천진난만해 마냥 좋았다. 특히 아프리카인들은 모두가 착했다. 케냐와 나이지리아에서 온 여성들은 활달하고 키도 크고 마냥 싱그러웠다. 영어로 된 강의와 토의나 발표 과정은 부족한대로 때워 나갔다.
나머지 과정은 모두 현장 탐방이었지만, 나에게는 돈으로 따질 수 없는 진귀한 여행이었다. 이스라엘 노동총동맹 히스타드루트가 제공한 버스를 타고 동서남북 곳곳을 휘돌았다. 북으로는 골란 고원을 거쳐 레바논과 시리아, 이스라엘에 걸친 해발 2814m의 흰 머리의 헤르몬산 아래 계곡에서 솟아나는 맑디맑은 계곡물에도 발을 담갔고, 요르단강의 입구, '평등'과 '노동'의 공동체 마을 키부츠의 원조 격인 데가니아 마을에서도 하룻밤을 묵었다.
유대인과 이슬람인들, 기독교인들이 섞여 사는 예루살렘 성소들, 예수의 탄생지 베들레헴, 어린 시절 예수가 살던 나사렛 마을, 산상설교 언덕에도 머물렀다. 세계사의 숨찬 현장이자 십자로인 이스라엘의 사막 한 가운데에 누워 옛 병사들이 본 하늘의 별들을 보았고, 풀 한포기 없이 헐벗어 돌만 구르는 허허벌판을 걸었다.
헐벗은 땅일지라도 바빌로니아, 아시리아, 페르시아, 로마, 십자군병과 사라센인들의 발자국이 겹겹이 찍혀 있는 땅이고, 이집트, 터키, 동유럽을 떠나 2천 년 간 버려진 땅을 자기들 손으로 개간하겠다고 나선 유대 젊은이들의 땀과 소망과 눈물이 배인 땅이었다. 독일에 의해 살육된 6백만 유대인들의 비원도 이 땅에 함께 묻혀 있으리라.
자본주의 속 이상 사회
이스라엘과 아랍인들의 여러 촌락들을 지났다. 요단강 곁에 붙어있는 잘 정돈된 마을에서 하루를 머물며 식사도 했고 잠도 잤다. 그곳이 이스라엘 최초의 노동자 협동마을 키부츠, 데가니아였을 줄은 나중에야 알았다. 협동마을 '데가니아'라는 이름은 마을을 흐드러지게 뒤덮은 풀꽃 '수레바퀴'에서 따왔단다.
이집트와의 국경선을 따라 달리다가 이스라엘 안쪽에서 멈추어 선 곳은 키부츠, 스데 보케르였다. 이곳이 이스라엘 건국 지도자요, 초대, 3대 수상이었던 벤 구리온(1886~1973)이 수상직을 내려놓은 뒤 돌아와 낮에는 멤버들에 섞여 노동하고 밤에는 자서전을 쓰다 죽어 묻힌 곳이란다. 마음이 숙연해져 왔다. 그의 무덤과 삶에 머리 숙이고 두 손을 모았다.
모든 것이 멤버 공동의 재산이자 공동의 일터, 꿈과 이상도 혼자가 아니라 모두가 함께 이루어내려는 곳, 키부츠. 혼자라면 정말로 키부츠 어느 한 곳에 묻혀 살고 싶었다. 이스라엘의 사막 곳곳에 심어져 있는 노동자 공동체 마을 키부츠는 움츠려 있던 내 마음 안에 자본주의 속에도 이상사회를 이룰 수 있다는, 꺼지지 않는 꿈과 이상의 불씨를 심어주었다.
노동자의 마을(worker's village) 키부츠나 모샤브는 내가 머물러 살고 싶은 이상(理想)의 세계요 꿈의 세상이었다. 이때의 마음을 간직했던 나는 귀국하고 여러 해가 지나 빈손의 자유인으로 시골에서 지낼 때 '요르단 강가의 작은 마을 키부츠 데가니아' 이야기를 우리말로 번역했고, 또 다른 키부츠 '크파르블룸' 영문판도 번역했지만, 사회에 내놓지 못하고 지금도 내 시골집에 원고로만 남겨뒀다. 쓰일 날이 있으면 좋으련만.
예정된 넉 달이 지나 마무리할 시간이 되었다. 키부츠와 관련된 책을 도서관에서 뽑아내 열심히 읽고 익혔고, 교육의 모든 과정도 막을 내렸다. 이젠 가야 한다. 텔아비브를 떠나야 한다. 기왕 돌아가는 길목이니 파리에서 '파리의 택시기사' 홍세화도 보고, 미국 워싱턴에서 사업에 성공한 이선구도 보고 가자. 이제 아니면 언제 보랴. 계획대로 귀로 중 홍세화 집에서 이틀을 묵었고 워싱턴에서도 이틀을 머무르며 대학에 다닐 때 제일 가까이 지냈던 이선구도 만났다.
[신금호 전 서울지방노동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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