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전직이 행정, 속기사가 홍보...종로구의회, 여야 다툼에 1년째 파행
지난 11일 오후 4시 서울 종로구의회 11층 의원실이 있는 복도는 불이 꺼져 있었다. 전체 의원실 11곳 중 불이 켜진 곳은 3곳뿐이었다. 의회 사무국 직원이 “두 달 만에 문을 열어본다”며 열어준 상임위원회 회의실은 자리마다 놓인 메모장과 필기구가 새것처럼 가지런했다.
‘정치 1번지’ 종로구의 구(區)의회가 1년 넘도록 파행하고 있다. 의장 선출을 두고 여야가 갈등을 빚어 예산안 심사, 조례 제·개정, 행정 감사 등 의회 기능이 사실상 멈췄다. 최근엔 의회 사무국에 파견됐던 종로구 공무원 12명이 구청으로 복귀했다. 사무국 전체 직원의 3분의 1이 넘는 숫자다.
종로구의회는 작년 7월 출범했다. 국민의힘 5명, 민주당 6명으로, 민주당 의석이 과반이었다.
갈등은 의장 선거 과정에서 시작됐다. 민주당 소속이던 라도균 의원이 민주당의 의장 후보 경선에서 탈락하자, 7월 4일 곧바로 국민의힘에 입당해 의장 후보로 등록한 것이다. 라 의원이 당을 옮기자 국민의힘이 다수당이 됐고, 라 의원은 의장에 당선됐다. 의장은 사무국 직원의 인사권과 의회 소집권 등을 갖고, 월 350만원의 업무 추진비와 관용 차량(제네시스), 운전기사, 전담 비서 2명 등이 딸린다. 행사에 참석할 때는 구청장과 똑같은 의전을 받는다.
문제는 의장 선거가 작년 7월 8일 밤 12시 10분쯤 국민의힘 의원들 단독으로 진행됐다는 것이었다. 민주당은 “무효”라며 직무 정지 가처분 신청과 선거 무효 확인 소송을 제기했다. 법원은 지난 2월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였고, 지난 5월 본안 소송도 민주당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절차적 하자가 중대하고 명백해 무효”라면서 “의장 선거는 물론 권한 없는 의장이 진행한 부의장 및 상임위원장 선거 역시 무효”라고 했다. 당시 국민의힘 의원 6명은 선거를 통해 의장과 부의장, 상임위원장 네 자리를 모두 나눠 가졌다.
한 달 뒤인 6월 22일 국민의힘 의원들은 보궐선거를 또 단독으로 진행해 라 의원을 다시 의장으로 뽑았다. 그러자 민주당은 또 소송으로 맞섰다. 지난 8월 라 의장은 두 번째 직무를 정지당했고, 본안 소송이 진행 중이다. 국민의힘 의원들은 “민주당이 회의는 하지 않고 의정비만 챙기면서 소송과 고발을 남발하고 있다”고, 민주당 의원들은 “국민의힘이 다수당 힘으로 의회를 장악해 파행하게 만들었다”면서 책임을 서로에게 미뤘다.
이러다 보니 종로구의회는 출범 후 15개월 동안 의원 전원이 출석한 회의는 9차례밖에 열지 못했다. 지난 5월 열린 전체 회의가 마지막이다. 조례를 통과시킨 회의도 5번뿐이었다.
의회 파행이 이어지자 종로구는 지난달 의회 사무국에 파견했던 사무국장을 비롯해 구청 공무원 12명을 복귀시켰다. 종로구 관계자는 “장기간 의회가 파행해, 의회 파견 공무원들을 주민들을 위한 업무에 투입하고자 복귀시켰다”고 했다. 이후 의회 사무국에서는 운전이나 청사 방호 업무를 하던 직원이 행정 업무를 보고 있고, 구의회 소속 속기사가 홍보팀장 역할을 겸하고 있다.
피해는 고스란히 주민들에게 돌아갔다. 종로구가 지난 8월 의회에 제출한 307억원 규모 추경예산안은 심사도 받지 못하고 있다. 이 예산에는 보훈 예우 수당과 취약 계층 복지 사업 143억원, 하수도·빗물받이 준설, 도로 기반 시설 보강 등 재난 대응 예산 20억원 등이 포함돼 있다.
민생을 위해 구청이 발의한 조례 19건도 처리되지 않고 있다. 이 중 의료 급여 기금 연장 조례가 포함돼 있는데, 통과되지 못하면 내년부터 구민 대상 의료 급여 사업이 중단될 상황이다. 최윤호 종로구청 사내 변호사는 지난달 의회 게시판에 “의료 급여 기금 조례와 주차장 특별 회계 조례가 통과되지 않으면 행정상 중대한 지장이 발생한다. 구민 생활의 근간이 되는 민생 조례가 폐기되지 않도록 해달라”는 호소문을 올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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