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분히 일상 지키는 이스라엘 “두려움을 느끼는 순간 지는 것”

정철환 특파원 2023. 10. 13. 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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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텔아비브 현장… 정철환 특파원 르포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무장 세력 하마스의 전투가 이어지는 가운데 10일(현지 시각) 텔아비브의 한 상점에서 행인들이 식료품을 구매하고 있다./AFP 연합뉴스

“테러 공격은 일상이에요. 전쟁이라고 달라질 건 없죠. 두려움을 느끼는 순간 지는 겁니다.”

이스라엘 텔아비브 시내 바이츠만 쇼핑몰에서 12일(현지 시각) 만난 하렐(40)씨는 휴대폰용 케이스를 고르고 있었다. “하마스의 로켓 공격이 두렵지 않으냐”고 묻자, 그는 건너편의 ‘대피소(Safe Zone)’ 안내판을 손으로 가리키며 “그럼 저기 가서 숨으면 되죠”라고 웃었다. 옆에 있던 그의 직장 동료 리암(38)씨도 “외국인들은 모르겠지만 우린 이런 상황에 ‘쿨(cool·초연)’하다”라며 “이스라엘의 일상을 파괴하려는 게 저들(하마스)의 목적이고, 거기에 휘둘리지 않는 게 우리가 맞서 싸우는 방법 중 하나”라고 했다.

지난 7일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의 이슬람 무장 단체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기습 공격해 전쟁이 발발한 지 엿새째, 이스라엘에서 1300명이 넘는 군인과 민간인이 숨졌고 팔레스타인 측 사망자도 1200명으로 집계됐다. 양측에서 모두 2500명 이상이 숨졌음에도 양측은 계속 로켓과 미사일 공격을 주고받고 있다. 야간에도 수시로 폭발음과 함께 공습 경보가 뜬다. 로켓포 공습의 타깃이 된 텔아비브 시민들은 놀라울 만큼 냉정한 모습으로 일상을 유지하고 있다.

이스라엘, 주민들에 총기 지급 - 12일(현지 시각) 이스라엘 북부 국경 인근의 한 키부츠(집단농장)에서 이스라엘 주민들이 소총을 비롯한 무기를 지급받고 있다. 이날도 이스라엘 남쪽 가자지구와 북쪽 레바논, 시리아 국경 인근 등에서 로켓·미사일 공습과 교전이 이어지면서 양측 사망자가 2500명을 넘었다. /AFP 연합뉴스

시내 거리의 수퍼마켓과 카페, 식당, 옷 가게 등 상업 시설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모두 문을 열었다. 문을 닫은 상점이 하나 있어 가보니 ‘정기 휴일’이라는 안내가 나와 있었다. 점심 시간을 맞아 다양한 먹거리로 유명한 텔아비브의 명소 ‘사로나 마켓’과 주변 거리는 직장인들로 붐볐다. 주요 쇼핑몰도 모두 활짝 문을 열고, 사람들이 북적였다. 대부분 상점에 생수가 품절된 것을 제외하면 사재기도 없었다.

기업들도 모두 일상 업무에 몰입하고 있다. 건축 자재 무역업을 한다는 펠레그(45)씨는 “우리는 싸우면서 건설하는 데(building while fighting) 익숙하다”며 “며칠 전까진 건설 현장이 대부분 쉬었지만, 지금은 다들 복귀해 밀린 일을 하느라 바쁘다”고 했다.

하마스의 집중 공격 이후 10일까지 휴교했던 학교들도 모두 다시 수업을 시작했다. 아담 하코헨 거리의 그레츠 초등학교 운동장에서는 아이들이 농구 수업을 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마주친 ‘워킹맘’ 미리암(39)씨는 “아이 둘과 함께 주말 내내 전쟁 이야기를 들으며 집 안에만 있으니 너무 힘들었다”며 “아이들도 다시 등교하면서 마음의 안정을 찾고 있다”고 했다.

거리의 미용실에는 머리 손질을 하는 이들이 여럿 눈에 띄었다. 케피라(31)씨는 군복을 입은 채 미용실에서 나왔다. 그는 “냉정하고 침착해야 이길 수 있다. 겁을 집어먹는 순간 사람들은 흩어지고 단합이 깨진다는 게 탈무드(유대교 가르침을 담은 책)의 가르침”이라며 “일상 유지는 심리전 측면에서도 중요하다”고 했다.

