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브스夜] '꼬꼬무' 대한민국 역사까지 바꾼 '1984 서울대홍수'…기적들 만들어 낸 사람들의 그날
[SBS연예뉴스 | 김효정 에디터] 1984년 서울대홍수는 무엇을 바꾸었을까?
12일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에서는 '우리가 살아남은 이유 - 1984 서울대홍수'라는 부제로 역사까지 바꾼 서울대홍수를 조명했다.
지난 1984년 9월 1일 서울, 이례적인 폭우로 대홍수가 일어났다. 홍수경보까지 발효된 상황에서 한강 수위는 계속 상승했고, 24시간 언론에서는 수해 특보가 이어졌다.
곳곳에서 사망자만 무려 100명을 넘긴 침수와 산사태에 대한 피해 소식이 전해져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그런데 이때 서울의 운명을 쥐고 있는 곳은 다름 아닌 춘천의 소양강댐이었다.
춘천 지역의 폭우로 소양강댐의 수위는 한계치를 육박했고, 이에 조금이라도 빠르게 수문 개방을 해야만 했던 것. 만약 수문을 개방하지 않아 물이 넘쳐버릴 시에는 댐까지 무너질 수도 있는 상황에서 소양강댐 직원들은 댐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그리고 같은 시각, 서울의 한강홍수통제소는 서울 시민들을 지키기 위해 또 다른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춘천과 서울의 운명이 걸린 팽팽한 줄다리기.
한강홍수통제소는 소양강댐의 수문 개방을 계속 반대했다. 서울의 홍수가 정리되지 않은 상황에서 소양강댐의 수문이 열리면 홍수 피해는 더욱 증가할 수밖에 없었던 것.
소양강댐 직원들은 최악의 상황을 막기 위해 홍수통제소에 수문 개방을 계속 부탁했고, 결국 홍수통제소는 초당 700톤 방류를 허락했다. 당시 수문을 열 때 지옥의 문을 여는 기분이었다는 관계자의 말을 빌어 당시 소양강댐의 직원들이 어떤 마음이었을지 짐작하게 했다.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졌던 서울의 다음날은 비도 잦아든 상태였다. 이에 시민들은 민간 구조대가 되어 서로를 구했다. 특히 특전사 군의관 출신의 윤철 씨는 자신의 고무보트를 타고 주민 100여 명의 구조를 해 감탄을 자아냈다.
오전 8시 호우 경보가 주의보로 하향 조정되었지만 피해는 계속 이어졌다. 폭우로 인한 사망 189명 실종 150명, 재산 피해 5,500억 원에 이재민만 20만 명 이상 발생했다.
그리고 같은 시각 방류를 시작한 소양강댐은 다시 비상이 걸렸다. 수문 개방 후 나가는 물보다 들어오는 물이 더 많아 수문을 열기 전보다 수위가 더 높아졌고, 최대 수위까지 2미터도 남지 않는 상황까지 갔다. 그리고 발전소 건물 전기까지 나가 직원들의 걱정은 더욱 깊어졌다.
급기야 마지막을 각오한 직원들은 사택에 있는 가족들에게 전화를 걸어 마지막 인사까지 전했다. 그리고 소양강댐 측은 최후의 방법으로 수문 완전 개방에 대한 허가를 구했다.
몇 시간의 줄다리기 끝에 홍수통제소는 수문 완전 개방을 허락했고, 이에 오후 5시 소양강댐의 수문이 완전히 개방됐다. 이는 최고 수위까지 단 21센티 남은 시점이었다.
하지만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었다. 수문 완전 개방에도 수위는 떨어지지 않고 담당자들은 발만 동동 굴렀다. 이를 보던 당시 책임자는 직원들에게 최고 수위까지 2미터도 남지 않는 시점에 모두 떠나라며 자신이 끝까지 남아 댐을 지키겠다고 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댐을 떠나지 못했고, 간절한 마음으로 수위가 떨어지길 기도했다. 그리고 몇 시간 후 수위가 1센티미터씩 떨어졌고 어느 순간 수위가 잡혔다.
저녁 8시 직원들은 "이제 살았다"라며 환호성을 질렀다. 그러나 기뻐하던 것도 잠시 다시 사색이 되었다. 방류를 하면서 생긴 물보라로 발전소에 물이 들어차며 침수가 되었던 것. 이에 전 직원들이 나서 침수를 막기 위해 고군분투했으나 자연재해를 막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발전소에 고립된 직원들, 그리고 그들을 기다리는 사택의 가족들은 발전소에 남은 이들이 모두 죽었다고 생각하며 슬퍼하고 있었다.
직원들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발전소를 삼키려는 물, 그것을 막으려는 사람. 결국 기적은 일어나 수위가 잠잠해졌다.
그리고 이때 유속을 확인하러 갔던 직원들이 도로 상황이 나아지며 돌아왔고, 이틀 동안 먹지도 자지도 못한 직원들은 돌아온 직원들이 들고 온 생라면을 부숴 먹으며 숨을 돌렸다.
하지만 직원들은 그 후에도 한동안 댐을 떠나지 못했다. 수문도 닫고 발전소 재정비도 해야 해서 일터를 끝까지 지켰던 것이다.
그 후 4일간 수문 방류가 끝나고 수문이 모두 닫혔다. 그리고 홍수 피해를 입은 전국 각지에서는 수해 복구 작업이 시작됐다.
또한 소양강댐 사무실 직원들은 100일 만에 모든 시설을 복구하라는 명령을 따라 100일 전에 수해 이전으로 복구를 완료했다.
기록적인 대홍수였던 당시, 우리나라의 사정을 안타깝게 여긴 북한이 우리나라를 돕고 싶다고 연락을 해왔다. 이에 우리나라도 그들의 도움을 받기로 했고, 북한은 적십자사를 통해 쌀과 옷감들을 보냈다. 이는 북한이 물자를 보내온 유일한 때이기도 했다.
그리고 다음 해 분단 이후 최초의 이산가족 상봉으로 이어졌다. 대한민국을 뒤흔든 물난리가 역사까지 바꾼 것이었다.
대홍수 이후 경각심은 더욱 커졌고, 이에 만약의 상황을 위한 대비책이 늘어났다. 위기 속에서 한걸음 또 나아가게 된 것이다.
준공 50주년을 맞은 소양강댐. 분명 자연재해는 인간의 힘으로 막기는 어렵다. 그러나 인간의 힘이 모이면 상상 이상의 힘을 내기도 했다. 수십 년 전 소양강댐을 지켜낸 직원들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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