험한 세상, 해피엔딩을 꿈꾸며… 美 로맨스 소설 열풍
지난 9일(현지 시각) 미국 뉴욕 브루클린 주택가 인근 한 서점 안으로 사람들이 끊임없이 들어왔다. 왁자지껄 소리를 내며 함께 들어온 여성 세 명, 혼자 온 여성과 남성 등 다양했다. 커플로 보이는 남녀는 성애물(性愛物)을 의미하는 ‘erotica(에로티카)’라고 표시된 코너에서 책 한 권을 꺼내 한참을 넘겨 보면서 속닥였다. 가게 안 인테리어는 은은한 파스텔톤 분홍과 베이지가 섞여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고, 입구에 앉아 있는 여성 점원은 들어오는 손님에게 한 명도 빠짐없이 웃으며 “안녕하세요”라고 말을 건넸다.
이곳은 로맨스 소설만 전문으로 파는 서점 ‘The Ripped Bodice(립트 보디스, 찢어진 보디스)’다. 보디스는 코르셋 위에 입는, 여성 드레스의 상체 부분을 뜻한다. 이 상점은 주로 온라인으로 개인 투자자에게 자금을 모으는 ‘크라우드 펀딩’ 방식으로 9만달러(약 1억원)를 모아 2016년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에 1호점을 냈다. 이어 지난여름 브루클린에 2호점을 냈다. 뉴욕타임스(NYT)가 메트로폴리탄(Metropolitan) 섹션 커버 스토리로 다루는 등 현지에서 화제를 모으고 있다.
이 서점이 2호점까지 내게 된 배경엔 최근 미국에 불어닥친 ‘로맨스 소설’ 열풍이 있다. ‘퍼블리셔스위클리(Publishers Weekly)’에 따르면, 지난해 미국에서 로맨스 소설 판매량은 전년도보다 52% 증가했다. 같은 시기 논픽션 도서 판매량은 10% 감소했다. 2호점이 문을 연 지난 8월 NYT 선정 베스트셀러 15권 중 8권이 로맨스 소설이었다.
미국만의 현상은 아니다.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영국에서 로맨스 소설의 판매량은 3년 동안 110% 증가해 연간 5300만파운드(약 875억원)어치가 팔렸다. 몇 년 전만 해도 서점들은 로맨스 소설을 비치해 놓는 것조차 수줍게 여겨 구석 책장에 숨겨두다시피 했는데, 지금은 상황이 정반대로 바뀌었다. NYT는 “로맨스 소설 팬들은 디지털보다는 종이 책을 사는 것에 상당히 관심이 많다”면서 “이들은 그런 유의 소설을 읽어본 적 없는 친구들에게 자기 책을 빌려주기도 한다”고 했다.
립트 보디스 2호점 주인 베아 코흐(33), 레아 코흐(31) 자매는 본지 이메일 인터뷰에서 “로맨스는 희망과 즐거움을 주는 장르다. 지금 많은 분들이 그것을 갈망하고 있는 듯하다”고 했다. 로맨스 소설 분야를 연구한 자야시야 캄블레 라과디아 칼리지 교수는 “로맨스 소설에서 ‘해피엔딩’은 양보할 수 없는 부분”이라는 점을 최근의 인기 요인으로 꼽았다. 3년 넘게 이어졌던 코로나 팬데믹,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전쟁 등 ‘어두운 뉴스’가 쏟아지는 가운데 책에서만큼은 ‘분홍빛 결말’을 보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코로나 팬데믹 때 사용이 늘어난 틱톡 등 소셜미디어도 로맨스 소설의 폭발적 인기에 도움이 됐다. 코흐 자매는 “당시 집에 갇혀 있다시피 한 젊은이들이 로맨스 소설을 읽는다는 것을 틱톡 등 소셜미디어에서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기 시작하면서 로맨스 소설이 유행처럼 번졌다”고 했다. ‘립트 보디스’의 ‘사진발’ 잘 받는, 핑크로 가득한 인테리어도 소셜미디어 공유용으로 좋다. 인터넷으로도 살 수 있는 책을 굳이 책방에서 사고 싶어하는 이들이 적지 않은 이유다.
로맨스 소설 독자들은 여전히 여성이 많지만, 최근엔 다양한 연령층에서 남녀 모두가 로맨스 소설을 찾는 추세다. MLB(미 프로야구) 수퍼스타 브라이스 하퍼(31)는 지난 4월 남성 잡지 인터뷰에서 로맨스 소설을 읽으면서 긴장을 풀고 스포츠 세계에서 탈출하는 기분을 즐긴다고 밝혀 화제가 됐다. 앞서 지난해 미국로맨스작가연합은 로맨스 소설 독자 중 18%가 남성으로 파악된다고 밝혔다.
요즘 트렌드는초자연적 현상과 판타지를 배경으로 한 로맨스 소설의 부상(浮上)이다. 악마나 유령, 용 등과 싸우는 과정에 피어나는 사랑을 담아내는 소설들이다. 코흐 자매는 로맨스 소설을 잘 모르거나 좋아하지 않는 한국 독자들에게 이 말을 하고 싶다고 했다. “로맨스에 너무 늦은 때는 없어요. 읽으면 행복해지는 책을 원한다면, 로맨스 소설이 당신을 위한 장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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