가자지구 인근으로 이스라엘군 집결 - 이스라엘 군인들이 11일(현지 시각) 팔레스타인 무장 단체 하마스의 본거지 가자지구에서 5㎞가량 떨어진 남부 도시 베에리를 순찰하고 있다. 이 지역에서 지난 7일 하마스의 기습 공격으로 민간인 100여 명이 사망했다. /EPA 연합뉴스

다만 출장이나 관광으로 체류 중인 외국인들은 동요하고 있다. 이들은 이스라엘군의 가자지구 진입이 시작돼 지상전이 본격화하면 항공편이 완전히 끊겨 본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고립될까 우려하고 있다. 바이츠만 거리의 ‘비탈 호텔’ 로비에서 만난 프랑스인 관광객들은 “파리행 비행기가 다음 주 초까지 모두 취소돼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이다”, “일단 요르단이나 두바이 등으로 빠져나가려고 하는데 항공료가 폭등해 난감한 상황”이라고 했다. 같은 호텔에 묵는 한 중국인 사업가도 “어제 오늘 연속으로 항공편이 취소됐다”며 “대사관에 연락해봤지만 이렇다 할 답이 없어 여기서 고립되는 게 아닌지 걱정”이라고 했다. 중국 정부는 11일부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전역에 여행 금지령을 내렸다.

하마스와 전쟁 발발 전까지 이스라엘은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가 이끄는 극우 성향 정부의 ‘사법 무력화 입법’ 파동으로 나라가 완전히 둘로 쪼개져 있었다. 학생과 근로자는 물론, 주부와 예비군들까지 최대 수백만명이 반(反)네타냐후 시위에 나섰다. 군경이 시위 진압에 투입되면서 내전 직전을 연상케 하는 모습도 보였다. 하지만 지금 이스라엘 국민과 정치권은 좌우, 여야 없이 단결했다. 네타냐후는 11일 베니 간츠 전 국방장관이 이끄는 국가통합당 등 야당과 ‘전시 비상 통합 정부’를 구성하고, 공동으로 전시 내각을 꾸린다고 발표했다.

텔아비브 아리오조로프 시외버스 정류장에서 군복을 입고 서 있던 브나야(25)씨는 “우선 나라가 살아야 민주주의도 가능하다”며 “지금은 정파를 따질 때가 아니다”라고 했다. 그는 지난 3월부터 네타냐후의 사법 무력화에 반대하는 시위에 열심히 참여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지난 7일 하마스의 기습 공격에 어린이 등이 참혹하게 살해·납치되는 모습을 보고 자원 입대를 선택했다. 그는 “지금은 단결할 때”라며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은, 이 전쟁을 이긴 뒤 다시 이어질 것”이라고 했다.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이 12일(현지 시각) 이스라엘을 찾아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와 회담을 가진 뒤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로이터 연합뉴스

전쟁은 길어질 조짐을 보이고 있다. 네타냐후는 11일 “우리는 반드시 하마스를 분쇄하고 파괴해 지구상에서 사라지게 할 것”이라고 했다. 12일에도 가자지구 인근에서 이스라엘군과 하마스의 교전이 이어졌다. 북부 레바논 국경 접경 지대에서는 드론이 출몰하고 테러리스트 침투 경보가 울리면서 주민 수만명이 대피소로 피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이스라엘군은 레바논의 무장 세력 헤즈볼라와의 전투에 대비, 위험 지역 주민을 대피시키고 예비군 배치를 시작했다.

이스라엘군도 전일 밤 가자지구에 최소 200건 이상의 폭격을 이어갔다. 전기와 수도, 연료 공급 중단 등 봉쇄 조치가 계속되면서 가자지구 주민들에 대한 인도주의적 우려도 커지고 있다. 알자지라 방송은 “가자지구 내 유일한 발전소는 작동을 멈췄고, 병원은 비상발전기로 버티고 있다”며 “사회 기반 시설이 마비되면서 가자지구의 상황은 수백년 전으로 돌아간 듯하다”고 전했다.

이스라엘군의 가자지구 진입이 임박했다는 예상이 잇따라 나오는 가운데 CNN은 “미국이 이스라엘 지상군의 가자지구 투입에 대비해 민간인 대피 대책을 논의 중”이라고 보도했다.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은 이날 오전 텔아비브에 도착해 네타냐후 총리 및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마무드 아바스 수반과 각각 회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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