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 투병 견뎌내니… 거대하기만 했던 山이 살포시 다가오더라
산은 야트막하고, 초원은 아담하다.
사람 키 크기의 조각과 설치 작품이 마치 한 폭의 산수화처럼 3차원으로 공간에 펼쳐졌다. 관객들은 그 사이를 걸으며 공감각적인 풍경의 일부가 된다. 지난 7월까지 ‘현대미술 악동’ 마우리치오 카텔란 전시로 시끌벅적했던 전시장이 차분하고 사색적인 공간이 됐다. 서울 한남동 리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중견 작가 강서경(46) 개인전 ‘버들 북 꾀꼬리’. 해외에서 주목받은 작가의 초기 대표작부터 다양한 방식으로 작품 세계를 확장해 일군 신작까지 출품작만 130여 점에 달하는 대규모 전시다.
리움미술관이 개관 20년간 한국 생존 작가의 개인전을 연 것은 서도호, 양혜규, 김범에 이어 네 번째. 강서경이 현재 국내외 동시대 미술에서 얼마나 중요한 작가인지 말해준다. 2016년 광주비엔날레에서 소개된 그의 작품을 보고 해외 미술계가 폭발적 관심을 보였고, 2018년 미국 필라델피아 현대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2019년 아트바젤에서 ‘발로아즈 예술상’을 받았고, 베네치아비엔날레 본전시장에도 작품을 설치하며 왕성하게 활동하던 그는 이듬해 암 판정을 받고 급브레이크를 밟아야 했다.
숱 많고 곱슬한 머리가 트레이드 마크인 작가는 하얗게 센 머리로 전시장에 등장했다. 그는 “제가 머리발로 살았던 사람인데 항암 치료한 이후 검은 머리가 나지 않는다”며 웃었다. 2020년 재개관을 1년 앞두고 강서경 개인전을 준비하던 리움은 3년을 기다렸고,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 보테가베네타가 전시 후원을 결정했다.
작가는 “출산과 암 투병이 겹쳐지면서 예전엔 거대한 추상의 덩어리로 느껴졌던 산이 어느 순간 제 옆에 살포시 다가오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사계절을 모티브로 만든 신작 시리즈 ‘산’의 높이가 160㎝를 넘지 않는 이유다.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가 좋아 서촌에 작업실을 마련하고 인왕산을 바라봤다는 그는 “당시 사람들이 바라본 풍경이 현대미술 공간으로 온다면 그때와 지금의 스토리가 교차될 수 있을지 생각했다”고 했다.
동양화를 전공한 강서경은 평면 회화에 머무르지 않고 자신의 예술 세계를 확장해 왔다. 조각, 설치, 음악, 영상, 퍼포먼스까지 다양한 매체의 경계를 허무는 실험을 거듭했다. 그는 “내게 회화란 보이지 않는 사각 공간을 인지하고, 그 안에 무엇을 채워 넣을지 고민하는 작업”이라고 했다.
초기작인 ‘정井’은 세종이 만든 전통음악 악보인 정간보에서 ‘우물 정’ 자 모양의 사각 틀에서 착안했고, ‘자리’ 연작은 화문석(돗자리)이 무대가 되는 조선시대 1인 궁중무용 ‘춘앵무’에서 떠올렸다. 곽준영 리움미술관 전시기획실장은 “많은 작가가 전통을 소재로 쓰지만 재료만 가져다 쓰거나 주제만 현대로 바꾸는 등 한계가 있다”며 “강서경은 전통이 가지고 있는 철학적인 에센스를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해석해 현대미술 언어로 풀어내는 작가”라고 했다.
추상적인 조각에서도 ‘인간’이 느껴진다. 초기작인 ‘그랜드마더 타워’는 돌아가시기 직전 힘들게 몸을 일으키는 할머니의 모습을 금속 골조를 쌓고 실을 친친 동여매 기울어진 조각으로 표현했다. 작가는 “투병을 하면서 미술은 결국 혼자가 아니라 함께한다는 것을 깨달았다”며 “스스로에게, 관객들에게 ‘지금 이 시간’이 소중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고 했다. 12월 31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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